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원에서 비서로 일하는 아일린(Ottessa Moshfegh의 소설 'EILEEN' 中)은 지긋지긋한 그녀의 삶에서 벗어나 더 큰 도시로 탈출하는 꿈을 가지고 있다. 그녀가 그런 꿈을 가지게 된 가장 큰 이유는 그녀의 아버지다. 경찰관이던 아버지는 어머니가 죽은 이후 술을 마시기 시작했고 갖은 사고를 치면서 늘 술 심부름을 시키기 때문이다. 삶에 대한 혐오로 가득한 그녀가 무기력하게 매일 사 오는 그 술은 바로 진(Gin)이다.

누군가에게 진은 화려한 색과 다양한 향으로 무장한 칵테일을 선사하는 트렌디한 음료로 기억될 것이다. 요즘같이 불쾌지수가 치솟는 날씨에 보기만 해도 청량감을 주는 진 앤 토닉(Gin&Tonic) 혹은 클래식한 바에서 연인을 기다리는 동안 왠지 한 잔 주문해 마시고 싶은 마티니(Martini) 같은 것들 말이다.

나는 진을 베이스로 한 수많은 칵테일을 맛보기도 전에 소설 속에서 먼저 진을 배웠다. 소설 속 진을 마시는 사람들은 대부분 실직을 했거나, 가족을 잃었거나, 그밖에 주체할 수 없는 트라우마를 가지고 있었고 하나같이 늘 취해 있었다. 한마디로 알코올 중독자들인 것이다. 그리고 그들 곁에는 고통을 감내해야 하는 주변인들이 있다.

▲ 소설 속 아일린에게 진은 어떤 존재로 남아 있을까. <그림= 송정하>

와인학교 시험 중에는 각종 증류주들을 블라인드 테스팅 하는 항목도 포함되어 있어서 나는 책상에 앉아 공부를 시작하기 전 늘 몇 종류의 향을 습관적으로 맡아보곤 했다. 그중 진은 한마디로 너무 쉬웠다. 쌉쌀한 듯 달콤하고 흡사 향수나 화장품 냄새 같기도 한 게 너무 독특해서 도저히 다른 술과 헷갈릴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즈음 한번은 보르도를 가로지르는 트램 안에서 어린 여자아이를 안고 앉아있는 한 엄마를 보게 되었다. 아이는 원래는 분홍색이었을 회색 곰인형을 안고 더러운 바게뜨를 물고 있었고 엄마는 지친 행색과 공허한 얼굴로 좌석 맞은편 바닥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녀에게서는 코를 찌를 정도의 들큰한 향수 냄새가 났는데, 나는 내가 아는 진의 향기 그리고 소설 속에서 보아 온 이미지를 떠올리고는, 강하고 독특한 향이 어떤 일종의 슬픔과 고통의 정서와 관련이 있는 것인지 이런저런 생각에 빠지곤 했다.

아니나 다를까 인터넷에서 진과 슬픔이라는 단어를 동시에 검색해 보니 다양한 글과 기사가 쏟아져 나온다. 한 기사에 의하면 이렇다. 영국의학저널(the British Medical Journal)이 3만 명의 성인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위스키나 진을 마신 사람들은 와인이나 맥주를 마신 사람에 비해 급격한 감정 변화를 느꼈다는 것이다. 그들 중 3분의 1이 슬픔과 분노, 공격성을 보였는데 와인을 마신 사람들의 약 7%만 그러한 감정을 느낀 것과는 대조적이다.

위 연구에는 위스키를 마신 사람들도 포함되어 있지만 사실 진에는 그보다 더 분명한 편견이 서양인들 사이에 뿌리 깊게 박혀 있는 것 같다. 진 혹은 진을 베이스로 한 칵테일을 마시면 슬픔에 겨워 눈물을 보인다 하거나 더 나아가 ‘진을 마시고 취했다’는 것은 그야말로 손가락질 꽤나 받는 행동이 되는 것이다. 진은 언제부터 이런 부정적인 이미지를 가지게 됐을까?

사실 1700년대 초반부터 진은 영국 런던에서 심각한 사회 문제의 주범이었다. 아편이나 브랜디, 와인은 부유층의 전유물이었고, 대부분의 하층민들은 당시 맥주보다도 싼 진을 마실 수밖에 없었다. 그 시절 진은 질이 낮고 위험한 원료로 생산되곤 했는데, 특유의 깨끗하고 독특한 향을 내는 원료인 주니퍼 베리(Juniper berriy :노간주나무) 대신 향을 내기 위해 양조자들은 테레빈유(油) (페인트 물감 등을 희석하는데 사용하는 오일)를 사용했으니 값이 싼 건 당연한 일이다.

빈곤층의 고단한 나날을 위로해 주던 진은 자연스레 범죄와 폭력을 부추기게 되어 급기야 런던의 치안판사들이 ‘진은 모든 악과 방탕의 주요 원인’이라고 선언하기에 이르렀다. 당시 하층민들의 비참한 삶은 영국의 화가 윌리엄 호가스(William Hogarth:1697~1764)의 동판화 <진 골목(Gin Lane)>에 적나라하게 묘사되어 있다. 엄마로 보이는 한 여성은 아이가 난간에서 떨어지는 것도 모른 채 만취해 계단에 앉아 있고 한 남자는 역시 진에 취해 마치 죽음을 기다리는 듯 뼈만 남은 앙상한 몸을 드러내고 있다.

이러한 사정은 19세기에 이르러서도 별로 나아지지 않았던 듯하다. 빅토리아 시대의 빈곤과 사회 계층문제에 대한 신랄한 비평가이기도 했던 영국의 소설가 찰스 디킨스(Charles Dickens:1812~1870)가 그의 첫 단편집인 ‘보즈의 스케치(Sketches by Boz)’ 중 <Gin shops>에서 한 묘사가 대표적이다. 진을 파는 상점들이 모여 있는 런던의 빈민가 드루리 레인(Drury Lane) 거리는 그의 표현대로 “보지 못한 사람은 감히 상상도 못 할 더러움과 비참함” 그 자체였다.

사정이 이러니 영국과 역사의 흐름을 같이 하는 미국이라고 다를 게 없었을 것이다. 금주법 시대에는 메틸 알코올 등을 사용한 배스텁 진(Bathtub Gin)이라는 밀주가 성행했으며 역겨운 싸구려 향을 감추기 위해 각종 칵테일을 만들어 마셨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한편 위에서 언급한 영국의학저널은, 인간은 어떤 특정한 상황과 관련해서 감정적으로 격해져 있을 때 도수가 높은 알코올을 찾게 되고 그래서 더욱 슬픔, 분노와 같은 감정에 노출되기 쉽다는 당연하고도 맥 빠지는 결론을 도출했다고 한다.

최근엔 진 두 병을 마시고 만취하여 코로나 봉쇄조치도 잊고 대형 마트에 들어간 한 영국 남성이 거액의 벌금을 내야만 했다는 기사를 보았다. 그도 취할 수밖에 없었던 어떤 사정이 있었던 걸까? 진의 뒤에 숨어 있는 비참한 역사와 소설과 그림 등의 작품에서 느낀 진에 대한 슬프고 고통스러운 이미지가 뇌리에 박힌 나는 또 여러 생각이 든다.

▲ 송 정 하

법대를 나왔지만 와인이 들려주는 이야기가 좋아 프랑스 보르도로 떠났다. 보르도 CAFA에서 CES(Conseiller en sommellerie:소믈리에컨설턴트 국가공인자격증), 파리 Le COAM에서 WSET Level 3를 취득했다. 사람이 주인공인 따뜻한 와인이야기를 쓰고 싶다.

소믈리에타임즈 칼럼니스트 송정하 noellesong0520@gmail.com

저작권자 © 소믈리에타임즈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관련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