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생 운동이란 걸 해 본 적이 없는 사람이 몸에 이상이 있음을 발견하고 그제서야 건강한 사람이 되겠다고 다짐하며 뭔가를 시작하려고 하면, 막상 선택할 수 있는 운동의 종류가 많지 않다는 사실 앞에서 당황하게 된다. 즉 나처럼 목 디스크가 있는 사람에게 고개를 하늘 높이 쳐들어 공을 던지고 손목과 어깻죽지의 힘을 이용해 시원스레 내려치는 테니스나 배드민턴 따위는 꿈도 못 꿀 일이다. 방치되었던 몸이라 그렇다고 목 이외의 다른 부위가 온전 할 리 없으니 이건 이래서 안되고 저건 저래서 안된다.

격렬한 운동이 아니어야 하고 지속 가능할 만큼 지루하지 않아야 하는 것이 무엇이 있을까 하던 중에 내가 택한 것은 그 흔한 걷기 이다. 매일 걷는 이 코스를 정하기 까지는 몇번의 답사를 거쳐야 했다. 최대한 고개를 숙이지 말아야 하는 질병의 특성상 특히 내리막길은 피해야 했는데, 오르막 길이 많은 우리 동네는 돌아오는 중에 필연적으로 내리막길을 동반하고 있어서 코스를 정하는데 애를 먹었다. 다행히 머리를 기분 좋게 꼿꼿이 들 수 있을 만큼의 경사진 오르막길로 시작 해, 옆으로 구불구불 늘어져 내리막을 거의 느낄 수 없을 정도로 평지와 다름 없는, 이상적인 코스를 찾을 수 있었다.

걷기가 다른 운동보다 좋은 점은 세상 구경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는 작은 동네가 늘 그렇듯, 소소하지만 일상을 영위하기 위해 필요한 모든 것들이 골목 골목 숨어 있다. 제법 큰 놀이터와 나무 무늬 간판이 인상적인 카페, 언제 생겼는지 모를 액세서리 공방과 재잘거리는 소리가 끊이지 않는 어린이집, 그리고 늘 치열한 삶의 현장처럼 느껴지는 세탁소까지, 걷는 길이 지루할 수가 없다. 공방 창가를 기웃거리다가 카페에 들어가 책꽂이를 가득 채운 어린이용 역사 만화책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읽기도 하고, 지난 계절의 옷을 맡기기 위해 세탁소에 들르기도 한다. 이쯤 되면 이게 무슨 운동이냐 스스로도 의문이 들긴 하지만 걷는 순간만큼은 고개를 들고 적당히 팔을 휘저으며 열심히 걷는다.

얼마 전엔 걷는 여정에 조금의 변화를 주기 위해 가보지 않은 골목으로 방향을 틀었더니 지금까지 있는 줄도 몰랐던 고등학교가 나왔다. 연두색 철제 펜스 사이로 보이는 운동장은 코로나로 인해 등교가 축소된 탓인지 한창 점심시간임에도 불구하고 적막하기만 했다. 나는 울타리를 붙잡고 운동장과 건물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아, 학교란 얼마나 변함없는 존재인지! 나는 처음 보는 학교 앞에서 금세 시간을 뛰어넘어 고등학교 시절로 돌아감을 느꼈다. 곧 오후 수업을 알리는 벨이 운동장 전체에 울리고 서둘러 계단을 두 칸씩 올라 교복을 휘날리며 교실로 뛰어 들어가야 할 것만 같다. 선생님과 거의 동시에 들어가 자리를 잡고, 숨을 헐떡이며 같이 들어간 친구와 눈을 맞추고는 안도의 한숨을 쉰다. 얼마 안 돼, 밀려오는 졸음을 피하지 못하고 선생님께 들키지 않기 위해 교재로 되지도 않는 장벽을 쌓고 엎드려 잠을 잘 지도 모른다. 이 모든 일이 어제의 일 같다.

뭐가 그리 급했는지 늘 학교 계단을 두세 칸씩 오르내렸었다. 그랬던 내가, 목과 무릎 관절을 보호하겠다고 공들여 짜 낸 코스를 걷던 중, 한 고등학교 앞에서 잠시 멍해진다. 세월이 쏜 화살같이 빠르다는 말이 있지만 이토록 완벽하게 과거와 현재가 뒤엉켜 생생하게 떠오르는 걸 보면, 시간은 흐르지 않고 그저 존재할 뿐이라는, 과학자들의 도통 알 수 없는 이론이 단번에 이해가 되는 것도 같다. 문득 지금은 돌아가신 할머니에게, 천진한 얼굴로 ‘할머니가 어릴 때는 세상이 흑백이었어요?‘라고 묻던 어린 시절의 나와 그런 나를 쳐다보는 할머니의 너그러운 얼굴이 떠올라 마음 한편 이 아리다.

와인병이 그려진 명함을 들고 다니는 사람이 된 나는, 내가 와인이라면 지금 어디쯤 왔는지 한번 생각해 본다. 물론 사람이라면 누구나 잠재적 가능성이 풍부해서 오랜 숙성이 가능한 품종의 와인 혹은 특별히 심혈을 기울여 만들어진 와인이라는 전제에서 말이다. 사는 동안 크고 작은 문제에 부딪혀서 우왕좌왕할 때에 또는 그릇이 작아 여러 사람을 힘들게 하는 사람들을 보면, 향도 맛도 금방 사라져 오래가지 못할 와인 같은 사람도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하지만 내가 생각하기에 인간은 시간의 풍파를 잘 견뎌낼 능력이 있는, 처음부터 잘 만들어진 와인이다.

태어나서 성장하고 진화하며 어느 순간 정점에 이른 성숙 미를 보여준 다음에는 늙고 죽음을 맞이한다는 점에서 와인과 인간은 많은 부분이 비슷하다. 갓 태어난 와인은 신선하고 건강해서 젊은이만큼이나 풋풋하고 활기로 가득하다. 다른 요소와 타협하지 않은 개성 강한 향이, 젊음을 숨기지 않고 대담하게 피어오른다. 자기주장이 강한 이 어린 와인은 때로 지나치게 톡 쏘아 유치하고 반항적인 모습을 보일 때가 있는데, 뭐 어떤가! 젊어서 그런 걸. 그래서 이런 혈기 왕성한 와인을 싫어할 사람은 거의 없다.

나이가 들면 입맛도 변하고 생각도 변하고 많은 것이 변하는데, 잘은 몰라도 이것 역시 아마 과학의 한 부분이고 자연의 순리일 것이다. 산도와 알코올 등 달라진 것이 없는데 시간이 가면서 계속 변하는 와인과 같다. 공격적이고 단순했던 향들은 서로 어우러져 복합적이고 오묘한 향을 만들어 낸다. 튀는 활기는 없지만 차분하고 깊은 향이 은은한 분위기를 준다. 입안에서도 마찬가지다. 젊은 시절의 껄끄럽고 모난 모습은 둥글둥글 해 지고 원만해진다. 자신을 '옥죄던 자의식의 경계가 무너지면서 흐리멍덩 해지고 또 편안해지는'[김훈(2021), 『연필로 쓰기』의 <늙기와 죽기> 중에서, (문학동네)] 인간의 나이 듦과 같이 말이다. 알 수 없는 향으로 무장한 이 안정감을 누구나 좋아하진 않을 것이다. 그래서 이 와인은 그 진가를 알아봐 줄 사람이 필요하다.

그래서 나는 지금 어느 상태인가. 몸 여기저기 손 볼 곳이 많아지고 상대와 상황을 봐 가며 타협할 줄도 알게 됐으니 젊고 풋풋한 와인의 시기가 지났음은 분명하다. 그렇다고 내 안의 모든 것을 잘 다스려 아름다운 하모니를 이루고, 서로 사이좋게 지내는 지경에 이르지는 못 했으니 아직 잘 숙성된 와인이 아님도 분명하다. 모든 것이 잘 녹아들어 새로운 향의 세계가 펼쳐지는 와인이 되는 것은 꿈처럼 불가능 한 일일까.

자신이 얼마나 오래됐는지를 자랑하기 위해 ‘리제르바(Reserva)’, ‘그란 리제르바(Gran Reserva)‘ 따위의 라벨을 훈장처럼 달고 다니는 스페인 와인처럼, 언젠가는 살아온 세월과 경험을 자랑스레 내 보일 날이 오면 좋겠다. 그리고 그것이 존중받는 사회가 되었으면 한다. 그러나 나로 말하자면, 그것이 언제까지나 ‘언젠가’의 일이었으면 좋겠다. 

젊음이 좋다. 계단을 두세 칸씩 오르며 가로 뛰고 세로 뛰던 그 혈기가 그립다. 오늘만 살 것처럼 밤새워 놀던 그때가 그립다. 한번 책상 앞에 앉으면 3시간은 후딱 지나가곤 했던 그 집중력과 체력, 체벌을 하는 선생님 앞에서 눈치 없이 친구 편을 들어 매를 벌었던 그 시절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사방으로 발산하는 그 일차원적인 향을 회복할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 청춘! 듣기만 해도 가슴이 설렌다 <그림=송정하>

프랑스의 양조 업자, 에밀 페노(Emile Peynaud)는 와인의 나이 듦에 관하여 이렇게 말했다.

“숙성할 수 있다는 것은 오랫동안 젊음의 미덕을 유지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잘 만들어진 와인이란 이렇듯 신선함을 잃지 않는 와인이다. 젊을 적의 신선한 과일 향이 완전히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다양한 향과 맛의 형태로 옷을 갈아입을 뿐이다. 나이가 들어도 생기를 잃지 않고 투명하며 새로운 맛을 보여준다. 그래서 지루하지 않다.

시간이 흘러도 신맛이 날카롭게 살아있는 와인이 되고 싶다. 번득이는 총기와 활기를 잃지 않고 건강한 사람이 되고 싶다. 그러기 위해서는 해야 할 것이 많다. 서늘하고 어두운 저장고에 놔둬야 하고 끊임없이 온도와 습도를 살펴야 하며, 오랜 세월의 흔적으로 침전물 알갱이가 생기면 가라앉혀야 하고, 때로는 코르크를 갈아주기도 해야 하는 와인처럼 말이다. 나는 우선 오늘도 힘차게 걸을 것이다.
 

▲ 송 정 하

법대를 나왔지만 와인이 들려주는 이야기가 좋아 프랑스 보르도로 떠났다. 보르도 CAFA에서 CES(Conseiller en sommellerie:소믈리에컨설턴트 국가공인자격증), 파리 Le COAM에서 WSET Level 3를 취득했다. 사람이 주인공인 따뜻한 와인이야기를 쓰고 싶다.

소믈리에타임즈 칼럼니스트 송정하 noellesong0520@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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