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장 정리해야 할 자료가 있어서 오늘도 집 근처 카페를 찾았다. 카페에 가는 것이 특별히 해야 할 일이 있는 오늘만의 일은 아니지만, 해야 할 일들은 늘 있는데 그것이 항상 카페에서 이루어져야만 하는 것이 문제라면 문제다. 책 두 권 노트북 지갑 핸드폰 충전기 각종 펜이 들어 있는 파우치와 다이어리 끄적일 노트까지 넣은 큰 배낭을 둘러업고 집을 나서면, 굳이 집을 놔두고 그런 행군(?)을 해야 하냐는 엄마의 핀잔이 이어진다. 그러면 나는 속 편한 사람처럼 이렇게 대꾸한다.

ㅡ 봉준호 감독도 카페 몇 군데를 돌아다니며 시나리오를 쓰는 습관이 있대요. 나도 뭐라도 하지 않겠어요? 

시나리오는 고사하고 아늑한 카페의 실내 공기에 마음이 헤이 해져 핸드폰만 만지작거리느라 시간을 버리기 일쑤지만 말이다. 사실 커피 마시는 데 드는 비용도 다 하면 만만치 않아서 카페에 있는 동안만은 무언가 생산적인 일을 해야 한다는 일종의 강박관념도 있다. 하지만 일정 시간 주어진 일에 몰두하다가 고개를 들어 새삼 카페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을 알아채거나 창밖으로 지나가는 사람들을 구경하노라면 기분 좋은 호젓함이 느껴진다.

목이 마르면 마음대로 가져다 마실 물부터 콘센트까지 모든 게 갖춰진 한국의 카페에서 이런 소소하면서도 완벽한 사치를 누리다가도, 불현듯 프랑스 카페에서 가끔 마시던 단출한 커피가 생각날 때가 있다. 작은 커피잔에 담긴 시커먼 에스프레소 혹은 원두커피 말이다. 그리고 그 기억은 하나의 이미지가 되어 아련한 엽서처럼 떠오른다.

그날은 체류증 갱신을 위해 관공서에 각종 서류를 제출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체류증 갱신은 잘못한 것도 없는데 괜히 초조해지는, 외국인에게는 꽤 지치는 절차다. 이른 아침에 나오느라 허기진 몸과 마음을 채울 겸 근처 빵집에 들어가 한숨 돌리는 순간 내 눈에 들어온 건 창밖의 야외 테이블에 홀로 자리를 잡은 한 할머니였다.

테이블이라고 해 봤자 바람이 조금만 불어도 넘어질 듯 우리나라 편의점 야외테이블만큼이나 아슬아슬했다. 바로 옆은 도로라 정신없이 차가 지나다니는데 할머니는 얇은 일회용 플라스틱 컵에 든 커피 하나를 시켜 놓고 신문을 보느라 여념이 없었다. 슬쩍 보니 보수적이기로 유명한 신문 ‘르 피가로(Le Figaro)’다. 갖은 인상을 쓰며 신문을 보시다가 담배 한 모금 그리고 이어지는 커피 한 모금. 혹시 이민자들을 규탄하는 기사라도 읽으시는지, 가뜩이나 체류증과 비자 문제로 마음이 오그라든 나는 할머니와 눈이 마주치지 않기 위해 먹고 있는 빵에만 집중했던 기억이 난다.

그러다 결국 자리에 일어서면서 눈이 마주치고 말았고 프랑스에서는 늘 그렇듯 우리는 서로 봉주르를 주고받았다 그때, 마치 반전과도 같은 할머니의 환한 미소에 단순한 나는 금방 배시시 따라 웃으며 오그라든 마음이 말랑말랑해지는 기분을 느꼈다.

▲ 할머니는 얇은 일회용 플라스틱 컵에 든 커피 하나를 시켜 놓고 신문을 보느라 여념이 없었다. <그림=송정하>

할머니의 모습이 아직도 선명히 기억나는 이유는 야외테이블과 커피, 신문 그리고 담배처럼 내가 생각하는 프랑스인들의 커피 휴식 시간을 보여주는 전형적인 요소들이 한 장면에 다 들어있기 때문이다.

프랑스의 모든 식음료점에서 커피를 팔지만, 우리처럼 음악이 흘러나오는 곳은 별로 못 본 것 같다. 그래서 퍼즐을 풀거나 기사를 읽느라 신문을 뒤적이는 소리 사람들의 수다 소리 테이블에 찻잔이 부딪히는 소리 등 모든 날 것의 소리가 그대로 들린다.

의자는 또 어떤가. 실내에는 푹신한 소파가 있을 수 있지만, 대부분의 프랑스인들은 야외 자리를 선호한다. 의자와 테이블은 딱딱하며 일행이 있어도 의자를 마주 보는 형태로 하지 않고 도로를 향하게끔 나란히 배열해 놓는 경우 가 많다 그러면 마치 관람객처럼 앉아 멍하니 행인들을 쳐다보는 것이다. 주변의 차 지나가는 소리, 공사장 소리 옆에 있는 쓰레기통과 바닥에 널린 개똥은 아랑곳하지 않고.

이 모든 것들을 보면 사실 낭만과는 거리가 멀게 느껴진다. 커피라면 으레 에스프레소 혹은 원두커피라서 선택의 자유도 많지 않고 감상에 젖게 할 음악도 나오지 않으며 커피를 마시는 환경이 그다지 쾌적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때때로 그들의 커피 마시는 풍경이 아련하게 떠오르는 것은 그들이 정말 제대로 휴식을 취하고 있구나 하는 이제 와서 느끼는 깨달음과 부러움 때문인 것 같다.

하지만 프랑스도 세계의 커피 트렌드를 빗겨가지는 않는 듯하다. 내가 살던 보르도에는 5곳의 스타벅스 매장이 있는데 늘 사람들로 붐볐기 때문이다. 전 세계의 모든 젊은이가 그렇듯 그들은 모두 큰 일회용 커피 컵을 들고 마시며 노트북을 끼고 각자의 일에 열중한다. 한번은 나이 지긋하신 할아버지가 커피를 주문하는 모습을 본 적이 있다 커피를 내어줄 때 주문자를 호명하는 스타벅스의 방침에 따라 직원은 할아버지의 이름을 물었다. 할아버지는 “커피 한 잔 마시는데 내 이름은 뭐에 쓰려고?”라고 응수해서 그 광경을 보던 나도 속으로 “그러게 말이에요” 하며 피식 웃은 적이 있다.

글로벌 프랜차이즈 브랜드 외에도 커피숍(coffee shop)’이란 타이틀을 달고 새로 개업하는 카페들을 종종 보게 된다. 카페(café) 라는 이름보다 커피숍이 좀 더 쿨(cool) 하다고 여기는 젊은이들을 겨냥했다고 하는데, 영미인들과 프랑스인들이 서로의 문화를 동경하고 있다는 사실이 재미있다.

17세기에 중동을 거쳐 아라비아의 와인(Vin d’Arabie) 이라는 이름으로 도입된 이래 프랑스에서 커피는 물 다음으로 가장 많이 마시는 음료라고 한다. 하지만 커피가 주는 부정적인 인식이 있었는데 바로 위의 할머니처럼 커피가 주는 휴식의 이미지에는 흡연이 늘 따라오기 때문이다. 그래서 커피 전문가들은 이런 부정적인 이미지를 전환하기 위해 늘 고심하는데, 그중 한 전략이 와인과 같은 고품질 이미지 마케팅이다 “와인 한 병을 마시는 게 아니라 보르도 한 병을 마신다”라고 말하듯이 커피 한 팩을 사는 게 아니라 ‘콜롬비아산 오리지날 아라비카’를 산다"라는 프랑스의 한 커피 전문가의 말처럼 말이다.

늘 그들의 것을 지키는 데에 온 힘을 쏟는 프랑스인들이니 그들 고유의 커피 문화가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 확신과 함께 나는 상상을 해 본다. 해야 할 일들을 테이블 위에 잔뜩 늘어놓고 커피 '한 사발'을 마셔 가며 오늘도 생산적인 커피 시간을 가져야 한다는 생각을 버리는 것. 종이 신문이 없으면 잡지 책이라도 읽으며, 그거라도 없으면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며 계절의 변화를 느끼는 것. 흡연자가 아니니 완벽한 커피 휴식 시간이 될 것 같다.

▲ 송 정 하

법대를 나왔지만 와인이 들려주는 이야기가 좋아 프랑스 보르도로 떠났다. 보르도 CAFA에서 CES(Conseiller en sommellerie:소믈리에컨설턴트 국가공인자격증), 파리 Le COAM에서 WSET Level 3를 취득했다. 사람이 주인공인 따뜻한 와인이야기를 쓰고 싶다.

소믈리에타임즈 칼럼니스트 송정하 noellesong0520@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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