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로비에 전시된 샤토 마고의 그림 한점

샤토 마고(Chateau Margaux)는 프랑스의 샤토 중에서도 가장 상징적인 건물로 손꼽힌다. 19세기 초 건축가 루이 꽁브 Louis Combes에 의해 지어진 마고는 메독에서 가장 오래된 샤토 중 하나이며, 16세기 베네치아 건축가 안드레아 팔라디오 Andrea Palladio의 디자인에서 파생된 유럽 스타일의 네오 팔라디언 Neo Palladian 양식의 희귀한 표본으로, 메독의 베르사유 Versailles of the Médoc 라 불리기도 한다. 역사를 보면 9세기 이후부터 다양한 작물 재배의 흔적을 찾아 볼 수 있고, 포도재배는 16세기 이후부터 시작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샤토 마고는 1855년 나폴레옹 3세에 의해 보르도 특 1등급으로 선정된 4개 와이너리 중 하나였다. 천하의 샤토 무똥 로칠드도 1973년에야 비로소 특 1등급으로 승격되어 지금은 5개로 늘어났다. 샤토 마고의 역사는 14세기경으로 거슬러 올라갈 정도로 유서 깊다. 16세기에는 Lestonnac 가문이, 17세기에는 Chateau Haut-Brion의 퐁탁 Pontac가문과의 결혼으로 인해 자매 와이너리가 되기도 했다. 1771년 샤토 마고는 색이 맑은 끌라레 Claret 를 생산하기 시작하여 Christie 경매에 처음으로 판매되기도 했다.

▲ 샤토 마고의 뒷 마당에 늘어선 대리석 기둥

프랑스 대혁명 시기에는 주인 Elie가 기요틴으로 참수 당한 후 귀족의 손에서 비로소 일반인에게 소유권이 넘어가게 된다. 1950년대에 Ginestet 가문이 새 주인이 되었으나 1973년에 불어닥친 보르도의 경제위기를 버티지 못하고 매물로 내놓게 되는데, 이때 미국 국적의 National Distillers & Chemical Corporation이란 회사가 인수자로 나서게 되었다. 그러나 당시 프랑스 대통령이었던 발레리 지스카르 데스텡은 샤토 마고가 프랑스의 ‘국보’ (National Treasure)이기 때문에 외국에 팔 수 없다고 정부를 움직여 거부권을 행사하였다.

▲ 샤토 마고 건물의 뒷 마당

우여곡절 끝에 곡물 무역과 금융업으로 갑부가 된 그리스 출신 기업인이자 프랑스로 귀화한 안드레 멘첼로풀로스 Andre Mentzelnopoulos 에게 1977년 마고의 경영권을 넘기게 된다. 그는 투자 회수가 암담한 상황에서도 포도원에 큰 자금을 투자하고 포도나무를 다시 심는 등 과거의 영광을 되찾기 위해 열정적으로 일하다가 1980년 갑자기 사망하게 되는데, 이후 그의 딸 꼬린느 Mentzenopoulos Corinne가 바통을 이어 받아 지금에 이르고 있다. 오늘날 마고의 뛰어난 와인 품질에는 보르도 대학 양조학과 교수이며 프랑스 현대 양조학의 대부로 알려진 에밀 페노 Émile Peynaud 교수의 양조자문의 결과이기도 하다.   

▲ 마고의 로비에서 안내 책임자를 기다리는 동료들

보르도를 방문하는 수많은 와인애호가들에게 샤토 마고는 언제나 위시 리스트의 톱에 오른다.   주말, 8월달, 그리고 수확기간을 피하면 구내를 잠시 걸어 볼 수는 있지만, 웅장하게 개조된 지하 의 레드 와인 셀러, 현대식 화이트와인 셀러, 그리고 와이너리가 자체적으로 운영하고 있는 오크통 제작소(Cooperage), 멋진 테이스팅 룸(Tasting Pavilion)은 오직 사전예약에 의해서만 가능하며 최소 3개월 전에 해야 한다는 어려움이 있다.  

▲ 자체적으로 오크통을 직접 제작하고 수리하는 쿠퍼리지 Cooperage

마고의 총 면적은 262핵타(79만평)으로, 이중 87핵타(26만평)이 Margaux AOC 로, 이중 80핵타에 적포도 품종이 식재되어 있다. 75%가 까베르네 쇼비뇽, 20% 메를로, 나머지에 까베르네 프랑과 쁘띠 베르도의 식재 분포를 보인다. 12핵타(3.6만평)에서 마고 파빌리옹 블랑 Pavillon Blanc 화이트 와인을 만드는데 쓰이는 쇼비뇽 블랑 Sauvignon Blanc이 식재되어 있는데, 화이트는 Margaux AOC 명칭이 아닌 Bordeaux AOC 일반 명칭을 써야 한다. 메독에서는 레드 와인이 아니면 서자 취급을 받기 때문에 Margaux AOC 를 붙일 수 없다.

▲ 지하의 와인 양조설비

그랑뱅 샤토 마고는 연간 총 15만병 정도 생산되며, 세컨 와인인 파빌리옹 루주 Pavillon Rouge du Château Margaux 는 20만병, 드라이 화이트 와인 Pavillon Blanc du Château Margaux은 3.5만병 정도 만든다. 

마고 포도밭의 토양은 지롱드 강변에 있어서 자갈이 많고, 흙은 푸석푸석 마른 편이라, 나무들은 수분을 찾아 땅속 7~8미터 아래로 뿌리를 내리기에 와인은 상당히 부드럽고 여성적이며, 좋은 해에는 향의 복합미가 풍부해지고 우아하며 정교해진다. ‘벨벳 손장갑으로 둘러싼 쇠주먹’으로 묘사될 만큼 파워풀 하면서도 섬세한 뉘앙스는 가히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 시음했던 샤토 마고 2004, 파빌리온 루주 2004 빈티지

샤토의 지하 테이스팅 룸에서 마셨던 2004년 샤토 마고는 아직은 완전히 열리지 않은 느낌이었으나, 기분좋은 레드커런트, 산딸기, 연필의 흑심, 삼나무향이 특징적이었고 부싯돌 같은 미네랄 피니쉬를 남겼다. 약간 도드라진 산도는 발랄함과 긴장도를 이어가면서 전반적으로 구조감과 벨런스가 잘 갖추어진 와인이라는 느낌을 주었다. 최소 20년은 지나야 제대로 된 포텐셜을 발휘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되었다.      

보르도를 상징하는 가장 아름다운 와이너리 건물과 빼어난 향과 맛으로 옛날부터 유명인들이 가장 사랑하는 와인으로 손꼽히고 있다. 토마스 제퍼슨이 프랑스에서 미국대사로 머물 때에도 가장 즐겼던 와인이었고, 당시 프랑스에 파견되었던 미국 대사 토머스 제퍼슨은 1784년 빈티지를 시음한 후 “보르도 와인중 이보다 더 좋은 것은 없다”는 말을 남겼다.

▲ 시음했던 샤토 마고 2004 빈티지

1848년 칼 마르크스와 함께 공산당 선언을 발표했던 프리드리히 엥겔스는 마르크스의 딸이 “행복이란 무엇인가”라고 질문하자 “샤토 마고 1848년 같은 거야” 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부유한 형편으로 마르크스 가족에게 생계비를 대주며 와인도 사주었던 엥겔스는 샤토 마고의 진정한 맛을 알았고 특히 자신과 마르크스가 발표했던 공산당 선언의 해 였던 1848년 빈티지를 좋아했다.

그는 ‘공산당 선언’에서, 역사는 계급 투쟁의 과정이며 프롤레타리아가 혁명 계급이라 설명하면서 “전세계의 노동자여 단결하라.”라는 유명한 말을 남기기도 했다. 금수저로 태어나 넉넉한 생활을 즐기며 고급 와인을 수시로 마셨던 그가 과연 노동자들의 고뇌와 궁핍을 이해할 수 있었을까?   

▲ 지하의 테이스팅 파빌리온에서 시음하는 동료들

‘무기여 잘있거라’로 유명한 헤밍웨이도 샤토 마고를 매우 좋아했다. 그는 평생 마초 처럼 살기를 원했으나 점차 늙어가는 자신에 실망했고 옛날만큼 글도 써지지 않자 환갑을 갓 넘긴 ‘61년 엽총으로 자살하여 아까운 생을 마감했다. 최근에 알려진 사실이지만 헤밍웨이는 1940년대 KGB의 간첩으로 일했다고 전해진다. FBI가 이를 알아채고 계속해서 그를 미행하거나 모든 통화를 도청하기 시작하자 헤밍웨이는 감시와 도청 때문에 거의 정신분열증에 이르러 자살했을 것이라는 설이 유력하다.

그의 손녀 마고 헤밍웨이는 할아버지와 같은 키의 183 센티 장신 미녀로 미국의 패션모델과 배우로 활약했고, Times, Vogue, Cosmopolitan 잡지 커버로도 자주 나왔다. 그녀는 장성한 뒤에 부모로부터 출생의 비밀을 듣게 되는데, 부모가 샤토 마고를 마신 날 밤에 자신을 임신했고 그래서 이름을 ‘마고’라 지었다는 것이다. 출생의 비밀을 듣고 감동한 그녀는 미국식 이름으로 편하게 지은 ‘Margot’ 라는 이름을 불어식 ‘Margaux’로 개명하여 이름의 본 의미를 되살렸다. 3대에 이은 마고 사랑이라 할 수 있다. 안타깝게도 그녀는 42세에 마약 과다복용으로 사망하게 된다.  할아버지에 이어 손녀마저도 정신적으로는 다소 불안정했나 보다.

▲ 지하 숙성 셀러에서 익어가는 와인

샤토 마고 1787년산 한병은 1989년 무려 225천불(2억5천만원)이라는 최고가 기록을 남겼다. 당시 뉴욕의 와인 거상 William Sokolin이 토마스 제퍼슨의 collection중 하나로 갖고 있던 200년된 와인이었는데 뉴욕 포시즌스 호텔에서의 Margaux Dinner에 쓰기 위해 가지고 나왔으나 술 따르던 웨이터가 실수로 바닥에 떨어뜨리는 바람에 맛도 못본 채 박살이 난 것이다. 원래 가치가 50만불(5억5천만원) 짜리였기에 난리가 났었지만 깨진걸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다행스럽게도 고액의 보험에 가입했던 덕에 보험금 225천불(2.5억)이 지급되었다. 맛도 못 본 와인이지만 병당 최고가 와인 중 하나로 기록된 것이다.

하지만, 200년된 와인의 상태가 과연 온전했을까? 병이 깨져서 바닥에 흐르는 와인을 웨이터 중 한 사람이 아깝고 안타까운 마음에 손가락으로 살짝 찍어 맛보았는데, 완전한 식초 맛이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차라리 깨진 것이 천만다행한 일이 아니었을까? 첫사랑의 연인은 나이 들어서 만나면 안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눈부시게 아름다웠던 그 시절의 모습은 오직 상상 속에서만 빛나야 한다.  
 

김욱성은 경희대 국제경영학 박사출신으로, 삼성물산과 삼성인력개발원, 호텔신라에서 일하다가 와인의 세계에 빠져들어 프랑스 국제와인기구(OIV)와 Montpellier SupAgro에서 와인경영 석사학위를 받았다. 세계 25개국 400개 와이너리를 방문하였으며, 현재 '김박사의 와인랩' 인기 유튜버로 활동중이다.

소믈리에타임즈 칼럼니스트 김욱성 kimw2@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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