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지금이 딱 좋은데 슬슬 깨려고 하네‘’.

정확히 맥주 500ml가 주량인 엄마는 450ml쯤 마셨을 때에 평소보다 말도 많고 그래서 더 행복해 보인다. 하지만 주량을 채우고 나면 어김없이 도로 정신이 맑아지는 게 문제다. 늘 저렇게 아쉬운 소리를 하시니 말이다. 그렇다고 주량을 넘어 과음을 할 수도 없고.

취기에서 오는 이 잠깐의 행복감을 느낄 때면 어김없이, 보르도에 살던 시절 늘 사람들로 붐벼 동네 사랑방과도 같았던 꺄브(Cave) «엉트르 듀 뱅(Entre Deux Vins)»이 떠오른다. ‘엉트르 듀 뱅’은 직역하면 ‘두 와인 사이에 있다’ 정도 되는데 풀어 말하자면, ‘약간의 취기가 오른, 즉 기분 좋을 정도로 적당히 취한 상태’를 의미한다. 매주 금요일 와인 한 잔을 두고 이야기꽃을 피우며 ‘와인 사이에 있던’ 보르도 주민들은 늘 여유로워 보였다.

▲ 보르도의 와인 꺄브, 엉트르 듀 뱅(Entre Deux Vins)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 <사진=송정하>

와인의 나라답게 프랑스어에는 와인을 뜻하는 프랑스어 ‘뱅(Vin)’을 사용한 관용 표현을 찾아볼 수 있다. 프랑스 내 와인 소비의 감소로 이러한 표현도 점점 줄어드는 추세라지만 몇 개의 표현은 아직도 자주 쓰이는 것 같다.

와인단지(Pot-de-vin)를 받은 혐의로 구속되다?

프랑스 신문의 정치, 사회면에는 ‘와인 단지 즉 포도주 항아리’를 주고받았다는 내용의 기사를 종종 볼 수 있다. 프랑스뿐만 아니라 어느 사회이건 늘 이게 문제다. 짐작하다시피 이 와인단지란, ‘이익이나 특혜를 얻기 위해 주는 부정한 돈이나 각종 형태의 선물 즉 뇌물’이다. 속어처럼 쓰이는 표현이 아니라 뇌물을 의미하는 거의 유일한, 오늘날 흔히 쓰이는 단어다.

이 단어의 유래는 중세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원래는 술을 한잔 마시고 나서 주는 팁(Pourboire, 팁이란 단어도 ‘마시기(boire) 위함(pour)’이란 뜻이다!)을 의미했다고 한다. 이 팁을 돈으로 주거나 항아리에 와인을 채워 주었던 것이다. 그러니 처음에는 부정적인 의미는 찾아볼 수 없었다. 사실 대부분의 단어가 그렇듯 시간이 지나면서 변질되는 경향이 있는 듯하다. 뇌물을 뜻하는 영어 브라이브(Bribe)는 본래 자선을 베풀 때 쓰는 선의의 물건이었다고 하고 하니 말이다.

뇌물을 의미하는 용어로 그 나라에서 널리 즐겨 마시는(먹는) 음식이 사용되는 것도 흥미로운 사실이다. 프랑스에 ‘와인항아리’가 있다면 우리나라에는 설날이나 추석 등의 명절에 주는 특별수당이 변질하여 사용되는 ‘떡값’이 있지 않은가!

와인에 물을 탈 줄 알아야 해 (Savoir mettre de l’eau dans son vin)

와인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나 싶은 말이다. 말 그대로 ‘와인에 물을 넣는다(mettre de l’eau dans son vin)’는 말인데 이는 어느 상황에서나 ‘말과 행동을 절제할 줄 알아야 한다’는 뜻이다. 삶의 지혜를 상징하는 이 표현은 15세기 이래로 널리 쓰였다고 한다. 사실 와인에 물을 타는 것은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이 만취 후의 돌이킬 수 없는 행동을 방지하기 위해 실제로 행한 방식이다. 심지어 술의 신인 디오니소스(Dionysos)도 실천한 습관이라고 하니 이 표현이 주는 의미를 되새겨볼 만하다.

술 잔의 찌꺼기까지 마신다 (Boire le calice jusqu’à la lie)

‘술 잔의 찌꺼기까지 마신다’는 17세기 종교의식에서 나온 표현으로 ‘어떤 괴로움 앞에서도 물러서지 않고 참고 견디는 것’을 의미한다. Calice란 영화 ‘인디애나 존스’에서나 볼 법한 입구가 넓게 벌어진 술 잔인데, 가톨릭 미사에서 볼 수 있다. 기독교에서 와인은 그리스도의 피를 상징하기 때문에 그 옛날 사제들은 미사 중 와인이 담긴 술잔을 단 한방울도 남길 수 없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 시절 완벽하게 정제되지 않은 와인의 까끌까끌한 침전물(la lie)까지 다 마셔야 했다. 그래서 술 잔을 뜻하는 calice는 동시에 ‘신이 주는 고난과 고통’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 찌꺼기 맛이 도대체 어느 정도였길래 이런 표현이 나왔을까?

와인을 발효시키는 중이야 (Cuver son vin)

양조업자가 아니라 술을 진탕 마신 사람의 이야기다. Cuver는 ‘와인을 퀴브(cuve)라는 발효통에 넣는 것’ 즉 ‘발효시키다’라는 뜻이다. 프랑스에서는 와인을 발효 혹은 숙성시키기 위해 일정 기간 술통에 넣어두는 것을 와인을 ‘쉬게 한다’라고 말하는데 이에 빗대어 ‘과음하고 난 후 푹 자면서 술이 깨길 기다린다’는 의미로 ‘와인을 발효시킨다’라는 표현이 나왔다고 한다.

와인을 뽑아냈으면 마셔야지 (Quand le vin est tiré, il faut le boire!)

‘일단 잔에 와인을 따르면 마셔야 한다’는 지극히 논리적인 말이다. 그럼 따른 술을 마시지 버리기라도 한단 말인가? 프랑스인들은 이 당연한 말을, ‘한번 맡은 일은 돌이킬 수 없으니 무슨 일이든 끝까지 밀고 나가야 한다’는 격언으로 사용한다. 우리나라로 치면 ‘칼을 뽑았으면 무라도 베어라’ 정도 될까?

▲ 송 정 하

법대를 나왔지만 와인이 들려주는 이야기가 좋아 프랑스 보르도로 떠났다. 보르도 CAFA에서 CES(Conseiller en sommellerie:소믈리에컨설턴트 국가공인자격증), 파리 Le COAM에서 WSET Level 3를 취득했다. 사람이 주인공인 따뜻한 와인이야기를 쓰고 싶다.

소믈리에타임즈 칼럼니스트 송정하 noellesong0520@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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