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몇 세기가 우리를 떨어져 있게 해도 나는 당신을 느낄 수 있다. <사진=MaxPixel>

한 번도 본 적 없는 얼굴로
한 번도 들은 적 없는 이름으로
당신이 온다 해도
나는 당신을 안다.
몇 세기가 우리를 떨어져 있게 해도
나는 당신을 느낄 수 있다.
지상의 모래와 별의 먼지 사이 어딘가에
매번의 충돌과 생성을 통해
당신과 나의 파동이 울려퍼지고 있기에.

세상과 작별할 때 우리는
소유했던 것들과 기억들을 두고 간다.
사랑만이 우리가 가져갈 수 있는 유일한 것.
그것이 한 생에서 다음 생으로
우리가 가지고 가는 모든 것.

- 랭 리아브 <별의 먼지>

사랑에 빠진 남녀는 서로의 눈을 통해 영원을 봅니다.
사랑을 떠나보낸 사람은 별을 통해 영원을 봅니다.
세상을 작별할 때 우리는 소유했던 기억만을 가지고 갑니다.
소유했던 추억만을 남기고 갑니다.
오늘 특별히 추억하고 싶은 분이 계십니다.
저의 유년 시절을 아름다운 추억으로 만들어 주신 분입니다.

최필숙 선생님.

가수 김상희 씨의 다큐멘터리를 보다가 선생님을 떠올렸고, 두 분은 너무나 닮아있었고. 두 분은 1943년생 동갑이셨습니다. 그리고 선생님의 기일이 지난주였습니다. 전에 써둔 글로 선생님을 추억합니다.

선생님의 마지막 와인, Ch. Figeac

"한겨울에 밀짚모자 꼬마 눈사람
눈썹이 우습구나 코도 비뚤고
거울을, 보여줄까 꼬마눈사람"

이 노래는 국민학교 3학년 때
최필숙 선생님께 배운 노래입니다.
풍금치며 노래하는 것을 좋아하셨고,
키가 훌쩍 크셨고, 가수 김상희씨를 닮았고,
저를 아주 이뻐해 주셨던 선생님은
작년에 돌아가셨습니다.

3살 터울인 여동생과 어른이 되어서도 자주 불렀던 노래입니다. 제 여동생의 3학년 때 담임도 선생님이 맡으셨기 때문입니다. 이 노래를 특별하게 기억하는 이유는 약간 멋을 내서 부르는 선생님 특유의 발음 때문입니다.

살아가면서 되풀이되며 꾸는 꿈이 있습니다. 구태여 프로이트나 융의 이론을 빌리지 않더라도 분명 무의식속에 남아있는 기억이 현재의 삶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증거일 것입니다.

꿈이나 기억을 타고 유년 시절까지 거슬러 올라가서 그 때부터 겪은 일, 만난 사람들을 하나하나 다시 호출하여 그 의미를 재음미하거나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가서 그 사건과 그 사람을 재구성함으로써 다시 한번 체험하는 방식은 현재의 자기를 이루고 있는 삶의 원형을 찾는데 굉장히 유효한 방식입니다.

누구나 그렇겠지만, 제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시절을 꼽으라면 유년 시절의 기억입니다.

부모님은 젊었고, 자식들을 끔찍이 사랑하셨습니다. 학교 선생님이셨던 아버지 때문에 우리가족은 내내 학교 관사에 살았습니다. 아이들이 청소끝나고 하교하고 나면 나는 혼자였습니다. 심심해하는 나에게 선생님은 학교 도서실 열쇠를 쥐어 주셨습니다. 잠긴 도서실 문을 열고 들어갈 때의 비릿한 책 냄새를 잊을 수가 없습니다. 어둑어둑 해질때까지 읽었던 책들은 지금까지 내 기억 속에 생생히 남아있습니다.

어떤 시인은 자기를 만든 것의 80%는 바람이라 했는데, 저의 먼지 같은 인문학적인 감성의 대부분은 그때 읽었던 도서실의 책과 선생님 덕분이었습니다.

저에게 여체의 신비롭고 황홀한 충격을 안겨준 분도 선생님이셨습니다. 어머니 심부름으로 선생님 집 방문을 벌컥 열었는데, 그만 옷을 갈아입고 계시는 장면을 보고 말았습니다. 같은 관사에 살았던 선생님과의 추억은 선생님께서 다른 학교로 전근을 가시고는 끝이 났습니다.

그 후 나는 유학을 떠났고, 20여 년을 유럽에서 지냈습니다. 귀국해서도 고향 친구들을 만날 기회는 많지가 않았고, 연락이 와도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참석하지를 않았습니다. 친구들을 통해 최필숙 선생님은 부산에서 교장 선생님으로 정년퇴임하셨으며, 제 소식을 자주 물으시며 보고 싶어 하신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습니다.

어느 날, 선생님이 전화를 주셨고, 네가 보고싶으니 한번 놀러오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또 차일피일 미루다가, 부산 해운대에 특강이 있어서 가는 길에 연락을 드렸습니다. 선생님은 병원에 계셨고, 45년 만에 뵌 선생님은 제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시며 반가워하셨습니다.

저녁에 식사 약속이 있어서 다시 나오는데, 선생님께서 와인 한 병을 곱게 포장해서 주시는 것이였습니다. 그건 Ch. Figeac이였고, 선생님께서는 저의 졸고(拙稿)를 다 찾아 읽으시고는 제가 좋아하는 와인을 준비해 두셨습니다.

한 달 후, 동창회 총무를 통해 선생님의 부음을 들었고, 말기 암을 너무 늦게 발견하셨다는 이야기도 같이 전해왔습니다.

"한겨울에 밀짚모자 꼬마 눈사람
눈썹이 우습구나 코도 비뚤고
거울을, 보여줄까 꼬마눈사람"

그리운 선생님,
제가 이 와인을 어떻게 마실 수 가 있을까요?

▲ 그리운 선생님, 제가 이 와인을 어떻게 마실 수 가 있을까요? <사진=Chateau Figeac>

권기훈은 오스트리아 빈 국립의대를 다녔고, 와인의 매력에 빠져 오스트리아 국가공인 Dip.Sommelier자격을 취득하였다. 이후 영국 WSET, 프랑스 보르도 CAFA등 에서 공부하고 귀국. 마산대학교 교수, 국가인재원객원교수, 국제음료학회이사를 지냈으며, 청와대, 국립외교원, 기업, 방송 등에서 와인강좌를 진행하였다.

소믈리에타임즈 칼럼니스트 권기훈 a9004979@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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