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원에서 비서로 일하는 아일린(Ottessa Moshfegh의 소설 'EILEEN' 中)은 지긋지긋한 그녀의 삶에서 벗어나 더 큰 도시로 탈출하는 꿈을 가지고 있다. 그녀가 그런 꿈을 가지게 된 가장 큰 이유는 그녀의 아버지다. 경찰관이던 아버지는 어머니가 죽은 이후 술을 마시기 시작했고 갖은 사고를 치면서 늘 술 심부름을 시키기 때문이다. 삶에 대한 혐오로 가득한 그녀가 무기력하게 매일 사 오는 그 술은 바로 진(Gin)이다.누군가에게 진은 화려한 색과 다양한 향으로 무장한 칵테일을 선사하는 트렌디한 음료로 기억될
‘’아… 지금이 딱 좋은데 슬슬 깨려고 하네‘’.정확히 맥주 500ml가 주량인 엄마는 450ml쯤 마셨을 때에 평소보다 말도 많고 그래서 더 행복해 보인다. 하지만 주량을 채우고 나면 어김없이 도로 정신이 맑아지는 게 문제다. 늘 저렇게 아쉬운 소리를 하시니 말이다. 그렇다고 주량을 넘어 과음을 할 수도 없고.취기에서 오는 이 잠깐의 행복감을 느낄 때면 어김없이, 보르도에 살던 시절 늘 사람들로 붐벼 동네 사랑방과도 같았던 꺄브(Cave) «엉트르 듀 뱅(Entre Deux Vins)»이 떠오른다
솔솔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이 좋아 창문을 열어 두었다. 잠시 볼일을 보고 돌아오니 어느새 내리기 시작한 비가 열어 둔 창문 틈새로 들이친다. 후다닥 창문을 닫는다. 창문에 부딪히는 둔탁한 빗소리와 물을 많이 먹은 수채화처럼 가늠할 수 없이 뿌옇게 변해가는 창밖 풍경들. 나는 손가락 길이만큼 다시 창문을 열고 나뭇잎 위에 호도독 떨어지는 선명한 빗방울의 경쾌한 소리를 더 잘 들으려고 가만히 귀를 갖다 댔다.비 오는 날을 좋아한다. 나에게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날이 활기찬 낮이라면 비가 오는 날은 하루를 마무리하고 한 숨 돌리는 평화
외모 지상주의는 타파되어야 한다. 외모가 그 사람의 전부를 말해 주는 것은 아니며 살집이 있는 사람도, 키에 비해 어깨가 너무 넓어 비율이 좋지 않은 사람도(어쩌다 보니 내 얘기가 되었다) 나름의 각자의 개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하지만 텔레비전 속의 조막만 한 얼굴에 긴 다리, 완벽한 비율을 가지고 있으면서 거기에 더해 운동이 만들어 낸 탄탄한 근육까지 자랑하는 연예인들을 보고 있자면 감탄이 절로 나온다. 그리고는 부러운 듯이 중얼거리게 된다.‘’저 사람은 구조감이 좋네‘’와인에는 유난히 사람의 몸을 사용한 용어가 많다. 맛의
한국에 온 지도 어느새 반년이 넘었으니 보고 싶은 사람들도 다 만나고 먹고 싶은 한국 음식도 다 먹었겠다. 이제는 내가 정말 프랑스에서 살았었나 싶다. 와인 관련 일을 하는 남편 덕에 여러 와인을 맛볼 기회가 많은 편이지만 근처 마트에만 가도 다양한 와인이 즐비했던 프랑스에서의 생활이 가끔 생각나는 것도 사실이다.그러던 차에 서울에서 국제주류박람회가 열린다는 소식을 듣고 꽤 반가웠다. 매년 12월 보르도에서 열리는 보르도 테이스팅(Bordeaux Tasting), 2년에 한 번 열리는 비넥스포(VINEXPO)등의 행사와 비교도 해
와인의 맛을 결정하는 3대 요소로 과 그리고 을 대표적인 예로 든다. 이 요소들을 우리 인간 생활에 빗대어 본다면 포도 품종은 , 생산지는 자라온 , 그리고 제조방법은 우리가 받아온 쯤 되지 않을까?어느 나라에서 어느 부모님을 만나 어떤 교육을 받았느냐는 개인의 자질을 결정하는 데 매우 중요한 요소이긴 하지만 그것과 상관없이 불변하는, 남들과 다른 각자의 고유한 성격과 개성이 있게 마련이다.포도 품종도 마찬가지다. 주어진 토양과 환경에서 생산자만의 기술과 나름의 철학에 따라 와
와인 학교의 졸업을 통과하기 위해서는 현장에서의 실무 경험을 위해 몇 개월간의 인턴과 그 경험을 바탕으로 한 논문을 제출하고 발표를 하여 일정 점수를 획득하는 것이 요건 중 하나다. 대부분의 학생들이 인턴쉽 장소로 와인 카브(Cave)나 샤또(Château) 혹은 레스토랑 등 와인 관련 시설을 선택한 반면 나는 뜬금없이 럼(Rum)을 선택했었다.보르도는 와인의 수도지만, 17세기부터 시작되어 18세기에 절정을 이루었던 럼 무역으로도 유명하다. 그 항구 무역이 성행했던 샤르트롱(Chartrons)가(街)를 지나가던 중 우연
5월은 내리쬐기 시작하는 햇볕만큼 그리고 점점 무성해져 길가를 가득 채우는 초목만큼이나 모든 것이 꽉 찬 달인 것 같다. 짧지 않은 서른한 개의 날들이 축하와 기념의 시간으로 빼곡하기 때문이다.우리 집으로 말할 것 같으면 지난 1일 아버지의 생신을 시작으로 어버이날과 부모님 결혼기념일, 마지막엔 내 생일까지 기념일 챙기기로 바쁘다. 여기에 어린이날, 스승의 날, 성년의 날까지 합하면 기념일의 순수한 의미를 되새기고자 하는 마음은 무뎌지고 계속된 지출까지 더해지면 여러모로 부담이 되는 게 사실이다.매년 그랬던 것처럼 우리 집은 5월
‘’인생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나 멀리서 보면 희극이다.’’많은 사람들이 동경하는 혹은 동경했던 유럽을 생각하면 늘 떠오르는 문장이다. 물론 인생에 대한 깊은 통찰을 표현한 찰리 채플린의 저 유명한 말을 조금 다르게 그리고 단순하게 적용하자면 말이다.유럽의 도시 풍경은 한 폭의 그림엽서 같지만, 거주민들에겐 그곳도 생활의 터전일 뿐이다. 파리를 소개하는 여행 책에 낭만적으로 묘사된 ‘벤치에 앉아 바게트 샌드위치를 먹는 사람’은 사실, 늦은 점심을 허겁지겁 먹고 있는 직장인일 수 있고 그가 먹으며 보는 것은 문학적, 철학적 사유로 가
프랑스는 많은 것들이 작다. 도로의 자동차도 작고, 커피잔도 작고, 카페나 레스토랑의 테이블도 작으며 그 테이블의 간격들도 매우 좁다.그 중에 내가 가장 적응하기 힘들었던 것은 식당의 좁은 테이블이었다. 성인 남자 어깨만 한 너비의 테이블 위에 유리로 된 큰 물병과, 큰 접시, 빵 바구니, 술을 마실 경우 술잔까지 놓아야 하면 그야말로 테이블이 그릇들로 넘쳐난다. 운이 좋아 꽃병과 장식품이 놓인 선반이 있는 구석진 자리의 테이블에 자리를 잡으면 그 선반에 물병이라도 올려 놓지만 그렇지 않으면 정말이지 테이블 옆 바닥에 라도 자주 쓰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5월의 어느 날이었다. 말 그대로 하늘은 파란색, 잔디와 나무는 초록색, 가을 겨울 내내 검은 자켓만 걸치던 사람들도 알록달록 옷을 바꿔 입고 공원의 벤치에, 강을 마주한 잔디밭에, 그것도 아니면 길가의 계단에 무심하게 자리를 잡아 각자의 초여름날을 즐기고 있었다.이런저런 핑계로 늘 만남을 미루고 있던 나는, ‘날씨도 좋은데 오늘 저랑 피크닉 가실래요?’ 라는 그녀의 다정한 제안을 더는 거절할 수 없었다. 항상 내세우던 학교 시험도 어느 정도 마무리가 되고 당분간 특별한 일정도 없으니 만남을 거절할 이유를 더
오늘도 어김없이 검은 외투에 검은 목도리, 마스크까지 꼼꼼히 걸쳤다. 세상의 어떤 전염병도 허용하지 않겠다는 각오를 다지며 얇은 장갑도 끼고 잔뜩 웅크린 어깨를 하고 집을 나선 순간 어라, 불어야 할 찬 바람이 불지 않는다. 파란 하늘과 따듯한 공기가, 힘든 시기를 견디어 내는 우리의 차림새와 너무도 대조되어 초현실적으로 느껴진다.그러고 보니 초목이 싹트고, 겨울잠을 자던 동물들도 땅 위로 나오려고 꿈틀 한다는 경칩이 지났다. 인간이 야기한 각종 문제들에도 불구하고 자연은 이렇게 색을 바꾸고 다양한 모습을 보여주며 그들의 역할을 다
당장 정리해야 할 자료가 있어서 오늘도 집 근처 카페를 찾았다. 카페에 가는 것이 특별히 해야 할 일이 있는 오늘만의 일은 아니지만, 해야 할 일들은 늘 있는데 그것이 항상 카페에서 이루어져야만 하는 것이 문제라면 문제다. 책 두 권 노트북 지갑 핸드폰 충전기 각종 펜이 들어 있는 파우치와 다이어리 끄적일 노트까지 넣은 큰 배낭을 둘러업고 집을 나서면, 굳이 집을 놔두고 그런 행군(?)을 해야 하냐는 엄마의 핀잔이 이어진다. 그러면 나는 속 편한 사람처럼 이렇게 대꾸한다.ㅡ 봉준호 감독도 카페 몇 군데를 돌아다니며 시나리오를 쓰는
"저물어 가는 사막의 석양이야…좀 있으면 찾아들 땅거미와 서로 어우러질 그 ‘다홍색’은…반신에 어둠을 드리우고, 남은 반신에 빛을 머금고 있어.피기 시작한 연꽃, 그리고 수선화. 이 우아함은 생명력으로 넘치고 있다.당신은… 누구십니까? 신비로운 미소… 나한테 질문을 던진다.언어가 아닌 미소로써… 이 와인은 내 어머니입니다!"와인을 소재로 한 유명 만화 속 주인공의 대사 중 일부이다. 와인공부를 시작하기 전에 이 만화를 안 봤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으면 큰일날 뻔했다.
보르도에도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확진자가 나타났다는 기사를 보니 기분이 이상하다. 한동안 프랑스를 공포에 떨게 한 테러도 보르도를 비껴가는 등 국제적으로 논란이 될 만한 사건과 보르도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 했기 때문이다. 예스러운 건물들과는 확연히 대조되는 모던한 전차가 보르도 사람들의 삶만큼이나 느릿느릿 지나가는 도시 속에서, 주말이면 내리쬐는 햇살 아래 일광욕을 즐기는 그들이 이번 사태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을지 궁금해진다.바이러스에 대한 무지로 인한 인종차별이 횡행하다길래 걱정이 되어 보르도에 있는 한국인 친구에게 연락을 해
5년 동안 눈을 보지 못했다.덥지도 춥지도 않은 온난한 기후에서 사는 걸 축복으로 여기는 사람이 많지만, 나에게 눈이 오지 않는 겨울은 겨울이 아니다. 그래서 1년 내내 혹서부터 혹한까지 다양한 날씨가 널을 뛰는 한국의 스펙타클한 기후가 무척이나 그리웠다.올겨울은 유난히 따뜻하다더니 그래서일까. 아직까지 서울에는 이렇다 할 눈 소식이 없다. 나에게는 완벽한 만족과 안락함을 보장하는 하나의 장면이 있다. 이를테면 이런 거다. 창밖은 눈이 그야말로 펑펑 내리고 있다. 나는 노란 불빛에 의지해 안락의자에 앉아 추리소설을 읽고 있다.고요함
열렬한 와인 애호가인 마일즈는 이혼남이다. 작가를 꿈꾸지만, 현실은 고등학교에서 영문학을 가르치는 신세다. 그런 그가 대학 때부터 절친인 잭의 결혼을 앞두고 함께 캘리포니아의 산타이네즈(Santa Ynez) 밸리로 와인 여행을 떠난다. 새파란 하늘과 그림같이 펼쳐진 포도밭, 풍요로운 시음에도 그는 여행 내내 늘 날이 서 있다. 잭으로부터 마일즈의 전 부인인 빅토리아의 재혼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다. 마일즈와 가까운 만큼이나 취향도 다른 잭은 와인보다 여자에 관심이 많다. 여행 도중 만나서 반한 스테파니와의 저녁식사에 함께 가자고 계속
포항에 계신 아빠 친구분께서 올해도 어김없이 과메기를 보내주셨다. 초고추장과 마늘, 고추, 쪽파 그리고 물미역과 마른 김이 나란히 놓인 과메기를 보니 비릿한 바다 내음을 좋아하는 나는 벌써부터 입안에 침이 고인다. 꼬들꼬들하면서도 부드러운 식감과 고소한 맛을 상상하며 초고추장을 푹 찍은 과메기를 젓가락으로 집어 드는 순간 엄마가 물으셨다.“근데 냄새는 왜 맡아?’’언제부턴가 나는 청국장과 같은 특유의 진한 냄새를 풍기는 음식부터 아무런 냄새가 날 리 없는 아이스크림까지, 먹기 직전에 냄새를 맡고, 맛을 상상하는 절차를 거치고 있었다
"2020년부터는 정말 술을 줄이려고"퇴근 후 소주를 반주 삼아 저녁을 맛있게 드시는 걸 삶의 즐거움으로 여기시는 아빠의 며칠 전부터 계속된 공언이다. 아빠의 건강을 염려하는 가족에 대한 배려인 동시에 새해 결심을 공개적으로 외침으로써 스스로 다짐을 공고히 하려는 아빠 나름의 노력이리라. 모두들 응원하는 마음이지만 엄마와 나는 의구심이 먼저 드는 걸 어쩔 수 없다.'이번에는 과연?'프랑스 릴(Lille) 대학병원에서 연구한 결과에 의하면 하루에 4잔 이상의 알코올을 섭취하는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평균적으로
시내에 설치된 거대한 트리와 여기저기서 들리는 크리스마스 캐럴 노래에 '내가 정말 한국에 돌아왔구나'를 실감한다. 이 번잡하고 들뜬 연말의 분위기를 얼마나 그리워했던가. 몇 년 전보다 더욱 심해진 듯 자욱한 미세먼지도 고향에 돌아온 설렘을 막을 순 없다. 지난 5년간 머물렀던 보르도와는 너무도 대조적이다.다들 집 어딘가로 꼭꼭 숨어 자기들만의 명절을 보내는 건지, 저녁 8시가 넘은 스산한 거리엔 지나가는 사람 하나 없고 성당 앞에 조용히 서 있는 크리스마스트리와 보따리를 들고 집 담벼락을 타고 있는 산타클로스 인형만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