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지금 내가 앉아 있는 이 프랜차이즈 카페에서 오늘(8월 29일) 밤 안으로 이 글을 마무리 지어야 한다는 비장한 각오로 노트북 화면을 마주하고 있다. 더 이상 테이블 이용이 불가능한 30일 자정이 되기 전에는 서둘러 이 곳을 빠져나와야 하기 때문이다. 나는 어쩌다 늘 가는 프랜차이즈 카페에서 글을 쓰는 습관이 생겼을까. 변변치 않은 글을 쓰는 나도 이런데 소설처럼 큰(?) 글을 카페에서 쓰는 분들은 이 시기를 어떻게 보내고 있을지 궁금하다. 

두꺼운 마스크를 살짝 내리고 커피 한 모금을 잽싸게 마신 후 휴대폰으로 뉴스를 보니, 술집에는 마지막(?) 불타는 토요일을 즐기려는 사람들로 가득하다고 한다. 강화된 사회적 거리두기 조치에 잔뜩 기합이 들어간 나나 그들이나, 불편함을 견뎌야 하는 날들은 (이번 조치로 당장 생계가 곤란해지는 분들이 아니라면) ‘고작‘ 8일 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우리는 이미 오래전에 고독과 자발적 고립의 사회로 나아가기를 선택하지 않았던가. 바쁜 사회에서 ‘혼밥’과 ‘혼술’은 유행을 넘어서 나의 영역을 확보하기 위한 필수가 되었고 혼자 먹고 마시기 위한 배달조차 사람과의 접촉을 피해 전화보다는 온라인 주문을 선호하는 마당에 말이다.

열흘도 안 되는 강화된 방역 조치를 못 견디고 자꾸 집 밖으로 나오고 싶은 것은, 단순히 하지 말라면 더 하고 싶은 청개구리 심리일까?

이미 일찌감치 봉쇄조치를 경험한 유럽은 이에 대해 많은 논의가 있었던 듯하다. 느긋하게 먹고 마시는 문화가 발달한 그들에게 카페와 레스토랑에 앉을 자유를 빼앗기고 집에 갇혀 지내야 하는 것은, 단순히 여가를 즐길 자유를 침해받은 것과는 차원이 다른 것이었을 것이다. 그들의 역사를 살짝 들여다보면 그들을, 나아가 우리들을 조금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 카페와 레스토랑은 기다림과 만남의 장소다. <그림=송정하>

살롱(Salon)에 모여 문학과 철학 등을 논하던 18세기와 달리 19세기를 사는 유럽의 중산층들에게는 새로운 형태의 장소가 필요했다. 진입하기에 까다롭지 않아 좀 더 개방적이면서 친목을 도모할 수 있는 그런 공간 말이다. 그리하여 역사상 최초로 카페와 레스토랑, 각종 형태의 주점 등 대중음식점이 사람들의 생활 속에 자리 잡은 시대가 탄생했다.

그곳은 진정한 만남의 장소였다. 아침이면 늘 가는 카페에서 커피를 한 잔 마신 후 하루를 시작하고, 일터에서 퇴근한 밤이면 주점에 모여 모르는 사람들과도 술을 마시며 격의 없이 어울렸다. 수많은 거래와 협상이 이루어지기도 했으며 무엇보다 우정과 사랑을 나누는 곳이었다.

그래서 이러한 레스토랑은 사람을 관찰하기에 더할 나위 없는 공간이 되어 19세기의 문학가들에게는, 늘 그들의 작품에 대한 영감의 원천이었다. 특히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라는 대작을 집필한 마르셀 프루스트(Marcel Proust)에게 레스토랑은, 그의 소설과 인생에서 빼놓을 수 없는 장소였다. 그에게 음식은 그리움을 불러일으키는 존재였으며, 그가 매일 찾던 파리의 최고급 리츠 호텔 레스토랑은 사교의 장이었다.

내가 좋아하는 프랑스어 단어 중에 ‘Convivial’이란 단어가 있다. 사전을 찾아보면 ‘정겨운, 친근한’이라고 나오지만, 우리나라 특유의 정서가 깃든 단어인 정(情)이 그렇듯 한마디로 정의를 내리기에는 어쩐지 부족한 느낌이 든다. 이 단어의 명사형인 ‘Convivialité’라는 표현은 법학자이자 미식 평론가인 브리야 사바랭(Brillat Savarin)이 쓴 « 맛의 생리학(Physiologie du goût),1835»이라는 책에 처음 등장했다. 여기서 ‘Convivialité’란, ‘함께 사는 즐거움, 식탁을 둘러싼 친교와 소통을 맺기 위해 필요한 균형을 찾는 즐거움’이다. 단어의 유래가 ‘함께하는 식사’를 의미하는 라틴어 Convivium인 것을 생각하면 그 의미를 쉽게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프랑스인들은 그들의 삶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이 ‘Convivialité’를 아주 자랑스럽게 여긴다. 식탁에서 함께 먹고 마시며 떠들고 서로의 안부를 물으며 관계 맺는 행위는 그들의 삶을 지속시키게 하는 필수 불가결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카페와 레스토랑 출입을 금지한 조치에 마치 생존권이라도 잃은 것 마냥 시위를 하는, 때로는 정말 어처구니가 없는 모습을 보이니 말이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에게 ‘밥은 먹었고?’라고 묻는 우리가 식탁을 마주하고 함께하는 즐거움을 그들보다 모를 리 없다. 여름날, 늘 열려 있는 안마당에 평상을 깔고 옥수수고 참외고 할 것 없이 무엇이든 나누어 먹으며 서로 소통하고 이해하며 살았던 우리 조상들의 모습에서 나타난, 우리식의 음식을 통한 정 문화가 프랑스의 그것과 다르지 않다.

누군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일상의 균형이란, ‘함께 하고픈 욕구’와 ‘혼자 있고 싶음’ 사이의 문제라고. 그것이 지금의 코로나 시대에는 붙어 있어야 할 때와 떨어져 있어야 할 때를 구분할 줄 알아야 하는 책임이 더해진 균형에 이르렀으니 여러 가지로 참 힘든 일이다.

일주일이 지난 후 우리의 생활지침은 또 어떻게 달라져 있을까? ‘당분간의 흩어짐’만이 ‘함께 하는 즐거움’을 되찾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인 것만은 확실한 것 같다.

▲ 송 정 하

법대를 나왔지만 와인이 들려주는 이야기가 좋아 프랑스 보르도로 떠났다. 보르도 CAFA에서 CES(Conseiller en sommellerie:소믈리에컨설턴트 국가공인자격증), 파리 Le COAM에서 WSET Level 3를 취득했다. 사람이 주인공인 따뜻한 와인이야기를 쓰고 싶다.

소믈리에타임즈 칼럼니스트 송정하 noellesong0520@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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