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69년 출시된 애플와인 '파라다이스' <사진=국립민속박물관>

해방 후 우리나라의 와인은 1969년 애플와인 ‘파라다이스’가 나오면서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당시는 포도주스와 주정을 섞어서 만든 값싼 과실주가 있을 뿐이었고, 값비싼 과일을 100 % 함유한 술을 만든다는 발상 자체가 나오기 힘든 때였지만, 경양식 붐과 더불어 대학생들 사이에서 인기를 끌면서 우리나라도 과실주가 될 수 있다는 사례를 보여 주었다. 그리고 정부에서도 식량부족을 이유로 쌀로 만든 술보다는 과일로 만든 술을 장려하였기 때문에 대기업이 참여하면서, 1974년에는 제과업체인 해태에서 ‘노블와인’이라는 최초의 포도로 만든 와인이 출시되었고, 1977년 맥주업체인 OB는 지금까지도 그 이름이 남아있는 ‘마주앙’을 내놓아 와인이 대중 속으로 파고들기 시작하였다. 이어서 진로의 ‘샤토 몽블르’, 금복주의 ‘두리랑’, 대선주조의 ‘그랑주아’ 등이 나오면서 우리나라 와인제조의 전성시대를 구가하게 된다.

1980년대는 매년 10-30%씩 와인시장이 성장하면서 1988년 최고의 성장을 기록하지만, 미처 우리 풍토에 맞는 품종을 개발하거나, 양조기술을 확립하지도 못한 상태에서 외국산 와인이 수입되면서 국산 와인은 설 자리를 잃고 말았다. 대기업이 주도하여 일으킨 와인시장이지만, 이들은 와인에 대한 뚜렷한 철학이나 장기적인 비전을 생각하지도 않고, 제조원가를 따져서 수익성이 없는 품목은 과감하게 정리하다 보니까 하나 둘 슬슬 자취를 감추기 시작한 것이다.

1900년대 말부터 우리나라 와인은 ‘지역특산주’라는 이름으로 부활하여 남다른 정렬과 패기를 가지고 열심히 하지만, 양조에 대한 전문적인 지식을 갖춘 사람이 많지 않다. 나름대로 연구와 외국연수 등을 통하여 자체 기술을 보유하고 있는 사람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원하는 성격과 품질을 가진 와인을 만들려면 포도가 어떻게 자라고, 환경과 어떻게 반응하는지 그리고 와인 생산의 생물학적 화학적인 역할에 대한 상당한 이해가 있어야 한다.

좋은 와인이란 하루아침에 만들어지지 않는다.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경험을 쌓아야 제대로 된 와인이 나온다. 김치 담그는 법을 배웠다고 당장 맛있는 김치를 담글 수 없듯이 좋은 와인이 나오려면 시간이 필요하다. 이 시간을 버틸 수 있는 것이 자금이며, 그 시간을 단축할 수 있는 것이 전문지식이다. 가장 어려운 문제이겠지만, 당장의 이익을 접어두고 장기간 우리 와인을 위해 투자를 과감하게 할 수 있는 투자자가 필요하다. 장기적인 안목과 철학을 가진 투자자와 우리 실정에 맞는 와인을 만들겠다는 뚜렷한 의지가 있는 와인 메이커가 만나야 우리 와인의 장래를 보장할 수 있다.

고려대학교 농화학과, 동 대학원 발효화학전공(농학석사), 캘리포니아 주립대학(Freesno) 와인양조학과를 수료했다. 수석농산 와인메이커이자 현재 김준철와인스쿨 원장, 한국와인협회 회장으로 각종 주류 품평회 심사위원 등 많은 활동을 하고 있다.

소믈리에타임즈 칼럼니스트 김준철 winespirit1@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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