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물어 가는 사막의 석양이야…
좀 있으면 찾아들 땅거미와 서로 어우러질 그 ‘다홍색’은…
반신에 어둠을 드리우고, 남은 반신에 빛을 머금고 있어.
피기 시작한 연꽃, 그리고 수선화. 이 우아함은 생명력으로 넘치고 있다.
당신은… 누구십니까? 신비로운 미소… 나한테 질문을 던진다.
언어가 아닌 미소로써… 이 와인은 내 어머니입니다!"

와인을 소재로 한 유명 만화 속 주인공의 대사 중 일부이다. 와인공부를 시작하기 전에 이 만화를 안 봤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으면 큰일날 뻔했다. 와인 전문가라면 누구나 저 정도의 표현 능력은 갖춰야 하는 줄 알았을 테니 나는 지레 겁을 먹고 와인에 입문하기를 포기했을 것이다. 만화 속 인물이 마신 것이 환각을 일으키는 무언가가 아니라 그저 와인을 마신 게 맞나 싶을 정도로 나로서는 죽었다 깨어나도 표현 못 할 엄청난 묘사다.

와인 시음에는 두가지 종류가 있을 것이다. 그 중 한가지는 분석적 시음이 그것이다. 와인의 질을 평가하는 것으로서 해당 와인이 맛의 균형을 이루고 있는지, 문제점은 없는지, 당장 마실 수 있는 상태인지 좀 더 숙성을 시켜야 할지 등을 결정한다. 그리고 그 최종 목적은 소비자 혹은 손님의 만족일 것이다.

나머지 하나는 친구들 혹은 가족들과의 편한 식사 자리에서의 시음이다. 화기애애한 자리에서 와인의 맛과 그 맛이 주는 즐거움(기대에 어긋났을 때에는 실망감), 함께 먹는 음식과의 어울림 등을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다. 모두들 알다시피 여기에 정답은 없다.

하지만 아무리 편안한 식사자리라도 와인을 표현하는 데 아쉬움이 남을 때가 많다. ‘참 맛있다. 근데 이걸 뭐라고 표현하지? 익숙한 향인데 이게 뭐더라?‘ 등등. 적당히 격식 있는 사교 모임에서 각자 돌아가며 와인에 대한 느낌을 한 마디 해야 하는 순간에, 표현하고 싶은 단어가 머리와 입을 맴돌 뿐 나오지 않을 때, 모두들 나를 향하는 시선이 부담스러울 때가 있는 것이다.

이럴 때 가장 좋은 방법은 역시 와인에 대한 기초를 배우는 것이다. 아는 만큼 보이고 그만큼 즐길 수 있기 때문이다. 와인 라벨은 생산지, 때로는 포도 품종을 보여주기 때문에 이것만 볼 줄 알아도 하고 싶은 이야기는 많아진다. 더 나아가 와인의 품종과 그 특성을 알고 있다면 정답을 알고 푸는 수학문제 만큼이나 쉬워진다.

슬쩍 본 유명 부르고뉴 와인 라벨을 통해 내가 지금 맡는 향기가 오랜 숙성을 거친 최고급 피노누아에서 맡을 수 있는 젖은 낙엽과 이끼의 냄새임을 쉽게 연상시킬 수 있는 것이다. 요새는 일러스트를 곁들인 쉬운 서적과 재밌는 콘텐츠가 가득한 인터넷이라는 수단이 있어서 와인에 대한 정보를 얻는 것이 어려운 일이 아니게 됐다.

▲ 와인 시음은 사실 꽤나 많은 집중과 훈련을 필요로 하는 일이다. <사진=송정하>

나의 느낌을 그대로 표현하기

하지만 와인의 품종과 그 특성을 미리 공부한 후에 하는 시음은 마치 결말을 알고 보는 추리소설과도 같다. 와인의 정확한 향과 그 와인의 이름, 생산지, 연도를 알아내는 게 우리의 목적은 아니기 때문에 위와 같은 선행학습은 와인 시음이 주는 즐거움을 반감시킬 때가 있고 재밌어야 하는 테이스팅 자리는 금새 시시해지고 만다.

또한 미리 정답을 알고 수학문제를 푸는 습관은 절대 수학 실력을 향상시킬 수 없듯이 와인 시음도 마찬가지다. 나의 느낌과 나의 언어로 표현하는 훈련이 필요한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상상력을 발휘하기 

와인을 취할 목적으로 바로 목구멍으로 삼키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우선 와인의 색을 보고 향을 맡고 와인을 음미하면 다음의 한 모금 사이, 혹은 마주앉은 상대방과의 대화 사이에 시간의 여백이 생기게 된다. 그 동안 와인의 맛과 그로 인한 나의 느낌, 더 나아가 거기서 불현듯 떠오르는 삶의 경험에 대해 한마디쯤 하게 만드는 것이 와인의 매력인 것 같다. 이럴 때는 와인을 핑계로 마음껏 나만의 이미지를 만들어 떠올리면 와인 시음은 더욱더 풍요로워진다.  

우연히 마신 화이트와인이 어린시절 할머니 댁 마당에 흐드러지게 핀 늦봄의 장미 향을 생각나게 하는 경우처럼 말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위의 만화 주인공의 우스꽝스러울 정도의 과장된 표현도 이해 못할 것만은 아니다.

프랑스의 언론인이자 작가인 장 폴 카우프만(Jean-Paul Kaufmann)은 한 인터뷰에서, 와인을 표현하는 데 스무 단어면 충분하다며 이렇게 덧붙였다.

"내가 한 말이 아니에요. 페트뤼스(Petrus)의 위대한 양조전문가, 장 클로드 베루에(Jean-Claude Berrouët)가 한 말이죠."

상대방에게 과시하기 위한 목적의 현학적이면서도 공허한 와인 예찬을 꼬집는 발언일 것이다. 그러나 와인이 주는 느낌을 자유롭게 이야기하고 상상력을 발휘해 우리의 삶을 좀 더 재밌고 풍성하게 하는 표현까지 스무 단어 내로 이야기 하라는 말은 아님에 틀림없다.

▲ 송 정 하

법대를 나왔지만 와인이 들려주는 이야기가 좋아 프랑스 보르도로 떠났다. 보르도 CAFA에서 CES(Conseiller en sommellerie:소믈리에컨설턴트 국가공인자격증), 파리 Le COAM에서 WSET Level 3를 취득했다. 사람이 주인공인 따뜻한 와인이야기를 쓰고 싶다.

소믈리에타임즈 칼럼니스트 송정하 noellesong0520@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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