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 17구 노이발데그(Neuwaldegg) 가 155번지.

저는 다락방에 살았고,
지하실은 골뱅이 껍질처럼 휘어진 계단의 끝에 있었습니다.
밤마다 지하실로 내려가는 길은 천상에서 지옥으로 내려가는 두려움을 통과해야 했습니다.

습도 80%, 평균온도 17도.

지옥은 와인에겐 천국이었습니다.
지하실 No. 7
한옥 문고리같은 쇠고리를 열어젖히면, 짙은 흙냄새와 함께 비릿한 곰팡이냄새가 묘한 설레임으로 다가옵니다.

한해 전에 비축해둔 한병에 5천원짜리 랑엔로이즈(Langenlois) 마을의 브륀들마이어 블라우프랜키쉬(Bruendlmayer Blaufraenkisch, 오스트리아 레드품종) 1.5L 와인들이 눅눅한 먼지를 덮어쓰고 누워있습니다.

밀렵꾼의 덫에 갇힌 아프리카 아기 코끼리를 구출해 오듯, 재빨리 손에 잡히는 대로 몇 병을 빌라(Billa, 오스트리아 비엔나의 한 마트) 쇼핑가방에 담습니다.

뒤돌아보지 말아야 합니다.
귀신을 볼 수도 있다고 들었으니까요.
내려올 때보다 서너 배는 빠른 걸음으로 꼭대기 다락방으로 향합니다.
걸음마를 막 배운 아이가 엄마 품에 안기듯 와락 다락방으로 뛰어듭니다.

다락방 천정 쪽으로 난 창으로 새벽 초승달이 보입니다.
등짝은 이미 땀으로 눅눅합니다.

완전범죄자가 사체를 처리하듯, 은밀하고 빠르게 깨끗한 면수건으로 지옥으로 부터의 흔적을 말끔하게 제거합니다.

익숙한 솜씨로 코르크를 뽑아내고, 와인보다 더 비싼 리델(Riedel) 잔에 내용물을 쏟아냅니다.

피처럼 비릿한 냄새와,
막 짜낸 염소 피 같은 검붉은 액체가 저를 흥분시킵니다.

천천히 입속으로 가져갑니다.
Blaufraenkisch 특유의 시큼한 버찌향이 비강을 자극시키고,
잔뜩 발기된 미뢰 세포와 부딪치며 빠르게 오감을 마비시킵니다.

지옥의 그 불쾌하고 눅눅한 기억은,
빠르게 행복감으로 치환(置換)됩니다.

천상에서 지옥으로.
다시 천상으로 복귀하는 데 걸린 시간은,
30분 남짓이었습니다.

세금과는 관련 없는 뜬금없는 이야기를 길게 나열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당시 저는 가난했고 외로웠습니다.

선배들과의 술자리는 항상 길어졌고 술은 바닥이 났고, 막내인 저는 어디선가에서 술을 조달해야 했습니다.

유럽에서 밤늦게까지 술을 구입할 수 있는 곳은 주유소밖에 없었습니다. 그곳에 가면 2리터짜리 와인을 5천 원이면 구입할 수가 있었습니다.

가난한 유학생들에게는 오아시스 같은 존재였습니다.
그렇게 맛 들인 와인이 결국 인생의 진로마저 바꾸게 만들었습니다.
자췻집 지하 저장고에는 한 병에 5천 원짜리 와인들이 항상 쌓여있었고 그것들은 어느 유학생의 우울했던 타국살이에 생명수이자 영혼의 성수였습니다.

귀국을 해서 와인으로 일용할 양식을 얻으며 살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와인은 너무 비쌌고, 당시만 해도 와인은 일부 부유층들의 과시용이었습니다.

문제는 세금 때문이였습니다.

술은 최고세율이 72%에 달하는 ‘세금 싸움’입니다.
술에 세금을 매기는 기준을 '가격'인 경우는 종가세, '양이나 알코올도수'가 기준이면 종량세라고 합니다.

가까운 일본 같은 경우는 세금이 종량세인데,
우리나라는 종가세를 택하고 있습니다.

종량세의 경우 용량에 따라 세금을 매기기 때문에 1만 원짜리 칠레 와인이나 100만 원짜리 보르도 명품 와인이나 세금은 같습니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종가세여서 1만 원짜리 와인과 100만 원짜리 와인은 세금이 100배 차이 나게 됩니다.

보통 수입 와인은 수입가격에 운임·보험료를 더한 가격(CIF)이 과세표준 됩니다. 이 CIF와 관세 15%를 합친 가격에 주세 30%가 붙고 주세에 교육세 10%가 더해지고 또 부가가치세 10%가 얹어집니다.

이렇게 붙는 세금이 모두 53% 정도입니다.
여기에 식약청 식품 검사료(품종당 따로 검사료가 40만 원 정도 붙습니다. 이번에 들어온 유리스(Juris)와인은 8종이니 검사비만 300만 원이 넘더군요) 보세창고료, 이송 운임 등 고정비가 더해지는데 평균 22% 정도입니다.

결국 와인 한 병에 결국 원가의 75%에 달하는 세금과 비용이 추가됩니다. 물론 자유무역협정(FTA)을 체결한 유럽연합(EU), 칠레 등에서 수입되는 와인은 관세가 제외됩니다. 그러나 관세를 빼도 63%가량이 세금과 비용입니다.

여기에 수입자 판촉, 마케팅 비용, 인건비, 임대료, 마진이 더해집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종가세를 적용하는 나라는 한국을 포함해 멕시코·터키·칠레·이스라엘 딱 다섯 나라 뿐입니다.

나머지 OECD 회원국은 모두 종량세를 채택하고 있습니다.

보통 유럽에서는 동네슈퍼마켓에서 장 보면서 와인 한 박스 정도 카트에 싣고 와서 집에 쟁여놓습니다.

우리나라에서 3만 원 하는 이태리 산타 크리스티나(Santa Cristina)는 현지에서는 5~6천 원 정도입니다. 가격이 이러니 집에서 식사할 때 한 병씩 따서 와인잔이든, 물잔이든 그냥 부담 없이 음식과 곁들여 마십니다.

문화재는 이동을 할 수 없습니다.
와인은 문화입니다.
그러나 와인은 이동할 수 있는 문화입니다.
문화는 만든 사람들의 것이 아니라 사용하는 사람들의 것입니다.
문화는 누구나 쉽게 접근하고 공유할 수 있어야 합니다.

호사가들의 와인은 취미생활이겠지만,
보통 사람들의 와인은 기호식품입니다.

와인 세금은 종량세가 답입니다.
 

▲ 권 기 훈 교수

권기훈은 오스트리아 빈 국립의대를 다녔고, 와인의 매력에 빠져 오스트리아 국가공인 Dip.Sommelier자격을 취득하였다. 이후 영국 WSET, 프랑스 보르도 CAFA등 에서 공부하고 귀국. 마산대학교 교수, 국가인재원객원교수, 국제음료학회이사를 지냈으며, 청와대, 국립외교원, 기업, 방송 등에서 와인강좌를 진행하였다.

소믈리에타임즈 칼럼니스트 권기훈 a9004979@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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