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기훈의 와인 스토리텔링] 마릴린 먼로 스토리

사람들은 내가 아닌 그 누군가를 무척 좋아하는 듯하다.
승인2019.01.22 12:57:00
▲ Marilyn Monroe <사진=commons.wikimedia.org>

고대는 '신화의 시대', 중세는 '영웅의 시대', 근대는 '천재의 시대' 였습니다.
우리가 현대라고 부르는 20세기는 '스타의 시대'였습니다.

"사람들은 나를 사람이 아니라 무슨 거울이라도 되는 것처럼 바라봐요. 그들은 나를 보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음란한 생각을 보는 것이죠. 그들은 나를 음란하다고 몰아붙이면서 자신들은 결백한 척하지만, 그들은 내가 누구이며 어떤 사람인지 알려 하지 않죠. 그 대신 나라는 사람을 마음대로 지어냅니다. 나는 그들과 시비를 가릴 생각은 없어요. 그들은 내가 아닌 그 누군가를 무척 좋아하는 듯하니까. 지금껏 살면서 내가 바란 것이라곤, 사람들한테 친절하게 대하고 그들도 나에게 친절하게 대하는 것이었어요. 그래야 공평한 거래지요, 그리고 나는 여자예요. 한 남자에게 사랑을 받고 싶어요. 내가 그를 사랑하는 것과 똑같이. 나는 정말 그렇게 살기 위해 노력했지만 성공하지 못했어요."
- 마릴린 먼로 -

▲ 샴페인 파이퍼하이직(Piper-Heidsieck) <사진=jen>

마릴린 먼로의 말은 오늘의 대중스타들에게도 그대로 적용되는 말입니다.

전설적인 야구선수 조 디마지오와의 결혼식을 불과 3일 앞두고 주검으로 발견된 그녀의 고독과 대중 속에서의 소외감을 읽어낼 수가 있습니다..

"나는 샤넬 넘버 5를 입고 잠이 들고, 샴페인 (Piper-Heidsieck) 파이퍼 하이직 한잔으로 아침을 시작해요"라고 했다던 그녀,

프랑크시나트라, 존 F.케네디형제, 이브몽탕, 아더밀러 등 수많은 권력자와 염문을 뿌렸던, 세기의 섹스심볼로 기억되는 그녀의 민낯은 어떤 것이었을까요?
권력과 부를 향해 달려들다 타죽은 부나방 같은 존재였을까요?

마릴린 먼로의 전성기는 냉전, 핵폭탄의 공포, 미국 사회가 매카시즘의 광풍으로 수많은 지식인들과 영화인, 예술가들을 궁지에 몰았던 때이자 전통적 도덕이 붕괴되며 여성의 사회 진출이 남성 사회의 저항을 뚫고 솟아나던 시기였습니다.

전쟁이 휩쓸고 지나간 폐허에서 돌아온 젊은이들은 데카당스한 분위기에 젖어 들었고, 대중들은 골치 아프고 위험한 정치보다는 자극적인 대중문화의 말초적 쾌락 속으로 빠져들게 했습니다.

미국 사회는 마릴린 먼로의 이미지가 필요했고 대중들은 그녀에게 열광했습니다.

1926년 마릴린 먼로, 본명 노마진(Norma Jean Mortensen)은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헐리우드의 필름편집자이던 어머니의 사생아로 태어났습니다. 그녀의 어머니는 딸을 낳기 전에 이미 남자로부터 버림받았고, 그녀의 외할머니와 어머니는 정신병원에서 생애를 보냈습니다.

노마진이 일곱 살 때 어머니가 정신병원에 수용되면서 양부모의 손에 맡겨지게 됩니다. 그녀를 맡았던 법적인 후견인 양부모가 합법적으로 그녀를 처분하기 위해 결혼시킬 때까지 마릴린 먼로는 10여 개의 보육원과 2년의 고아원을 전전하는 생활을 해야만 했었습니다.

▲ 영화 어웨이프롬허(Away From Her) 스틸컷 <사진=네이버영화>

영화 '어웨이 프롬 허'로 만들어진 앨리스 먼로의 '곰이 산을 넘어오다'에서 인상적인 구절이 기억납니다.

남편 그랜트와 행복한 결혼생활을 유지하던 피오나는 그녀가 알츠하이머병에 걸리면서 두 사람의 행복한 삶은 균형을 잃고 무너지기 시작합니다.
그녀는 걸레로 마루바닥을 닦으면서 이렇게 중얼거립니다.

"이제는 다 괜찮을 줄 알았는데"

남편 그랜트는 과거 문란한 연애 행각으로 피오나의 삶에 깊은 상처를 남겼습니다.
이제 괜찮은 줄 알았던 것은 마룻바닥이 아니라 그녀의 깊은 상처였던 것 이지요.
안락한 현실을 유지하기 위해 감수해야만 했던 피오나의 깊은 상처는 그녀의 내면 깊숙이 남아있었던 것입니다.

그 생채기가 다시 드러나기 시작했습니다.
소설은 피오나가 과거의 상처를 반복하는 것을 그만두면서 끝이 납니다.

불우했던 유년 시절의 상처는 그 후에도 마릴린 먼로에게 지족적인 영향을 미쳤을 것입니다. 몇번의 이혼과, 염문들, 약물중독은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던 사강을 떠 올리게 합니다.

지중해 키프로스 섬에 피그말리온이라는 미적 감각이 뛰어난 조각가가 살았습니다.
그는 현실의 연인 대신 완벽하게 아름다운 여인상을 조각합니다. 그리고 바다 요정의 이름을 빌려 ‘갈라테이아’라고 불렸습니다.

자신의 이상형인 조각상을 매일 보듬고 어루만지며 진정한 사랑을 쏟아붓습니다.
피그말리온은 아프로디테 신전에서 ‘자신의 조각품 여인과 같은 여인을 달라’ 고 기도합니다. 피그말리온의 진정한 사랑과 기도에 감동을 받은 신이 갈라테이아에게 생명을 불어넣어 줍니다. 둘은 결혼을 하게 되고, 둘 사이에 태어난 딸은 피그말리온 의 고향땅 이름을 따서 파토스라고 지었습니다.

이 신화 이야기는 원래 있던 신화 이야기에서 고대 로마의 오비디우스가 각색을 했습니다.

영국의 극작가이자 비평가 버나드 쇼가 신화를 현대적으로 패러디하여 1913년 피그말리온이라는 희곡을 발표 하였습니다. 1938년에 이미 영화로 만들어 졌지요.

이 희곡을 또 각색한 영화가 또 나왔으니 바로 마이 페어 레이디라는 뮤지컬 영화입니다.

버나드 쇼는 그답게 신화의 아성에 정면으로 도전합니다. 신화 속에서는 피그말리온의 사랑을 받아들이는 해피엔딩으로 끝나지만, 버나드 쇼의 피그말리온은 지독한 패러디로 무장합니다.

차디찬 조각상조차 따뜻한 정성과 사랑을 쏟았던 신화 속 피그말리온과는 달리, 하긴스는 살아있는 여인에게조차 버림받은 조각상처럼 차갑게 대합니다.

▲ 조각상을 사랑한 조각가 피그말리온 <사진=Walters Art Museum>

나의 의지를 벗어나는 모든 타인을 울타리 밖으로 내쳐버리는 끔찍한 결과를 초래하게 됩니다. 신화 속 피그말리온은 승리하고, 하긴스는 실패한 이유입니다.
버나드 쇼는 '창조주의 독선'을 풍자합니다.

한 구절을 같이 읽어 보실까요?

마를린 먼로와 오버랩됩니다.

"알아요,
저는 그분을 비난하는 게 아니에요.
그건 그분의 방식이죠. 그렇죠 ?
하지만 대령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던 게 저한테는
커다란 차이를 만들었어요.
누구든지 배울 수 있는 것 말고 ( 옷을 멋지게 입는다거나
제대로 말을 한다거나 하는 것들이요 )

정말로, 진실로 숙녀와 꽃 파는 소녀와의 차이는
어떻게 행동하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대접을 받느냐에 달렸죠.
저는 하긴스 교수님께는 언제나 꽃 파는 소녀일 거예요.
왜냐하면 그분은 저를 언제나 꽃 파는 소녀로 대하고 앞으로도 그럴 테니까요.

하지만 저는 대령님께는 숙녀가 될 수 있다는 걸 알아요.
대령님은 저를 언제나 숙녀로 대해 주셨고,
앞으로도 그러실 거니까요."

- 조지 버나드 쇼 <피그말리온> 에서 -

현실 속에서 여성에게 사랑을 느끼지 못하는 피그말리온은 여성혐오증에 걸린 괴짜 언어학자 히긴스로, 순순히 자신의 창조자의 명령을 따르던 갈라테아아는 거리에서 꽂을 파는 일라이자로 변신하게 됩니다.

하긴스는 그의 친구 피겨링 대령과 내기를 하죠.
"내가 여섯 달만 교육시키면 저 아가씨를 공작부인으로 바꾸어 놓을 수 있어요"
그러나 히긴스는 그녀가 아무리 우아하고 지적인 모습으로 변해도 여전히 하찮은 존재로 대접할 뿐이였습니다.

"숙녀와 꽃파는 소녀와의 차이는 어떻게 행동하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대접받느냐에 달렸어요"

그러나 대중은 일라이사를,
마를린 먼로를~
꽃 파는 소녀로만 대접하는 속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여성학자 케이트 밀레트는 "마릴린 먼로는 우리의 죄를 대신해 죽었다"라고 말하기도 했지요.

1950년에 그녀는 <아스팔트 정글>이라는 영화에서 처음으로 조역을 맡으며 호평을 얻었고, <이브에 관한 모든 것>으로 주목받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관객들은 마릴린 먼로의 매력에 빠져들기 시작했고, 영리한 제작자들은 그녀의 관능적 백치미의 여배우로 덧칠하여 나중에 그녀의 트레이드마크가 된 관능적인 백치미로 밥벌이에 이용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열정적인 독서가 였습니다.

마릴린 먼로는 마르셀 프루스트나 에머슨 등 당대의 고전을 들고 다니며 수시로 책을 읽었습니다. 어느 기자회견에서 그녀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같은 영화에 출연하고 싶다고 말했는데, 이때 한 짓궂은 기자가 카라마조프의 철자가 어떻게 되는지를 묻자 "내가 말하는 이름의 철자는 하나도 몰라요"라며 희죽거리며 대답했습니다.

그녀는 배역을 완벽하게 소화하는 여배우로 살아갔습니다.
그녀의 연기 코치였던 나타샤 리테스는 "나는 그녀의 영리함의 10분의 1만이라도 가지기를 바란다"고 말하면서, "연기 수업을 위해 그녀의 아파트에 갈 때마다 그녀는 항상 공부하고 있었다"고 회고했었습니다.

먼로의 사후 그녀가 소장하고 있던, 또는 읽었던 430여 권의 도서가 경매에 부쳐 지기도 했습니다.

마릴린 먼로 와인도 만들어 졌습니다.

▲ 마릴린 먼로 와인 <사진=marilynwines.com>

Nova wines라는 나파 카운티 산타헬레나 지역에 위치한 와이너리에서 마릴린 먼로 저작권을 획득해 생산해 내고 있습니다. 1981년 나파 밸리에 있는 세인트 헬레나 지역의 조용한 마을에 사는 몇몇 친구들에 의해 와인생산이 시작되었습니다.

1983년 어느 날 저녁, 자신들의 와인을 마시던 중 마릴린 먼로의 팬이었던 설립자 중 한 명이 할리우드 스타의 이름을 나열하던 중 마릴린 멀롯(Marilyn Merlot)이라는 이름을 쓰자는 제안하게 되면서 먼로 와인이 탄생하게 되었죠.

1985년 마릴린 멀롯이 세상에 처음 모습을 드러낸 이후 현재는 마릴린 멀롯에서부터, 마릴린 까베르네, 노마 진, 벨벳 컬렉션, 마릴린 블론드 드 누아, 마릴린 레드 드레스, 마릴린 소비뇽 블론드, 그리고 마릴린 메리티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라인업의 와인으로 확장되어 갑니다.

한 사람을 이해하고 파악한다는 것은 얼마나 위대하고 아름다운 일 인지요.
한 사람을 이해하고 파악했다는 것은 얼마나 위험한 일 인지요?
책 읽는 여자는 언제나 아름답고 지적이지만,
사람들은,
남자들은~
그녀들의 지성의 크기보다 가슴 사이즈에 더 주목합니다.

"사람들은 나를 사람이 아니라 무슨 거울이라도 되는 것처럼 바라봐요. 그들은 나를 보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음란한 생각을 보는 것이죠. 그들은 나를 음란하다고 몰아붙이면서 자신들은 결백한 척하지만, 그들은 내가 누구이며 어떤 사람인지 알려 하지 않죠. 그 대신 나라는 사람을 마음대로 지어냅니다. 나는 그들과 시비를 가릴 생각은 없어요. 그들은 내가 아닌 그 누군가를 무척 좋아하는 듯하니까. 지금껏 살면서 내가 바란 것이라곤, 사람들한테 친절하게 대하고 그들도 나에게 친절하게 대하는 것이었어요. 그래야 공평한 거래지요, 그리고 나는 여자예요. 한 남자에게 사랑을 받고 싶어요. 내가 그를 사랑하는 것과 똑같이. 나는 정말 그렇게 살기 위해 노력했지만 성공하지 못했어요."

"이제는 다 괜찮을 줄 알았는데"


▲ 권기훈 교수

권기훈은 오스트리아 빈 국립의대를 다녔고, 와인의 매력에 빠져 오스트리아 국가공인 Dip.Sommelier자격을 취득하였다. 이후 영국 WSET, 프랑스 보르도 CAFA등 에서 공부하고 귀국. 마산대학교 교수, 국가인재원객원교수, 국제음료학회이사를 지냈으며, 청와대, 국립외교원, 기업, 방송 등에서 와인강좌를 진행하였다.

소믈리에타임즈 칼럼니스트 권기훈 a9004979@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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