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는 많은 것들이 작다. 도로의 자동차도 작고, 커피잔도 작고, 카페나 레스토랑의 테이블도 작으며 그 테이블의 간격들도 매우 좁다.

그 중에 내가 가장 적응하기 힘들었던 것은 식당의 좁은 테이블이었다. 성인 남자 어깨만 한 너비의 테이블 위에 유리로 된 큰 물병과, 큰 접시, 빵 바구니, 술을 마실 경우 술잔까지 놓아야 하면 그야말로 테이블이 그릇들로 넘쳐난다. 운이 좋아 꽃병과 장식품이 놓인 선반이 있는 구석진 자리의 테이블에 자리를 잡으면 그 선반에 물병이라도 올려 놓지만 그렇지 않으면 정말이지 테이블 옆 바닥에 라도 자주 쓰지 않는 그릇을 잠시 내려놓고 싶은 심정이다.

반면에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작은 것’은 프랑스의 평범한 식당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작은 와인 잔이다. 작은 카페나 소박한 레스토랑을 지칭하는 비스트로(Bistrot)에서 많이 보이는, 짧은 다리를 가지고 있는 이 와인 잔은 캐주얼함을 표방하는 비스트로와 아주 잘 어울린다. 비스트로는 음료와 간단한 음식을 제공하는 곳부터 트렌디 하면서도 세련된 요리를 선보이는 곳까지 다양하여 프랑스를 상징하는 곳이기 때문에 자연히 이 곳에서 선보이는 단순하고 소박한 와인 잔 역시 프랑스를 대표하는 와인 잔이 되었다.

▲ 두께가 상대적으로 두껍고 다리가 낮아 실용적인 비스트로 와인잔 <출처 : Maison du monde>

일반적으로는 가늘고 긴 다리(스템, stem)를 가졌으며 와인을 담는 볼(bowl) 부분은 동그랗게 볼록한, 투명하고 얇은 두께의 크리스탈 혹은 유리 잔이 가장 좋은 와인 잔이라고 여겨진다. 더 나아가 와인의 색, 생산지역과 품종에 따라 잔을 달리하는 것이 와인의 맛과 향을 즐기는 가장 이상적인 방법이라고도 한다. 부르고뉴산 와인의 경우 크고 불룩한 볼(bowl)을 가졌으며 잔의 입구는 보르도의 잔보다 좀 더 작아야 하고, 화이트 와인은 레드 와인보다 작은 잔에 마셔야 하며 심지어 카베르네 소비뇽은 카베르네 소비뇽 전용 잔에 마셔야 한다는 등 말이다.

사실 비스트로 와인 잔은 다리가 짧아 시각적으로도 세련되고 우아한 맛이 덜하고, 잔을 잡을 때 손의 열이 잔에 전도되기도 한다. 좀 더 캐주얼하고 저렴한 음식점에서 볼 수 있는 잔은 두께가 꽤 두껍고 투박하며 잔의 크기도 더 작기 때문에 와인의 향을 발산시키기 위해 잔을 흔드는 것조차 힘들 때가 있다. 와인의 종류와 상관없이 작고 단순한 형태의 잔이 일률적으로 제공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이런 이유들로 프랑스의 작고 단순한 와인 잔은 전 세계의 와인 애호가들의 비판의 대상이 되곤 한다. 작은 프랑스 와인 잔을 불평하는 한 와인 저술가의 트위터 글에 대해 와인 비평가 잰시스 로빈슨(Jansis Robinson)은 ‘프랑스의 와인 잔 얘기는 꺼내지도 말라’는 답을 하기도 하고, 오스트리아의 와인 잔 브랜드 리델(Riedel)의 대표 막시밀리안 리델은 한 인터뷰에서, 보르도와 부르고뉴는 여전히 공략하기 어려운 시장이라고 토로하기도 했다.

그렇다면 많은 프랑스인들이 여전히 작고 단순한 와인 잔을 선호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당연하게도 실용적인 측면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작은 잔은 무엇보다 싸고 세척하기 쉬우며 잘 깨지지도 않는다. 그리고 자리를 많이 차지하지 않아 프랑스 음식점 특유의 작은 테이블에서도 안전하게(?) 즐길 수 있다.

다른 한편으로는 포도재배의 역사를 가진 프랑스의 전통적인 와인 소비층과 와인을 대하는 프랑스인들의 시각을 통해 짐작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포도를 재배하고 와인을 만드는 생산자들이 와인을 소비하기 시작했으며 그들에게 와인은 하루의 노동을 끝마친 후 소박한 음식에 곁들이는 일상의 음료로 결코 다양한 와인 잔이 필요한 특별한 것이 아니었을 것이다.

와인을 바라보는 그들의 시각은 오늘날까지 이어져 크고 세련된 와인 잔은 비싸고 사치스럽다는 인식이 지배적이다. 사실 많은 프랑스인들이 작은 차를 타고 다니는 등 소박함과 검소함이 몸에 배어 있는 것을 생각하면 충분히 납득이 가능한 일이다.

최근 세련되고 고급스러움을 표방한 와인 바(bar)나 비스트로들은 오히려 의도적으로 한가지 종류의 작은 와인 잔을 취급한다고 한다. 전통적인 농산물로서의 와인을 강조해 향수를 불러 일으키고 무엇보다 값으로만 등급을 매겨 특별한 사람만이 즐기는 것이 아닌, 테이블 위에서 음식과 함께 하는 와인을 모토로 내세우기 때문이다. 그들이 지향하는 것은 ‘캐주얼한 분위기에서 즐기는 친근함‘이다.

그렇다면 내가 이 작고 소박한 와인 잔을 좋아하는 이유는?

늘씬하게 뻗은 긴 다리를 자랑하며 정교하게 세공된 영롱한 와인 잔이 각종 그릇들과 좁은 테이블에 아슬아슬 놓여 있는 걸 보고 있자면 어쩐지 불안한 마음이 든다. 마치 너무도 완벽하여 왠지 다가가기 힘든 타입의 상대방을 마주하고 있는 느낌이랄까. 도저히 편안하게 식사를 할 수 있을 것 같지가 않다.

물론 내가 생각하는 최고의 와인을 그에 맞는 최적의 와인 잔에 따라 그 맛과 향을 완벽히 즐기는 것은 더할 나위 없이 황홀한 일이다. 하지만 좋아하는 사람들과의 격의 없는 대화와 따뜻하고 정겨운 분위기가 가득한 자리에서라면(특히 테이블이 좁다면!) 얼마든지 주인공의 자리를 양보할, 작고 투박하지만 다정한 이 와인 잔 하나로 내게는 충분하다.

▲ 송 정 하

법대를 나왔지만 와인이 들려주는 이야기가 좋아 프랑스 보르도로 떠났다. 보르도 CAFA에서 CES(Conseiller en sommellerie:소믈리에컨설턴트 국가공인자격증), 파리 Le COAM에서 WSET Level 3를 취득했다. 사람이 주인공인 따뜻한 와인이야기를 쓰고 싶다.

소믈리에타임즈 칼럼니스트 송정하 noellesong0520@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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