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르도에도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확진자가 나타났다는 기사를 보니 기분이 이상하다. 한동안 프랑스를 공포에 떨게 한 테러도 보르도를 비껴가는 등 국제적으로 논란이 될 만한 사건과 보르도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 했기 때문이다. 예스러운 건물들과는 확연히 대조되는 모던한 전차가 보르도 사람들의 삶만큼이나 느릿느릿 지나가는 도시 속에서, 주말이면 내리쬐는 햇살 아래 일광욕을 즐기는 그들이 이번 사태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을지 궁금해진다.

바이러스에 대한 무지로 인한 인종차별이 횡행하다길래 걱정이 되어 보르도에 있는 한국인 친구에게 연락을 해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버스에서나 길거리에서나 사람들의 시선이 확연히 달라졌다고 한다. 마스크를 쓰는 게 익숙하지 않은 그들에게, 마스크를 쓰고 돌아다니는 것은 바이러스 감염자라는 인식을 주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다는 말에 마음이 무겁다.

4년 전 이맘때 나도 마스크를 쓰고 보르도 거리를 걸은 적이 있다. 몸이 으슬으슬 춥고 기침이 심해 의사를 만나러 가는 길이었다. 횡단보도에서 눈이 마주친 한 남자는 마스크를 쓴 나를 향해 엄지손가락을 척 들어 올려 보였는데 그때 생각했다. 이곳에서 마스크는 일반적이지 않다는 것을.

그 주에 나는 학교에서 며칠에 걸친 시음 수업을 앞두고 있었다. 아무리 와인을 잠깐 음미한 후 뱉는다지만 조금이라도 술을 마시는 게 걱정이 되어 의사에게 와인을 시음해도 되는지 물었다. 의사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대답하길 

ㅡ 왜요? 알코올중독의 문제라도 있어요? 그게 아니면 당연히 마셔야죠. 와인이잖아요. 

와인을 대하는 프랑스인들에 대한 너무도 뻔한 고정관념을 내가 실제로 겪어보니 왠지 웃음이 피식 났다. ‘그래, 여기는 프랑스고 프랑스 의사의 말이니 환자인 나는 믿고 따라야지’ 하는 가벼운 마음으로 병원 문을 나섰다. 큰 병이 아니라면 어쩌면 의사의 역할은 환자의 두려움을 가라앉혀 주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머리가 무겁고 콧물도 나더니 눈가가 흐릿해져 앞이 잘 보이지 않는다. 흔한 감기는 어느새 향수병이 더해져 심각한 병이 되려고 한다. 이럴 때는 무조건 한국 음식을 먹어줘야 한다. 직접 겪어본 확실한 처방전이다. 발길을 돌려 중국인이 운영하는 아시아 마트로 향했다.  

이 마트를 가려면 보르도의 갸론강(La Garonne)을 가로지르는 퐁드피에르(Pont de Pierre, 이름하여 돌다리)를 건너야 한다. 매운 라면을 사겠다는 일념으로 콧물과 눈물이 뒤범벅 댄 얼굴을 감추기 위해 굳이 대중교통을 마다하고 분주히 아시안 마트를 향해 걸어가던 저녁 어스름의 돌다리가 아직도 눈에 선하다.  

▲ 보르도 시내와 갸론강 오른편을 연결하는 퐁드피에르는 보르도 최초의 다리라고 한다. <그림=송정하>

고춧가루까지 과도하게 넣은 라면을 먹으니 금세 기분이 좋아진다. 그리고 의사의 말을 실행(?)하기 위해 며칠 전 사 둔 3병의 와인 중 디저트 삼아 마실 하나를 고른다. 정신이 번쩍 나는 매운 걸 먹었으니 그다음 순서는 당연하게도 불 난 혀를 달래 줄 만큼 달달하면 좋겠다. 그렇다면 역시 세미용(Sémillon)이 70% 이상 블렌딩 된 보르도의 달콤한 화이트 와인이다.  

이 달콤함의 비결은 보트리티스 시네레아(Botrytis cinerea)라고 하는 미세한 곰팡이에서 나오는데 이는 수확 시에 포도가 적당히 익는 것을 넘어 과도할 정도로 숙성이 되어야 가능하다. 이 미세 곰팡이는 세미용의 얇은 껍질을 침투해 쪼글쪼글하게 만들고, 결국 포도 알갱이들은 수분이 날아가 건포도 비슷한 상태가 되어 보랏빛 갈색을 띄게 된다.  

보르도의 달콤한 화이트와인을 전 세계적으로 유명하게 한 것은 역시 그 유명한 소테른(Sauternes) 지방의 샤토디켐(Château d’Yquem)이다. 샤토디켐을 비롯한 이러한 와인들은 꽤 비싸기로도 유명한데, 위와 같은 포도 상태에 이르기 위해서는 단순히 늦은 수확만으로는 충분하지 않고 최상의 조건인 더위와 습함이 번갈아 나타나는 날씨를 요하는데 이는 매년 있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또한 모든 포도 송이에 그 미세 곰팡이가 생기는 것도 아니며, 한 송이의 모든 포도 알에 나타나는 것도 아니니 사람이 일일이 몇 번에 걸쳐 선별해 따는 절차를 거쳐야 한다. 자연히 수확량은 적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이렇게 어렵게 수확한 와인을 귀부(noble rot)와인이라고 부르며 비싼 가격이 매겨지는 것이다.  

하지만 보르도에 샤토디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샤토디켐이 있는 소테른 주변의 바르삭(Barsac) 또는 그 맞은편의 루피악(Loupiac) 등의 와인들은 상대적으로 저렴한 가격에 즐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날 내가 마신 와인은 소테른 바로 맞은 편에 있는 생트 크루아 뒤 몽(Sainte-Croix-du Mont) 지방의 2010년산이었는데 아카시아 꽃향기와 꿀, 약간의 말린 무화과향이, 함께 블렌딩 된 소비뇽 블랑이 주는 상쾌한 터치와 어우러져 달콤하면서도 신선한 맛을 동시에 즐길 수 있었다. 오랜 숙성을 가능케 하여 복합적인 풍미를 가져다주는 것이 세미용의 특성이지만, 나는 그 순간의 달콤한 청량감이 너무도 좋았다.  

매운 음식을 먹고 나서 그 자체로 디저트가 되는 달콤한 와인까지 한 모금 마시니 감기는 저만치 달아나는 듯하고, 동서양이 자랑하는 모든 맛을 즐길 수 있는 이 모든 환경이 그저 감사해 향수병마저도 눈 녹듯이 사라진다. 매운 라면 한 그릇과 그 후의 달콤한 술 한잔이 이렇게 사람의 마음을 움직인다는 게 참 신기한 일이다. 이제는 소박한 추억이 되었다. 

마늘을 끓여 마시면 각종 전염병을 완치할 수 있다는 등 여러 근거 없는 민간요법이 난무한다는 기사를 보니 더욱 마음이 무겁다. 세상의 모든 질병을 치료할 음료가 나온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당장은 손 씻기와 마스크 착용이 최선이라니 어서 하루빨리 이 상황이 잠잠해지길 기다릴 뿐이다. 

▲ 송 정 하

법대를 나왔지만 와인이 들려주는 이야기가 좋아 프랑스 보르도로 떠났다. 보르도 CAFA에서 CES(Conseiller en sommellerie:소믈리에컨설턴트 국가공인자격증), 파리 Le COAM에서 WSET Level 3를 취득했다. 사람이 주인공인 따뜻한 와인이야기를 쓰고 싶다.

소믈리에타임즈 칼럼니스트 송정하 noellesong0520@gmail.com

저작권자 © 소믈리에타임즈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관련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