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니스트 조태경] 수확의 계절 가을이다. 따가운 가을 볕에 쌀, 밀, 사과, 배, 감 등 햇과일, 햇곡식이 잘 여물였을 것이다. 벌써 찬 바람이 분다. 오는 11월 셋째 주 목요일을 손꼽아 기다리는 이들도 있다. 보졸레 지방에서 그 해 수확한 포도품종 갸메를 이용해 누보방식으로 양조한 포도주를 맛보기 위해서다. 6개월 장기숙성에서 오는 깊은 맛과 부케 대신에 싱그러운 과일, 흰 꽃과 같은 신선한 아로마가 보졸레 누보의 특징적인 향기다.

우리술에도 햅쌀로 빚는 술, 신도주가 있다. 새로울 신(新), 벼 도(稻), 술 주(酒) 글자 그대로 그 해 수확한 첫 곡식을 이용해 빚는 술이다. 신도주 빚는 방법은 조선시대 중엽 문헌인 <양주방>에 수록되어 있으며 다음과 같다. ‘먼저, 햅쌀을 가루내어 백설기를 찐다. 독에 끓인 물을 붓고 한 김 식힌 따뜻한 백설기를 독에 넣어 골고루 풀어준다. 다음날 햇누룩과 밀가루를 백설기 푼 물에 버무려 다시 독에 넣고 발효시킨다. 3일 후, 햅쌀 고두밥을 쪄 발효시킨 백설기로 빚은 밑술과 끓인 물과 버무려 10일 후 맑게 익으면 마신다.’고 기록되어 있다.
 

▲ 백설기를 쪄서 식히는 모습

양주방에 수록된 신도주를 빚어보지는 않았으나, 술 빚기 방법과 재료 선택에서 오는 술맛의 특징을 고려하면 이 술의 맛과 향기를 대략 헤아릴 수 있을 것 같다. 남녀노소 누구나 좋아하는 감칠맛은 백설기로 빚는 술의 특징으로 덧술에 날콩이 들어가 한층 고소한 향을 더한 한산지방의 소곡주나 조선시대 주막에서 빚어 팔았던 방문주도 그 중 하나다. 누룩은 재료와 시기에 따라서 특성과 품질이 결정되는데 햇누룩이라 하였다. 일반적으로 밀누룩을 생각해볼 때, 햇밀로 띄운 누룩을 이용해 빚은 술에서는 오래 묵은 향기보다는 신선한 아로마를 얻을 수 있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리고 때는 바야흐로 가을, 가을에 띄운 누룩의 품질은 다른 계절보다 월등히 뛰어나 ‘절곡(節曲)’이라 했으니, 가을누룩으로 빚은 신도주의 품질도 더불어 뛰어났을 것이다. 햅쌀로 빚어 깨끗하고 약간의 산미는 톡 쏘는 듯한 맛을 주었을 텐데, 이는 밀가루를 첨가하는 술 빚기에서 오는 특징이라 할 수 있다. 또한 밀가루는 응집 작용이 뛰어나 맑은 술을 얻는데 효과적이다. 따라서 <양주방>의 신도주는 깨끗하고 신선한 맛에 감칠맛까지 뛰어난 청주로 짐작할 수 있다.

그렇다고, 신도주가 반드시 백설기로 빚느냐하면 그렇지는 않다. 보졸레 누보가 싱그러운 과일 향기를 얻기 위해 포도알을 으깨지 않고 그대로 3~5일 정도 발효통에 두고 부분적인 발효를 진행하는 발효방식을 따르는 것에서 이름 붙여졌다면, 우리술 신도주는 잘 여문 쌀을 고르고 가을에 띄운 품질 좋은 누룩을 이용해 정성껏 빚는 술 빚는 마음가짐에서 온 것이라 생각된다. 집집마다 첫 수확한 쌀로 빚은 신도주는 햇과일과 함께 추석 차례에 올려 졌으니, 정성을 다해 빚은 절기주로 보졸레 누보와 같이 년 중 첫 번째로 빚기 시작하는 술이라는 점에서도 그 의미를 되새겨 볼 수 있을 것이다.

몇몇 양조장에서 햅쌀로 빚은 막걸리 한정판이 나오기도 하는 시기가 이 맘 때쯤 일 것이다. 판매 전략에서라기보다는 좀 더 정성을 들여 빚은 신선한 맛과 향기의 막걸리를 맛보고 싶다면 지금 근처 슈퍼마켓으로 가자, 아니면 주말 양조장 여행도 좋을 것이다. 주말 저녁 가족과 함께 뜨거운 국물 후후 불어가며 햅쌀 막걸리 한잔으로 도란도란 얘기 꽃을 피우면 어떨까?

와인 양조 과정의 핵심인 발효에서는 두가지 중요한 일이 일어난다. 포도알에 포함된 당분이 효모의 작용으로 알코올로 바뀌는 '발효'(Fermentation)와 포도 껍질에 포함된 색소와 탄닌을 우려내는 '침용'(Maceration)이다. 대부분의 와인은 포도를 수확한 후 으깨어지고 줄기가 제거된 후 거대한 오크나 스테인리스, 또는 콘크리트 통에서 발효된다. 발효가 끝나면 6개월 이상 장기간의 숙성 과정에 들어간다.

그러나 보졸레누보는 그만의 독특한 발효 시스템을 갖고 있다. 탄산 침용법(Carbonic Maceration)이 그것이다. 보졸레누보 원료 품종인 가메(Gamay)의 특징에 맞춰진 방식이다.

탄산 침용법은 수확한 포도를 송이째 밀폐된 탱크에 넣고 5일 내외의 기간 동안 발효와 침용을 동시에 일으킨다. 와이너리에 따라 탱크에 이산화탄소를 인공적으로 채우기도 하고 발효 과정에서 자연적으로 발생하는 이산화탄소를 이용하기도 한다. 쌓인 포도는 포도 자체의 무게와 가스로 인한 압력으로 인해 밑에서부터 으깨어지고 포도즙이 흘러 나온다. 예정된 날짜가 되면 탱크 속에 남은 포도를 프레스로 압착해 원액을 뽑아내고 이들을 모두 섞는다. 전통적인 발효법과 탄산 침용법을 혼용한 '세미 탄산 침용법'을 쓰기도 한다.

짧은 기간동안 이루어지기 때문에 껍질의 색소는 그리 많이 추출되지 않는다. 그래서 보졸레누보는 분홍빛을 띈 적자색을 보인다. 알코올 도수도 높지 않다. 탄닌도 적어 떯은 맛이 약하다.

이렇게 만들어진 원액을 오크통에 넣고 5주 동안의 숙성을 거친다. 통에 잠깐 머무르기 때문에 부케(오크향 등 숙성 기간에 스며드는 향기)는 거의 없다. 대신 포도 자체가 가진 향, 즉 아로마가 강하다. 블루베리나 복숭아 등 과일향과 꽃향기가 풍부하다.

▲ 조태경 전통주큐레이터

[칼럼니스트 소개] 전통주 소믈리에 조태경은 대학원에서 전통식문화와 전통음식을 공부했고 현재는 사)한국전통주연구소에 재직해 전통주를 배우며 관련분야에서 활동하고 있다. 대학원 재학 중에 사회적 기업과 슬로푸드 운동에 관심을 가진 것을 계기로 나눔과 공유할 수 있는 삶을 고민하고 있다.

2008년 한국국제소믈리에협회 인증 ‘마스터소믈리에자격’을 취득하였고 식음료에 관심을 가지고 바리스타 및 한식, 일식 등의 자격증도 이후 취득하였다. 2015 유네스코 지정 강릉단오제 신주빚기대회에서 ‘연화주’로 장려상을 수상한 바 있다.

칼럼문의 조태경 전통주큐레이터 eblline@sommelier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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