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면을 가볍게 봤다가 뼈저리게 후회한 적이 있다. 한 달간 유럽 출장을 갔을 때였다. 다른 출장자들은 한 달이라는 기간이 확정되자마자 비상식량 구축 계획을 세웠다. 한국음식점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시골인 만큼 단단히 준비해 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필자는 남의 얘기 취급했다. 외국에 나가도 딱히 한식을 찾은 적이 없었다. 기왕 간 거 한 끼라도 새로운 음식을 먹어봐야지 싶었다. 자만이었다. 2주가 지나자 슬슬 음식이 물리기 시작했다. 라면 없는 한 달 출장은 너무 괴로웠다. 그곳의 음식은 매콤함도, 시원한 국물도 없었다. 뜨끈하고 얼큰한 라면, 라면 딱 한 그릇만 먹으면 살 것 같았다.

다른 사람들한테는 라면이 있겠지만, 귀한 라면을 차마 달라고 할 수는 없었다. 벙어리 냉가슴 앓듯 라면 앓이가 시작되었다. 견디다 못해 라면 공수를 위한 주말여행 계획을 세울 즈음, 결국 구제되긴 했다. 한 동료가 구원의 손길(라면)을 내밀었다. 알고 보니 그 동료는 트렁크 하나에 라면을 가득 채워왔었다. 당시에는 그 트렁크가 무슨 번쩍이는 보물상자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컵라면 포장만 봐도 입맛이 다셔졌다.

그렇게 먹은 라면이 말도 못 하게 맛있었다는 건 두 말하면 잔소리다. 그날 감격스러울 정도로 맛있는 라면을 먹은 이후, 일주일 이상의 여행에는 반드시 라면을 챙겼다. 

▲ 외국 여행/ 출장에서 라면은 필수품이다

한국인에게 라면은 정말 중요한 존재다. 해외여행이나 해외 출장 갈 때, MT 갔을 때 둘째 날 아침에, 편의점에서 삼각김밥 먹을 때 라면은 빠지지 않는다. 그만큼 자주 먹는 음식이기도 하다. 한국은 인당 연간 라면 소비량이 76.1개로 세계 1위의 라면 소비량을 자랑한다. 한 사람당 평균 일주일에 1.5개의 라면을 먹는 셈이다. 

얼큰한 국물요리를 간편하게 만들 수 있다는 점이 라면의 매력이다. 얼큰한 국물 요리는 한국인이 좋아하는 음식이다. 하지만 국물 요리는 기본적으로 육수부터 내야 하니 손이 많이 간다. 그러나 라면이라면 말이 달라진다. 끓는 물에 스프와 면만 끓이면 된다. 요리하기 귀찮거나 어려운 상황에 안성맞춤이다. 실제로 라면은 주말 점심에 간단한 한 끼 식사로 먹는 경우가 가장 많다는 설문조사 결과도 있다.(2017 가공식품 세분시장 현황조사 라면류, aT) 

하지만 라면이 처음부터 간편함의 매력을 가졌던 건 아니다. 라면의 조상은 중국의 라미엔(拉麵, 납면)이다. 이름에 들어간 끌 납(拉) 자에서 알 수 있듯 손으로 잡아 늘여 만든 면이다. 밀을 주식으로 하는 중국 서북부 지방의 음식이다. 특정한 한 가지 음식을 지칭한 것은 아니고, 이러한 면을 사용한 음식은 모두 라미엔이라고 했다.

이 라미엔이 라면이 되기까지는 한 단계를 더 거쳐야 하는데 일본의 라멘이다. 19세기 후반, 많은 중국인들이 일본으로 이주하면서 라미엔도 함께 일본으로 전파되었다. 라미엔은 노점에서 간단하게 먹을 수 있는 음식으로 일본 전국으로 퍼져나갔고, 그 과정에서 일본 사람 입맛에 맞게 변화하면서 지금의 라멘이 되었다.

1958년 일본 닛신식품에서는 라멘의 면을 튀겨서 오랫동안 보관할 수 있는 기술을 개발했고 이를 기반으로 인스턴트 라멘을 개발했는데, 이 것이 바로 라면의 직접적인 조상이다. 이후 많은 일본 식품기업에서 인스턴트 라멘을 만들었고, 이중 묘조식품의 기술을 빌려와 우리나라에 론칭한 것이 우리나라 최초의 라면, 삼양라면이다.(1963년)

▲ 우리나라 최초의 라면, 삼양라면

하지만 라면이 처음부터 인기를 끈 것은 아니다. 당시만 해도 쌀밥이 절대적인 주식이던 우리나라에서 꼬불꼬불한 라면은 너무나도 낯선 존재였다. 실이나 플라스틱 등으로 오인받을 정도였다. 자연히 많은 사람들이 거부감을 느꼈다. 입맛에도 맞지 않았다.

일본 라면을 그대로 들여온 최초의 라면은 매운맛이 전혀 없는 닭고기 맛의 국물이었다. 하지만 시기가 좋았다. 라면이 도입된 60년대에는 쌀의 소비를 억제하고 남아도는 밀가루 소비를 촉진하기 위해 정부에서 적극적으로 혼분식 장려정책을 펼쳤다. 라면은 이 정책의 핵심 품목으로 적극적인 지원을 받았고, 이에 힘입어 많은 기업들이 라면산업에 뛰어들었다. 기업들이 적극적인 홍보와 한국인의 입맛에 맞추기 위한 노력을 통해 라면은 금세 대중적인 인기를 끌기 시작했다.

라면을 최초로 출시한 삼양식품의 경우, 라면 출시 이후 60년대 내내 2~3자리의 성장세를 기록했다.(최저 36%~최대 254%, 이데일리) 그 이후 라면이 한국인의 일상에 깊이 자리 잡은 것은 누구나 아는 일이다. 

대중적인 인기에 힘입어 라면은 꾸준히 그 저변을 넓혀왔다. 최근에는 라면이라는 카테고리를 정의하기 어려울 만큼 그 종류가 다양해졌다. 기존에도 대표적인 매운 소고기맛 라면 이외에 짜파게티, 팔도비빔면, 생생우동, 사리곰탕 등 다양한 라면이 있긴 했지만 시장에서 그 존재감이 크지는 않았다.

하지만 최근에는 다른 맛 라면의 종류가 더더욱 다양해지고, 그 존재감도 더 커졌다. 2011년 출시한 꼬꼬면은 매운 닭고기 맛 육수로 큰 인기를 끌며 품귀현상까지 빚었다. 2015년 프리미엄 짜장라면 짜왕이 히트하면서 여러 업체들이 너도나도 유사 상품을 출시했고, 다음 해에는 전년도의 중식 열풍에 이어 프리미엄 짬뽕 라면들이 줄지어 출시되었다.

불닭볶음면을 필두로 한 다양한 비빔면의 출시도 주목할만하다. 매운 비빔면인 불닭볶음면이 큰 인기를 끌면서 핵 불닭볶음면, 까르보나라 맛, 마라 맛 등 다양한 라인업이 출시되었으며, 이후 다른 업체들에서도 리얼 치즈라면, 양념치킨 라면 등 다양한 비빔면들을 출시했다. 한식을 응용한 라면들도 많아져서 쇠고기 미역국 라면, 멸치 칼국수 라면 등이 판매되고 있다. 가장 최근에는 기존 신라면에서 면을 변경한 신라면 건면이 화제가 되었다.

▲ 농심에서 출시된 양념치킨 컵라면

이처럼 한국 시장에서 라면의 위상은 견고하다. 웰빙 열풍에 따라 세계 라면 시장은 지속적으로 축소되고 있고,(세계 인스턴트 라면협회) 한국에서도 인스턴트식품에 대한 선호가 떨어졌지만, 한국 라면시장은 2조 원의 시장 규모를 유지하고 있다.(SBS)

게다가 한국 시장에서 축적한 노하우를 기반으로 해외 시장에서도 큰 인기를 끌고 있다. 한국 라면은 주로 중국, 미국, 일본, 대만, 호주 등에 수출되고 있는데, 신라면의 경우 우리나라 식품 중 최초로 미국 월마트 전 지점에 입점되기도 했다. 새로운 시장 진출도 꾸준히 진행하고 있다.

특히 동남아 시장에 적극 진출하고 있는데, 동남아 인구의 40%에 달하는 무슬림 인구를 위해 할랄 식품 인증을 받을 뿐 아니라(이슬람 율법에 따라 제조된 음식임을 인증하는 제도) 현지 입맛에 맞는 라면들을 출시하고 있다. 이러한 기세에 힘입어 라면 수출은 연평균 20%의 성장세를 이어가고 있다.(2014~2018년 기준, 뉴시스) 

▲ 대만 마트/ 편의점에는 한국 라면 코너가 따로 있는 경우가 많다

라면은 변화가 숙명인 음식 같다. 모든 음식이 어느 정도의 변화를 겪지만 라면은 유난하다. 손으로 잡아 늘린 '면요리' 였던 중국의 라미엔은, 일본으로 넘어가 육수를 중시하는 라멘이 되었고,(직접 뽑은 육수를 자랑하는 라멘집들도 면은 대부분 시판 면을 사서 쓴다.) 일본의 인스턴트 라멘을 그대로 가져온 라면은 불과 몇십 년 만에 일본 라멘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 되었다. 그리고 오늘날에는 라면 자체도 정의 자체가 어려울 만큼 꾸준히 저변을 넓히며 변화하고 있다.

변화가 아주 빠르긴 하지만, 한국의 맛 트렌드를 빠르게 반영한 변화는 당황스럽기보단 흥미롭다. 중국 음식이었다가 일본음식으로 자리 잡은 라면은 이제 우리 음식으로 명명백백히 자리 잡았을 뿐 아니라, 우리 음식 트렌드를 읽을 수 있는 하나의 지표가 되고 있다. 변신의 아이콘 라면, 앞으로의 변화도 기대가 된다. 

소믈리에타임즈 솜대리 somdaeri@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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