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존 싱어 사전트의 '한밤의 저녁식사' <사진=Wikimedia Commons>

어느 날 저녁, 한 여인이 테이블의 위쪽에 앉아있습니다. 그녀는 짙은 머리카락, 하얀 피부, 깊게 파인 검정색 드레스 위로 드러난 우아한 목선, 양초램프의 핑크빛 실루엣이 식탁 위와 벽지를 따뜻하게 감싸고 있습니다.

존 싱어 사젠트(John Singer Sargent)의 작품입니다. 부제는 Le Verre de Port(the glass of port). 서전트의 후원자인 알베트 피커즈 부부의 집을 방문했을 때 그려진 작품입니다.

사전트는 1856년 이탈리아에 머물던 미국인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1874년부터 프랑스 에콜 데 보자르 미술학교에서 프랑스 고전적 전통양식에 관한 영향을 받았습니다. 주로 단체 초상화가로서의 경력을 쌓았으며, 나중에는 런던에 정착해서 작품활동을 했습니다. 그의 초상화 기법은 벨기에 출신의 앤서니 반 다이크(1599~1641)에서 시작된 `장중한 화법 스타일`이였습니다. 주로 귀족들이나 상류층들의 모습을 담아냈지요.

초상화는 사람을 기록하고 표현하는 미술의 한 형태지만, 종종 그 이상의 의미를 담고 있었습니다. 작가들은 시각적 은유를 그림 속에 끼워 넣기를 즐겼습니다. 

개는 충성의 상징으로, 책은 지식을 의미했고, 장미는 순수함을 의미했습니다. 사전트는 피커스부부의 초상화에서 한잔의 레드와인을 선택했습니다.

▲ 그림 속 보이는 세세한 포인트 <사진=Wikimedia Commons>

피커스부인은 클라레잔을 들고서 맞은편에 앉아있는 제3의 인물을 쳐다보고 있고, 피커스는 화면에서 비껴 옆모습의 반쪽 윤곽만 살짝 보입니다. 담배를 피우고 있는 것을 보니, 디너가 끝난 후의 식탁 풍경인 것 같습니다.

이 작품은 부제는 Le Verre de Port(포트잔) 입니다. 그런데 제가 피커스부인이 클라레잔을 들고있다고 했지요? 이 부분에서 약간의 설명이 필요하며, 미술사학자들 사이에도 논쟁이 있어왔습니다.

클라레(Claret)는 영국에서 보르도와인을 부르던 말이였습니다. 1152년 아키텐공국(가스코뉴, 보르도, 포투아가 포함된 지역)의 상속녀였던 엘레오노르(Eleonore)는 프랑스왕 루이 7세와 이혼하고 노르망디 공작이자 앙주의 백작인 앙리와 재혼을 합니다. 2년뒤, 앙리가 영국왕 Henry 2세로 등극하면서 프랑스와인이 영국으로 건너가는 계기가 됩니다.

▲ 테스코에서 판매되고 있는 클라레 보르도 와인 <사진=Tesco>

1860년 앵글로 프랑스조약 이후 보르도의 독보적인 고객이였던 영국인들이 가장 선호하던 와인이였습니다. 바이런은 (Lord Byron)은 토마스 무어(Thomas Moor)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We clareted and champaned till two" 라는 문장처럼 클라레를 동사로 바꾸어 쓸 정도였죠.

포트와인은 클라레에 비해서는 분명 격이 떨어지는 와인이였습니다. 그러나 당시 프랑스와 영국의 통상 금지령때문에 피커스부인은 와인 저장고에서 클라레 와인병을 꺼내오는것이 부담스러웠을 수도 있었고,노골적으로 초상화에 등장하는 것을 꺼려했을 수도 있습니다.

상류층에서는 클라레를 마시는것이 유행이였습니다. 분명히 피커스부인이 들고있는 것은 클라레이지만 사전트가 제목을 '포트와인잔'으로 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Tell me what you eat and I shall tell you what you are(당신이 먹는것을 내게 말해보라, 그러면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말해 주겠다)"

미식문화의 창시자인 장 앙테름 브리야사브랑(Jean Anthelane Brillat Savarin)의 책 '맛의 생리학'의 첫페이지에 있는 글입니다. 이 그림에서도 수많은 은유가 숨겨져 있어 우리에게 그들이 말하는것을 들려줍니다.

빅토리아시대의 엄격한 분위기에서 와인잔이 초상화에 등장하는것은 상당히 파격적입니다. 그러나 그림에서는 디켄터, 크리스탈로 만들어졌을 와인잔, 표면이 반사되는 은소재의 와인쿨러, 클라레 색상으로 물든 식탁분위기는 피커스부부의 사회적 지위와 취향을 보여줍니다.

식탁과 방안을 지배하고 있는 붉은 와인색과 화려한 와인소품들과는 대조적으로 피커스부인의 시선과 각도, 화면밖으로 비껴난 피커스의 담배피는 모습은 뭔가 복잡한 상황을 추측하게 만듭니다. 맞은편에 앉아있을 다른 남자의 존재도 의식하는듯 합니다. 사전트는 보여지는것 밖에 존재하는, 드러내지 않은 의미를 읽어내게 하는데 탁월한것 같습니다.

중요한 주제에 대해서 침묵할때, 그 침묵은 분명하게 말하는것 보다 많은것을 의미하고 있을수 있습니다.

▲ 영국의 시인 Earnest Dowson <사진=Wikimedia Commons>

'VITAE SUMMA BREVIS SPEM NOS VETAT INCOHARE LONGAM'

인생은 짧고 알수 없도다.
오래가지 않도다. 울음도 웃음도,그리고 사랑도 욕정도, 증오도,
우리가 그 문을 지나고 나면,
모두 사라지고 말것 이거늘,
오래가지 않도다.
와인과 장미의 나날도, 아련한 꿈 속에서,
잠시 우리의 길이 보이보는, 이내 닫히고 말지.

Ernest Dowson 詩. 장미의 나날들.
 

권기훈은 오스트리아 빈 국립의대를 다녔고, 와인의 매력에 빠져 오스트리아 국가공인 Dip.Sommelier자격을 취득하였다. 이후 영국 WSET, 프랑스 보르도 CAFA등 에서 공부하고 귀국. 마산대학교 교수, 국가인재원객원교수, 국제음료학회이사를 지냈으며, 청와대, 국립외교원, 기업, 방송 등에서 와인강좌를 진행하였다.

소믈리에타임즈 칼럼니스트 권기훈 a9004979@naver.com

저작권자 © 소믈리에타임즈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관련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