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정하의 와인스케치북] 메를로를 좋아해도 될까요?

승인2020.01.20 11:17:51

열렬한 와인 애호가인 마일즈는 이혼남이다. 작가를 꿈꾸지만, 현실은 고등학교에서 영문학을 가르치는 신세다. 그런 그가 대학 때부터 절친인 잭의 결혼을 앞두고 함께 캘리포니아의 산타이네즈(Santa Ynez) 밸리로 와인 여행을 떠난다. 새파란 하늘과 그림같이 펼쳐진 포도밭, 풍요로운 시음에도 그는 여행 내내 늘 날이 서 있다. 잭으로부터 마일즈의 전 부인인 빅토리아의 재혼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다. 마일즈와 가까운 만큼이나 취향도 다른 잭은 와인보다 여자에 관심이 많다. 여행 도중 만나서 반한 스테파니와의 저녁식사에 함께 가자고 계속 부추기는 잭을 향해, 마일즈는 신경질적으로 외친다.

‘’누구든지 메를로를 시키기만 해봐, 난 갈 거야. 빌어먹을 메를로 따위는 안 마셔!’’

와인 애호가들 사이에서 이제는 고전이 된 영화 사이드 웨이(Sideways, 2004년)의 한 장면이다. 와인이 보여지는 것처럼 진하고 달콤한 포도주스 맛인지 어떤지도 모르던 시절, 처음으로 ‘메를로(Merlot)‘란 단어를 알게 해 준 영화였다. 보아하니 포도 품종을 말하는 듯한데, 메를로가 왜? 궁금증도 잠깐이고 나는 이내 대충 수긍하고 말았다. 와인에 일가견이 있는 주인공이 한 말이니 무슨 이유가 있겠지. 이후 한동안 ‘나는 메를로를 좋아합니다‘라고 말하지 못했다.

다양한 포도 품종에 대해 공부하기 시작한 이후로 나는 다른 사람들의 와인 취향을 묻는 일에 재미를 들이게 됐다. 좋아하는 영화 장르를 통해 그 사람의 성격과 성향을 알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와인 특히 포도 품종을 통해 상대방의 입맛과 취향을 알게 되는 것이, 와인 자체보다는 와인을 마시는 사람에 관심이 많은 내가 와인을 공부하며 찾아낸 소소한 재미였다.

한번은 보르도의 한 샤또를 견학하고 직원들과 함께 점심 식사를 할 기회가 있었다. 수줍음이 많은 내가 무슨 용기가 났는지 바로 옆에 앉은 홍보담당자에게 이번에도 어떤 포도 품종을 좋아하는지 물었다. 꺄베르네 소비뇽과 메를로의 환상적인 블렌딩을 설파하던 그는 내 질문에 고개를 숙이고 나지막이 대답했다.

‘’저는 사실 말벡(Malbec)을 좋아해요.’’

과연. 소신 있는 멋진 대답이다. 특유의 짙은 보랏빛을 띠는 ‘말벡’하면 강건한 힘 같은 것이 느껴진다. 이름부터 말벡이지 않은가! 이번에는 다니는 와인 학교의 교장 선생님께 같은 질문을 했다. 고등학교 때부터 양조학을 전공하고 이제 은퇴를 앞두신 분의 취향은 얼마나 심오하고 고급스러울까.

‘’독특하고 복합적인 향과 풍미로 봤을 때 역시 드라이한 세레스(Xérès, 영어명 셰리, Sherry)와인이지’’.

품종에 대한 답은 듣지 못했지만 이번엔 더 난이도가 높다. 스페인 안달루시아 지방의 헤레즈(Jerez)에서 유래한 이 와인은 숙성 방식에 따라 다양한 스타일이 있는데, 드라이한 경우 팔로미노(Palomino)라는 품종으로 만들어 주로 아몬드 등의 견과류 맛이 난다.

언제쯤 나도 나만의 개성을 보여주는 쿨하고 멋진 품종의 와인을 말할 수 있을까. 내 혀의 이끌림보다 누군가의 질문에 어떻게 하면 더 그럴듯한 대답을 할 수 있을까에 대한 고민이 커져가던 중, 역시 와인 애호가이자, 무슬림이며, 자칭 고향에서는 이른바 내놓은 자식인 터키인 친구 오뒬의 한마디가 내 뒤통수를 치고 가슴으로 시원하게 파고 들었다.

‘’뭐니 뭐니 해도 달콤한(?) 메를로가 제일이지! 복잡하게 뭘 찾겠다는 거야?!’’

사실 나도 메를로와 다른 품종의 블렌딩이 주는 균형 잡힌 부드러움에 푹 빠져 있었다. 메를로는 꺄베르네 소비뇽의 떫은맛을 부드럽게 해서 그 맛의 가치를 높이는 역할을 하고, 꺄베르네 프랑과 만날 경우 좀 더 가볍고 섬세한 와인을 탄생시킨다. 메를로의 고장인 보르도에서, 늘 마시는게 그거인데 계속 뭔가 어려운 것을 찾는 내가 그 친구에게는 조금 웃기게 보였나 보다.

▲ 메를로를 좋아하던 그녀는, 메를로란 단어의 유래가 되었다고 전해지는 티티새(Merle)를 닮았다.

메를로는 영화 속 마일즈가 칭송해 마지않는 피노누아(Pinot noir)와 달리 예민하지 않다. 포도알이 상대적으로 빨리 익고 오이듐균과 같은 각종 질병에 대한 저항력이 강하여 일관된 생산량을 유지할 수 있는 등 한마디로 재배하기 쉬운 편이다. 산화될 염려가 적어 통 숙성에도 적합해서 양조도 까다롭지 않다. 자두, 체리, 블랙베리 등의 풍부한 과일향과 지나치게 타닉하지 않은 점은 특유의 부드러운 감촉을 주어 마시기 편한 상태로 만들어 준다.

마일즈의 대사와 영화의 영향력은 생각보다 커서 실제로 캘리포니아의 메를로 재배자들이 큰 타격을 받았다고 한다. 그리고 와인과 포도주스도 구별 못 하는 나 같은 사람에게도 한동안 크나큰 편견을 심어줄 줄, 영화 관계자들은 상상이나 했을까.

영화에 담긴 소재란 것이 아무 이유 없이 그냥 정해지진 않았을 것이다. 그 당시 캘리포니아에서는 메를로를 단독으로 한 와인을 만들 때 과도한 추출, 심지어 지나치게 익은 포도를 사용하여, 산미가 떨어지고 메를로 고유의 맛과 향이 결여된 투박한 와인이 나왔기 때문이다. 이런 경향과 맞물려 극적 효과를 위해 내성적이고 예민한 마일즈가 좋아하는 와인으로 섬세한 피노누아를 내세우고 메를로는 격하시키는 것이 어쩌면 당연한 선택이었을 것이다.

아무튼 나는 쿨하고 ‘있어 보이는‘ 품종을 찾아 헤매다가 이제는 ‘메를로를 좋아합니다‘라고 말 할 수 있게 되었다. 여러 품종의 와인을 상황에 따라 그것 나름대로 좋아하지만 역시 메를로가 좋다. 착하고 관대한 사람을 ‘너는 너무 쉬워서 싫어’라고 말할 수는 없지 않은가.

참고로 영화 속 마일즈가 특별한 날을 위해 고이 모셔 두던 1961년산 슈발블랑(Cheval Blanc)은 메를로가 약 40% 블렌딩된 와인이다.

▲ 송 정 하

법대를 나왔지만 와인이 들려주는 이야기가 좋아 프랑스 보르도로 떠났다. 보르도 CAFA에서 CES(Conseiller en sommellerie:소믈리에컨설턴트 국가공인자격증), 파리 Le COAM에서 WSET Level 3를 취득했다. 사람이 주인공인 따뜻한 와인이야기를 쓰고 싶다.

소믈리에타임즈 칼럼니스트 송정하 noellesong0520@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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