인간이 1년을 365일로 정해 놨기 때문에 우리는 366일을 살지 않고 다시 1일을 산다. 365일 마다 리셋이다. 그래서 괜히 다 바꾼다. 달력을 바꾸고 시무식을 하기에 앞서, 그 중 제일 먼저 달라 지는 것은 사람의 마음인 것 같다. 지난해가 유난히 힘들었던 사람은 다시 시작되는 한 해가 기대되고, 흐르는 시간이 아쉬운 사람은 유한한 앞날의 소중함을 느끼고 더욱 꼼꼼한 계획을 세운다.그러면 가끔, 달력의 장단에 놀아나는 느낌이 든다. 운동을 시작하고, 한달에 책을 몇 권을 읽기로 결심하는 것 등은 작년에 다 해 본 일이다. 그게
아인슈타인의 책상아인슈타인이 책과 서류로 가득 찬 자신의 책상에 대해 이런 말을 했다는데, 혹시 들어 보셨는지 모르겠다.“어수선한 책상이 어수선한 정신을 의미한다면, 텅 빈 책상은 무엇을 의미하는가?(If a cluttered desk is a sign of a cluttered mind, then what are we to think of an empty desk?)”인터넷을 찾아보면 스티브 잡스나 마크 저커버그 그리고 아마존의 제프 베이조스의 책상 사진도 아인슈타인의 책상 못지 않게 어수선하다. 멀리 볼 것도 없이 나도 그런 혼
월급쟁이로 사는 것이 얼마나 고된 일인지, 누군가에게 급료를 꼬박꼬박 주거나 매달 임대료를 내야 하는 것이 얼마나 어깨를 짓누르는 일인지, 겪어본 자는 알 것이다. 하는 일마다 대박을 터뜨리거나 누군가에게 아쉬운 소리 한 번 할 일 없는 부러운 인생을 사는 사람들도 어딘가 있겠지만 그들은 정말 ‘어딘가에’ 있을 것이고, 나는 잘 모르는 삶이다.그 중 누군가의 ‘지갑을 열게’ 하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경제 활동이란 것이 결국은 모두 이 범주에 들어가겠지만 특히 무언가를 파는 일 즉 영업과 판매를 직접적으로 하는 사람들, 그들
별 탈 없이 안녕한 나날들 보내셨습니까? 물난리나 가뭄 혹은 화재로 인한 피해는 없으셨나요? 길 가다 험한 꼴을 당하진 않으셨는지요. 무더위로 많이 지치진 않으셨길 바랍니다… 라는 말들부터 꺼내야 할 것 같은, 정말 지독한 여름이었다. 매 순간 쏟아지는 뉴스들로부터 놀라지 않고 평정심을 찾으려면, ‘로그 아웃’을 꼭 해야만 한다. 그리고 일년 내내 마셔도 좋지만 여름에 특히 생각나는 소비뇽 블랑을 제대로 즐기려면 반드시 에어컨도 켜야 한다. 그러나 소비뇽 블랑의 파릇한 풀 향기에 집중하는 호사 속에서도 마음 한 구석이 불편하다. 모
한 인터뷰에서, ‘와인을 즐기는 나만의 방법’을 소개해 달라는 질문을 받은 적이 있다. 기쁨을 함께 나누면 두 배가 되듯 와인도 함께 마시면 술맛이 두 배가 되지 않겠냐고 너스레를 떨고 다녔지만, ‘나만의 방법’이라니, 한 입으로 두말한다고 누가 뭐라 하지는 않을 것 같다. 아, 그건 어디까지나 일반적인 이야기이고요, 저는 혼자 마시는 걸 좋아합니다. 혼술이라고 하지요.혼술과 혼밥, 혼자 보는 영화, 나아가 홀로 떠나는 여행까지. 조금의 적적함만 견딜 수 있다면 그게 무엇이든, 함께 하는 것에서는 느낄 수 없는 새로움을 발견할 수
이른 봄, 한 호텔에서 열린 이탈리아의 와이너리, 꿰르챠벨라(Querciabella)의 시음회에 다녀왔다. 국제적인 품종과 이탈리아 토착 품종을 아우르는 와인들의 향긋한 풍미가, 아직은 싸늘한 서울의 밤을 따듯한 바람이 부는 토스카나의 포도밭 한 가운데로 데려다 주었다. 하나씩 나오는 맛있고 예쁜 음식들. 입 안에서 톡톡 터지는 과일 무스에 상큼한 지중해 맛 와인 이라니. 히죽 웃으며 고개를 들고 주변을 둘러 보았지만, 조금씩 오물거리면서도 한 손에 든 휴대폰을 보느라 다들 정신이 없다. 모두 바쁜가 보다.음악이라도 나오면 좋으련만
가득 담긴 빨래 바구니가 휘청거리고 쓰러질 때마다 그 옆에 서 있는 너도 같이 넘어져 베란다 타일에 달그락 달그락 소리를 내며 이리 데구르르 저리 데구르르 한다. 그러다 좁은 바구니에서 뛰쳐 나온 옷가지들에 닿을 것 같으면, 너의 라벨에 덕지덕지 붙은 곰팡이가 행여나 빨랫감에 들러붙기 라도 할까 구르는 너를 얼른 일으켜 세우고 너를 만진 더러운 손을 재빨리 씻는다. 베란다가 아무리 좁다 하기로 서니 왜 하필 빨래 바구니 옆에 너를 두었는지 모를 일이다. 아무튼 벚꽃도 다 진 완연한 봄도 왔겠다, 떨어질 줄 모르는 이 지독한 기침은
술을 꿀떡꿀떡 맛있게 마시는 사람들을 보면 감탄이 나온다. 술 잔을 높이 쳐들어, 마지막 한방울까지 아쉬운 듯 털어 넣으려 안간힘을 쓰는 모습을 볼 때는 나까지 매우 아쉬워진다. 여기서 ‘꿀떡꿀떡’은 물론, 음료가 목구멍으로 들어가는 소리 ‘꼴딱꼴딱’의 의성어 표현을 과장한 것이지만 말 그 대로 ‘꿀’과 ‘떡’의 조합이 연상되어, 단 것을 좋아하는 나는 저 투명한 술에 분명 설탕이 들어가 있겠거니 한다. 신화 속 신들이 연회에서 마셨다는 달콤하고 향기로운 넥타(Nectar)가 분명 하겠거니 한다. 비난하거나 조롱하는 것이 아니다.
강의를 듣는 분들로부터 가끔 그런 소리를 듣는다.“비싸게 산 프랑스 와인인데, 편의점에서 산 만 원도 안 되는 신대륙의 어느 메를로 와인보다 향이 강하지 않은 것 같아요. 좋은 와인일수록 풍기는 향이 강렬하다면서요. 어떻게 된 걸까요?”나는 이렇게 대답한다.“이 와인은 아주 섬세하답니다. 거칠고 단순한 몇 가지 향으로 단번에 사람의 코를 찌르는 와인이 아닌 거죠. 잔을 살살 돌리면 복합적이고 오묘한 아로마가 살며시 퍼지다 그 향은 곧 강하고 오래 지속될 거예요."복합적이고 오묘한 아로마는 어디로 갔을까? 달콤한 산딸기와 블랙커런트
잘생긴 남자 보기를 돌 보듯 하는 것도 재주라면, 나는 그런 능력을 가지고 있다. 물론 오래전 압구정역 근처를 지날 때 나보다 긴 머리를 휘날리며 인도를 ‘워킹’하는, 10등신 정도 되는 남자(아마도 모델이리라)를 나도 모르게 5초 정도 쳐다본 적은 있다. 하지만 본능적으로 감탄했을 뿐이다. 멋진 피조물이었다. 그것 뿐이다. 오히려 반감(?)이 들 때는 있다. 흥, 어쩌다 반반한 외모를 가지고 태어나 얻는 불로소득이 얼마나 될까. 치사하게도 인간으로서 질투가 난다.잘생긴 남자 뿐 아니라 황금 보기도 돌보듯 할 줄 안다. 그런데 황금
나는 먹고 싶은 게 많은 사람이다. 이것도 먹고 싶고 저것도 먹고 싶다. 어릴 때는 엄마가 수고스럽게 만든 피자 앞에서 난데없이 떡볶이가 먹고 싶다고 해 매를 벌기도 하고, 성인이 된 지금도 어쩌다 돈까스를 먹는다 치면 옆에 앉은 사람이 먹는 메밀국수가 어쩐지 더 맛있어 보이는 식이다. 먹는 데 있어서 짓궂고 탐욕스러운 편이라고나 할까. 결국은 식탐이 많은 사람이라는 말이다.요새는 외식 물가가 많이 오른 탓에 이럴 바에 돈을 조금 더 주고 뷔페에 가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특별한 날, 무리를 해서 찾는 호텔의 고급 뷔페
‘어린 시절은 단 한 번이지만 우리는 평생을 두고 기억한다’.감독의 유년 시절을 그린 반 자전적 영화, 리버티 하이츠(Liberty Heights, 1999)라는 영화에 나오는 대사다. 불과 몇 달 전 일도 기억 못 하면서 옛날 일은 생생하게 떠오르는 나의 경우를 보면 틀린 말이 아닌 것 같다.어릴 적, 지금 생각하면 희한하다 싶을 정도로 누군가를 강아지처럼 졸졸 따라다녀, 정신을 차리고 보면 나도 이해할 수 없는 의아한 장소에 있곤 했다.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까지 그 대상은 우리 할머니였다. 아침을 드시고 소일거리를 하시다가 특
가끔은 와인을 소개하고 그것에 대해 말하는 사람으로서 나는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도 그럴 것이 와인을 직업으로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당당하고 자신감 있어 보인다. 적어도 내 눈에는 그렇다. 외모는 또 얼마나 깔끔한 지. 잘 빗은 머리, 단정한 얼굴, 와인병을 다루는 섬세하고 능숙한 손과 당찬 눈빛 그리고 분명하고 확신에 찬 말투까지.아무리 와인이 그저 먹고 마시는 음료에 불과하다 하더라도 주는 대로만 마실 게 아니라 내가 마시는 게 무엇인지 알기 위해서는, 진열된 와인 선반에 붙은 와인의 이름과
이제 겨우 30개월 된 아이도 안다. 서른 달을 사는 동안 이것저것 먹어 보니 당근은 아무래도 자기 입맛에 안 맞는 다든지, 어린이집 등원 패션으로 분홍색(혹은 파란색) 만은 용납이 안된다 하는, ‘이건 정말 못 참겠다’ 싶은 것들 말이다. 차곡차곡 살아온 세월이 수십 년이 되는 사람은 오죽할까. 나에게도 견디라면 견디겠지만 이왕이면 피하고 싶은, 남들은 아무도 궁금해하지 않을 ‘참기 힘든 두 가지’라는 것이 있다.첫째는 불어버린 라면이다. 라면뿐 아니라 국수 형태를 띤 모든 불은 면발이 이에 속한다. 그런 사람들이 있다. 국물이
잘 짜인 틀 안에 있다는 것이 얼마나 편안하고 아늑한 지! 그 안에는 수많은 규칙이 있지만 별로 불편함을 느껴본 적은 없다. 그래서 길거리에 침이나 껌을 뱉는 일이 경범죄를 넘어 중 범죄로 취급된다 해도 나랑은 별로 상관이 없는 일이다. 나는 거리에 침이나 껌을 뱉지 않기 때문이다.규율이 많은 사회는 대부분 예외 없이 아귀가 딱딱 들어맞고, 체계적이다. 그 속에 사는 사람도 그렇게 산다. 논리적이고 합리적이어야 하며 결론은 충분한 근거가 있어야 하고 무엇보다 실현 가능해야 한다. 이 완벽한(?) 시스템을 일단 구축하면 그 안에서 그
미국에서 가장 ‘스노비쉬’(Snobbish, snobby, snob 같은) 한 주(州,state)가 어디인지에 대한 조사를 다룬 기사를 최근에 읽은 적이 있다. 이는 미국의 한 취업사이트가 만든 4가지 영역에서 가장 높은 점수를 취득한 주를 의미하는데, 그 기준이란 것이 다음과 같다. 대학 졸업자의 비율과 예술 혹은 인문학 학위 취득자의 비율, 그리고 해당 주가 보유 한 아이비 리그 대학(미국 북동부에 위치한 8개 명문 대학)의 수, 그리고 마지막 하나가 연간 소비되는 그 지역 와인의 양이다. 그리하여 그 영예의 주인공은 미국의 동
프랑스의 영국 출신 와인 상인들 사이에서는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가 한 가지 있다. ‘’(와인을 고르고) 살 때에는 빵이랑 사고 (와인을) 팔 때에는 치즈와 함께 팔라.’’ 이 이야기는 다양한 버전이 있는데 빵이 들어갈 자리에 종종 사과가 들어가기도 하고 심지어 당근이 들어가기도 한다.이게 대체 무슨 소리 인고하면, 와인을 구입하기 위한 시음을 할 때 사과나 당근 이랑 먹어도 맛이 좋았다면, 그 와인은 꽤 괜찮다는 의미다. 사과나 당근이 좀 심했는지, 오늘날의 현명한 시음자들은 주로 물을 이용한다. 와인을 맛본 후 입안을 깨끗이 헹궈
평생 운동이란 걸 해 본 적이 없는 사람이 몸에 이상이 있음을 발견하고 그제서야 건강한 사람이 되겠다고 다짐하며 뭔가를 시작하려고 하면, 막상 선택할 수 있는 운동의 종류가 많지 않다는 사실 앞에서 당황하게 된다. 즉 나처럼 목 디스크가 있는 사람에게 고개를 하늘 높이 쳐들어 공을 던지고 손목과 어깻죽지의 힘을 이용해 시원스레 내려치는 테니스나 배드민턴 따위는 꿈도 못 꿀 일이다. 방치되었던 몸이라 그렇다고 목 이외의 다른 부위가 온전 할 리 없으니 이건 이래서 안되고 저건 저래서 안된다.격렬한 운동이 아니어야 하고 지속 가능할 만
나에게 쇼핑이란 아주 어려운 일이다. 물건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특히 옷의 경우가 그렇다. 어쩌다 확신이 들어 상의를 하나 골랐다 할지라도 다음에는 그에 어울리는 하의를 찾아야 하는 수많은 경우의 수가 포함된 미션이 존재한다. 이럴 때는 나도 유명인처럼 옷을 고르고 입혀주는 스타일리스트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럴 리 없는 나는, 웬만해서는 옷을 사지 않고 몇 안 되는 비슷한 옷을 계속 입고 다닐 뿐이다.와인은 옷보다 더하다. 많아도 너무 많다. 옷이야 디자인과 질감의 차이가 눈에 띄지만, 와인은 마셔보지 않는 이상 병
갈매기 소리에 깼다. 어젯밤, 바다를 보러 갈 생각을 하며 잠들었더니 환청이라도 들리나? 아니다. 정신을 차리고 들어도 정말 갈매기 울음소리가 맞다. 서울에서만 나고 자란 사람에게는 시내 한복판에서 들리는 갈매기 울음소리가 여간 신기한 게 아닌지라 나는 갈매기 소리의 진원지를 찾으려 창문을 열고 아래위를 두리번거린다. 바닷가에서 놀던 갈매기들이 바람을 타고 도우루 강가까지 온 걸까.어제 그 높은 탑과 축축하고 가파른 골목길을 수차례 왕복했다는 사실이 무색하게 오늘 아침은 몸이 더 가벼워진 느낌이다. 게다가 휴대폰의 성급한 알람 소리
그럴 리가 없는데, 아침에 눈을 떠 보면 희한하게 개운한 날이 있다. 과음한 다음날 일어나 보니 며칠 동안 없어지지 않던 뾰루지가 말끔히 사라지고 찌뿌둥하던 몸도 한결 가벼운 느낌이 드는 날처럼 말이다. 포르투에서의 첫 밤을 보낸 다음 날이 바로 그런 날이었다.호텔의 친절한 직원들 때문인지 아니면 전날 먹은 따뜻한 포르투갈의 전통 요리 덕분인지 그것도 아니면 그저 피로 때문인지, 차가운 숙소에도 불구하고 나는 소위 꿀 잠을 잤다. 호텔을 나서니 우중충한 날씨에 하늘은 금방이라도 비를 쏟을 것 같다. 다양한 색을 칠한 거리의 건물들은
지갑은 두둑한데 시간에 쫓기는 사람과 가진 거라고는 시간밖에 없는 사람의 여행은 다를 수밖에 없다.내가 비록 후자에 속하는 사람이라고 해서 크게 불만이 있다는 얘기는 아니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하루 종일 오르셰 미술관에 있을 수 있는 축복은, 미슐랭 스타 레스토랑의 예약 시간에 닿기 위해 미술관을 한 시간 만에 완주해야 하는 사람의 긴박함에 비할 바가 아니기 때문이다. 거기에 배가 고프면 밤늦게까지 하는, 이민자 출신의 친절한(파리 치고는!) 사장님이 운영하는 케밥 가게에서 아주 만족스럽게 케밥을 먹을 줄 아는 서글서글한 식성까
남들의 부러움을 사던 유럽 생활도 적응하지 못하던 시절이 있었다. 생각해 보면 인천 공항을 떠나 비행기에 오르는 순간부터였던 것 같다. 유학 계획표까지 작성하며 부모님을 안심시킨 나는 분명 새로운 도전 앞에서 가득 설렘을 안고 당당히 걸어갔어야 했다. 하지만 배웅을 나온 부모님을 향해 손이 떨어져 나가도록 바이바이를 하는 동안의 내 발걸음은 마치 가위에 눌려 꼼짝할 수 없는 다리만큼이나 쉽게 움직여지지 않았다.경유지인 베트남 호찌민의 공항 로비에 앉아 프랑스 샤를 드골 공항을 향하는 비행기를 기다리는 긴 시간 동안 나는, 그제서야
가끔 꿈같은 상상을 해 본다. 온 세상이 나를 위해 존재하기라도 한 것처럼 지금 이 순간 나는 최고로 행복한 사람이다. 환희의 순간을 함께 할 가족, 친구들, 동료들 사이에서 나는 한 번도 가져보지 못했던, 입이 귀에 걸리는 함박웃음을 터뜨린다. 이윽고, 다가오는 아이스버킷 속 샴페인을 장엄하게 들고는 미친 듯이 위아래로 흔든다. 터져 나올 코르크 마개가 튀어 오르는 각도 따위는 무시하고 엄지손가락 하나로 마개를 툭 건드려 샴페인을 딴다. 병을 너무 많이 흔들었나? 거품이 끊임없이 쏟아져 나온다. 상관없다. 넘치는 거품은 넘치는 기
한 달 전 아는 분께 와인 한 병을 추천한 적이 있다. 와인을 마셔 본 경험이 거의 없다는 그분에게 나는, 이탈리아 풀리아(Puglia) 지방의 프리미티보(Pimitivo:진판델의 다른 이름) 품종의 와인을 소개했었다. 과일의 달콤하고 화려한 향과 떫은맛이 거의 안 느껴져 입안에서 느껴지는 실크 같은 감촉이 와인을 처음 접해 보는 사람도 무난하게 마실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2만 원 대의 그리 비싸다고는 할 수 없는 와인을 손에 든 그녀는 좋은 날, 날 잡아서 마실 거라며 활짝 웃었다. 그리고 한 달이 흘러 다시 만난 그녀에
언제부턴가 ‘선생님’ 소리를 종종 듣는다. 처음엔 프랑스에서였다. 내가 세 들어 살고 있던 건물에 새로운 한국인 학생이 들어왔는데, 프랑스 생활에 대한 여러 가지 조언을 얻고 싶다며 내게 연락을 해 온 것이다. 프랑스의 행정부터 교통카드를 만드는 법 그리고 동네 지리까지, 몇 개월을 먼저 겪었다고 이런저런 소소한 팁 등 작은 정보라도 줄 수 있는 그 시간이 나는 즐거웠다. 하지만 그녀와의 만남이 지금까지도 잊히지 않는 가장 큰 이유는 그녀가 나를 부르던 호칭이다.그렇다. 그녀는 말끝마다 나를 선생님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그래서 선
달력이 9월에서 10월로 넘어가면 나도 모르게 ‘아! 10월이구나!’ 하고 외친다. 더 이상 덥지도 않고 그렇다고 그렇게 춥지도 않은 10월은 바쁜 하루 중 잠시 앉아 쉬어 가는 늦은 오후의 휴식 시간과도 같다. 긴장으로 뭉친 근육을 풀기 위해 스트레칭을 하고, 그러다 고개 들어 하늘도 한번 보고, 이리저리 허리를 돌리다가 우연히 지나가던 고양이랑 눈도 마주친다. 정신없이 보내다가 미처 보지 못했던 사소한 많은 것들을 비로소 둘러볼 여유가 생기는 그런 오후 말이다. 그런 10월이 언제 이렇게 가 버린 걸까.10월에는 꼭 들어야 할
최근 이사를 했다. 가구라고는 하나도 없는 채로 하는 이사라 당장 누워 잘 침대며 먹고 마실 식탁과 의자 등 최소한의 가구가 필요해 가구 거리라는 곳을 갔다. 쇼핑에는 취미도 재주도 없는 나는, 입구에서부터 즐비한 비슷비슷해 보이는 가구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니 벌써 정신이 혼미하다. 어떻게 하면 현명한 소비자가 될 수 있을까? 생각해 둔 예산 안에서 편리하고 실용적이며 견고하고, 가격까지 합리적인 것을 골라야만 한다. 디자인은 다음 문제다.그런데 그 디자인과 재질에서 내 눈을 사로잡는 게 있었으니 크나큰 가구 매장에 들어선 지 5
영국의 저명한 와인 전문가 휴 존슨(Hugh Johnson)은 그의 저서 의 첫머리에서 이렇게 말했다.‘’레이블을 보지 마라. 가격도 무시하라. 오직 하나만 생각하라. 바로 지금 잔에 든 이 와인이 얼마나 맛이 있는가 하는 것만 생각하라!’’지당한 말씀이다. 이보다 더 간단하고 명확하게 와인을 대하는 자세를 설명하진 못 할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딘가 찜찜한 의문은 남는다. 마치 ‘삶이란,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즐기는 것’이라는 인생의 깨달음을 깊이 공감하면서도 구체적으로 어
와인을 추천해 달라는 소리를 종종 듣는다. 그럴 때마다 나는 무거운 책임감(?)을 느낀다. 와인을 배웠다고 하는 내게 많은 기대(?)를 하고 조언을 구할 텐데 내가 그 기대에 부응해서 상대방이 원하는 와인을 찾아낼 수 있을지 어떨지 몰라 걱정이 되기 때문이다. 와인은 고작 마시는 음료일 뿐 너무 심각하게 생각할 것 없다고 말하고 다니는 내가 그런 질문을 받을 때마다 인생의 커다란 해답이라도 내놓아야 하는 것 마냥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는 나 자신이 뭐라 말할 수 없이 어이없을 때가 많다.와인은 그 종류가 너무도 방대해서 조심스러운 나
와인이 함께하는 테이블에서는 상대방이 와인 잔을 대하는 모습만 봐도 그 사람이 와인에 관심이 있는지 없는지, 와인에 대해 어느 정도의 지식이 있는지 없는지를 금방 알 수 있다. 즉 눈앞에 있는 와인을 제대로 음미할 줄 아는 사람인지 여부가 쉽게 드러나는 것이다.우리가 누군가에게 잘 보이기 위해 와인을 마시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왕 마시는 거 와인만이 주는 특별한 즐거움을 온전히 누리고 싶다면, 에티켓이라 불리는 몇 가지 사항들을 잘 기억해 두면 좋을 것이다. 여기에 같이 마시는 사람들을 배려하는 조금의 노력이 더 해진다면 금상
나는 지금 내가 앉아 있는 이 프랜차이즈 카페에서 오늘(8월 29일) 밤 안으로 이 글을 마무리 지어야 한다는 비장한 각오로 노트북 화면을 마주하고 있다. 더 이상 테이블 이용이 불가능한 30일 자정이 되기 전에는 서둘러 이 곳을 빠져나와야 하기 때문이다. 나는 어쩌다 늘 가는 프랜차이즈 카페에서 글을 쓰는 습관이 생겼을까. 변변치 않은 글을 쓰는 나도 이런데 소설처럼 큰(?) 글을 카페에서 쓰는 분들은 이 시기를 어떻게 보내고 있을지 궁금하다. 두꺼운 마스크를 살짝 내리고 커피 한 모금을 잽싸게 마신 후 휴대폰으로 뉴스를 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