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정하의 와인스케치북] 겨울, 눈, 애거서 크리스티 그리고 뱅쇼 (Vin Chaud)

승인2020.01.28 15:44:07

5년 동안 눈을 보지 못했다.

덥지도 춥지도 않은 온난한 기후에서 사는 걸 축복으로 여기는 사람이 많지만, 나에게 눈이 오지 않는 겨울은 겨울이 아니다. 그래서 1년 내내 혹서부터 혹한까지 다양한 날씨가 널을 뛰는 한국의 스펙타클한 기후가 무척이나 그리웠다.

올겨울은 유난히 따뜻하다더니 그래서일까. 아직까지 서울에는 이렇다 할 눈 소식이 없다. 나에게는 완벽한 만족과 안락함을 보장하는 하나의 장면이 있다. 이를테면 이런 거다. 창밖은 눈이 그야말로 펑펑 내리고 있다. 나는 노란 불빛에 의지해 안락의자에 앉아 추리소설을 읽고 있다.

고요함 속에 들리는 소리라곤 발 옆에 있는 난로 속 타닥타닥 타들어가는 장작불 소리 그리고 페이지 넘기는 소리뿐이다. 나는 한 챕터를 읽고 따뜻한 음료를 한 모금 마시고 고개를 들어 창밖의 눈을 한번 바라본 후 다시 소설 속 사건에 집중한다. 여기서 내가 볼 책으로는 역시 애거서 크리스티의 소설이 제격이다. 추리소설의 혹은 범죄의 여왕이라 불리는 그녀의 작품들은 잔인한 설정 없이 사건의 퍼즐을 하나하나 해결해 나가는 고전적인 수법에서 오는 아늑함이 있다. 등장인물들의 심리와 상황을 분석해 사건을 풀어 내는 영리하고 개성 강한 두 탐정, 에르퀼 푸아로와 미스 마플은 긴장감 있는 미스터리 속에서도 편안함을 준다.

프랑스에서 지낼 적 언어의 한계로 마음껏 소설을 보기 힘들 때에는 두 탐정의 이름을 타이틀로 내세운 BBC의 드라마 '푸아로(Poirot)' 와 '미스 마플(Miss Marple)'을 열심히 챙겨 보곤 했다. 차분하고 침착한 추리를 하는 그들은 인생을 느긋하게 즐길 줄도 아는 인물들이었으니 여기서 술이 빠질 수 없다. 푸아로는 사교모임에서 종종 크렘 드 멍트(Crème de Menthe)라는 민트 맛이 나는 리큐어(Liqueur, 증류주에 설탕과 식물, 향료 등을 섞어 만든 술)를 마신다. 두툼한 손으로 영롱한 비취색의 술이 담긴 작은 잔을 들어 그의 멋진 콧수염 아래로 천천히 입에 가져가는 모습을 나는 화면 너머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쳐다보곤 했다.

미스 마플은 또 어떤가.

이 귀여운 할머니에게는 살인사건 해결 말고 또 다른 취미가 있는데 바로 댐슨 진 (Damson gin)을 만드는 것이다. 자두와 비슷하지만 그보다 작은 과일인 댐슨을 설탕과 진(gin)에 절여 만든 것으로 역시 리큐어의 일종이다. 선명한 루비색이 보기만 해도 달콤하다.

그러면 나도 한 번쯤 마셔보고 싶은 충동이 생기는 것이다. 사건의 추이를 머릿속으로 정리하며 한숨 돌리듯 마시는 그 맛은 어떨지 마치 주인공이 된 듯 기분 좋은 착각이 들기 때문이다.

▲ 난로 와 그 위에 올린 뜨끈한 음식이 얼어붙은 몸과 마음을 따듯하게 해준다. <그림=송정하>

하지만 현실은 어떤가.

라디에이터 하나에 의지하는 프랑스의 작디작은 아파트는 겨울에 추워도 너무 춥다. 장작불이 타는 벽난로는 고사하고 하나 있는 라디에이터는 내 몸과 방은 커녕 라디에이터 자신 하나 데우는 데만 신경을 쓰는 것 같다. 겨울 내내 비가 주륵주륵 내려 밖은 온통 회색빛이니 몸 뿐 아니라 마음까지 스산해진다. 이럴 땐 크렘 드 망트고 댐슨진이고 뭐고 몸을 데워줄 뜨끈한 뭔가가 필요하다.

결국 나는 마시다 남은 와인으로 뱅쇼(Vin chaud) -내 귀엔 아무리 들어도 방쇼 라고 들린다- 를 만든다. 뱅쇼는 말 그대로 뜨거운 (chaud) 와인(vin)을 의미하는 것으로 와인에 각종 향신료(계피, 생강, 정향, 육두구, 오렌지 껍질 등)와 꿀 혹은 설탕을 넣고 끓인 것이다. 이제는 한국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즐겨 마시는데 유럽에서는 종이 혹은 플라스틱 컵에 한가득 담긴 3~5 유로짜리 뱅쇼를 한 손에 들고 크리스마스 마켓을 돌아다니는 사람들을 볼 수 있다.

어떤 와인 애호가들은 향신료를 넣고 와인을 푹푹 끓여 먹는 것에 질색을 할 수도 있지만 겨울에 뱅쇼를 마시는 것 이 유럽에서는 꽤 오래된 전통이다. 사실 이러한 조리법은 와인의 산화를 방지해 장기간 보관을 가능하게 하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겨울이 매우 혹독한 스웨덴에서 글로그(Gloogg)라는 이름으로 크리스마스 즈음에 만들어 마시던 전통이 독일과 프랑스 등 유럽에 전해져 오늘날까지 사랑받는 겨울 음료가 되었다고 한다.

길고도 추운 겨울날 몸을 데워줄 뿐만 아니라 함께 끓인 향신료들 자체가 주는 효능 덕분이다. 계피는 소화를 돕고 피로 회복에 좋으며 심지어 당뇨를 조절하는 역할을 한다고 한다. 정향은 항박테리아 활성의 특징을 가져 부어오른 목을 가라앉히는데 효과가 있으며, 생강이 감기를 물리치는데 효험이 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첨가한 오렌지 껍질에서 나오는 비타민과 달콤한 꿀이 움츠러든 몸에 에너지를 주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물론 남아 있는 알코올을 고려해 적당히 마셨을 때의 이야기다.

뱅쇼를 만들기 위해 보르도의 최고급 그랑 크뤼 클라세(Grand Cru Classé) 와인을 냄비에 들이붓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렇다고 아무 맛도 향도 없는 와인을 재활용한답시고 넣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와인은 과일향이 아직 풍부하게 살아 있는 젊은 것으로 선택하되 앞으로 첨가할 설탕의 양을 줄이기 위해 지나치게 떫은 와인은 피하는 것이 좋다. 품종을 예로 들자면 메를로(Merlot)나 타닌이 적은 가메 (Gamay) 혹은 농축된 과일향으로 유명하며 모나스트렐(MonastreII)이라고도 불리는 무르베드르(Mourvedre)가 적당할 것이다.

겨울의 한가운데다.

나에겐 이제 한글로 번역된 친절한 애거서 크리스티의 소설도 있고, 마트에서 산 저렴하고도 질 좋은 메를로 와인과 적당히 구색을 갖춘 향신료도 있으니 축축했던 지난겨울날들을 추억할 뱅쇼를 만들 준비가 끝났다. 요새 굴뚝 있는 난로가 있는 집은 거의 없으니 타는 장작불 정도는 양보할 수 있다.

이제 속 시원히 눈이 펑펑 내려줄 일만 남았다.
단 한번만이라도.

▲ 송 정 하

법대를 나왔지만 와인이 들려주는 이야기가 좋아 프랑스 보르도로 떠났다. 보르도 CAFA에서 CES(Conseiller en sommellerie:소믈리에컨설턴트 국가공인자격증), 파리 Le COAM에서 WSET Level 3를 취득했다. 사람이 주인공인 따뜻한 와인이야기를 쓰고 싶다.

소믈리에타임즈 칼럼니스트 송정하 noellesong0520@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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