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이 밝으니 뭇 별들 희미해지고

술잔 앞에 놓고 노래하나니
사람이 살면 얼마나 살랴?
마치 아침이슬 같지만
떠나는 날 괴로움은 더 많지.

개탄하는 마음 응당 울분에 찬 노래로 불러야 하리니
수심은 잊기 어렵구나.
근심을 어떻게 풀까?
그저 술이나 마시는 수밖에!

푸르구나, 그대의 옷깃이여!
하염없어라, 내 마음이여!
오로지 그대 때문에
지금까지 깊은 생각에 잠겨 있다오.

우우! 사슴이 울며
들판의 쑥대를 먹네.
내게 멋진 손님 있어
거문고 타고 생황 불며 잔치 벌이지.

달처럼 밝은 그를
언제나 얻을 수 있을까?
가슴에서 피어나는 시름
끊어버릴 수 없구나.

뒤얽힌 길을 지나
문안하러 왕림해주셨구나.
오랜 그리움 얘기하며 잔치 벌이니
옛날의 은혜 마음으로 떠올리지.

달이 밝으니 별들은 흐려지고
까막까치들 남으로 날아가는구나.
나무 주위를 빙빙 돌아보지만
의지할 만한 가지는 어디 있는가?

산은 높은 것을 싫어하지 않고
바다는 깊은 것을 싫어하지 않지.
주공은 아랫사람들에게 예의 지켜 대해주어
천하가 그에게 마음으로 귀의했었지!

 

對酒當歌, 人生幾何.
譬如朝露, 去日苦多.
慨當以慷, 憂思難忘.
何以解憂, 唯有杜康.

靑靑子衿, 悠悠我心.
但爲君故, 沈吟至今.
呦呦鹿鳴, 食野之苹.
我有嘉賓, 鼓瑟吹笙.

明明如月, 何時可掇.
憂從中來, 不可斷絶.
越陌度阡, 枉用相存.
契闊談讌, 心念舊恩.

月明星稀, 烏鵲南飛.
繞樹三帀, 何枝可依.
山不厭高, 海不厭深.
周公吐哺, 天下歸心.

 

조조(曹操: 155~220, 자는 孟德)의 〈단가행(短歌行)〉으로 2수(首) 가운데 제1수이다. 제목과는 달리 분량이 제법 긴 이 작품은 중국 고전시를 대표하는 5언시와 7언시의 형식이 확립되기 전에 지은, 《시경》의 흔적이 뚜렷한 4언시이다. 원래 〈단가행〉은 동한 악부(樂府) 가운데 〈상화가사(相和歌辭)〉 “평조곡(平調曲)”에 속한 악곡의 제목으로, 당시에 수집된 같은 제목의 노래만 하더라도 24편이나 된다. 그 가운데 조조의 이 노래는 가장 시기가 빠른 작품으로 여겨지고 있다.

작품 가운데 일단 “푸르구나, 그대의 옷깃이여! 하염없어라, 내 마음이여![靑靑子衿, 悠悠我心]”라는 구절은 《시경》 〈정풍(鄭風)〉 〈그대의 옷깃[子衿]〉에 들어 있는 구절이다. 원작은 젊은 아가씨가 사랑하는 남자를 그리는 내용인데, 여기서는 학식을 갖춘 인재를 기다리는 간절한 마음을 나타내기 위해 인용되었다. 원작에서는 바로 뒷부분에 “설령 내가 찾아가지 않는다 하더라도, 당신은 왜 소식조차 없는 건가요?[縱我不往, 子寧不嗣音]”라는 구절이 이어져 있는데, 조조는 이 부분을 생략하여 교묘한 은유의 효과를 이뤄내고 있다.

그 다음에 인용된 《시경》 〈소아(小雅)〉의 〈사슴이 울다[鹿鳴]〉는 네 구절을 인용하고 있다는 사실과 대비해보면 그의 의도가 한층 뚜렷해진다. 〈사슴이 울다〉에서 인용한 부분은 “우우! 사슴이 울며 들판의 쑥대를 먹네. 내게 멋진 손님 있어 거문고 타고 생황 불며 잔치 벌이지.[呦呦鹿鳴, 食野之苹. 我有嘉賓, 鼓瑟吹笙]”까지이다. 이 작품에 대해서는 역대로 상반된 견해가 많지만 개중에 유력한 해설 가운데 하나는 이것이 군주와 신하 사이의 신분적 위계질서가 분명한 가운데 종족(宗族)의 단결을 찬미하는 풍성한 잔치의 모습을 묘사한 작품이라는 것이다. 〈단가행〉에서도 이 부분은 긍정적인 의미로 인용된 것이 분명해 보이기 때문에 이와 같이 이해해도 무방할 듯하다.

이 다음에는 훌륭한 인재를 구하려는 간절한 바람을 가진 자신에게 오랫동안 헤어져 있던 인재들이 먼 길을 달려 찾아와 문안해준 것을 감사하고 잔치를 벌인 내용과 밝고 큰 영웅의 기개에 무색해진 별들처럼 기댈 곳 없는 인재들을 암시하는 까막까치들에게 보금자리를 제공할 수 있는 튼튼한 가지와 같은 자신의 기반, 그리고 높은 산과 깊고 큰 바다처럼 포용력으로 인재를 받아들일 수 있는 자신의 크기를 자랑한다. “바다는 물을 마다하지 않아서 그렇게 크게 되었고, 산은 흙을 마다하지 않아서 그렇게 높게 되었고, 현명한 군주는 사람을 싫어하지 않아서 그렇게 많은 사람이 따르게 했다.”(《管子》 〈形解〉: “海不辭水, 故能成其大, 山不辭土, 故能成其高, 明主不厭人, 故能成其衆.”)고 하지 않았던가! 그리고 마지막으로 밥을 먹다가도 손님이 찾아오면 입 안에 있던 것을 뱉어내고 서둘러 의관을 갖추어 정중하게 맞이했던 주공(周公)처럼 자신보다 신분이 낮은 사람이라도 예의에 맞춰 대함으로써 천하의 인심이 자신에게 돌아와 의지하기를 바라는 마음을 나타냈다.

종합하자면 이 시는 풍부한 서정과 상당히 뛰어난 문학적 수사법을 통해 조조 자신의 정치적 이상을 표현한 걸작이라고 할 수 있겠다.

소설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의 영향으로 조조는 전형적으로 비열한 간웅(奸雄)이라는 이미지에서 벗어나기 어렵게 되어버렸다. 물론 동한 말엽이라는 난세의 군사 전략가이자 정치가로서 자신의 안위를 지키고 출세하기 위해서는 누구라도 상당한 책략과 속임수를 쓰지 않으면 안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삼국지연의》의 저자는 똑같은 지모와 속임수라도 제갈량(諸葛亮) 등의 그것은 기발하지만 광명정대한 것처럼 서술하고, 조조의 거의 모든 행위에는 ‘위선(僞善)’이라는 딱지를 붙여버렸다. 그리고 이 소설의 인기에 힘입어 민간에서 조조는 역사의 승리자임에도 불구하고 사악한 인물로 낙인이 찍혀버렸다.

하지만 객관적으로 보았을 때 그는 동한 말엽 건안(建安: 196~220) 시기에 정치와 문화를 주도하면서 대단히 뛰어난 업적을 남겼다. 환관 집안의 후손이라는 사실상 ‘비천한’ 신분에서 출발하여 ‘승상(丞相)’이라는 ‘일인지하, 만인지상(一人之下, 萬人之上)’의 권력과 재력을 지닌 그의 후원에 힘입어 활발하게 활동한 이른바 ‘건안칠자(建安七子)’──왕찬(王粲: 177~217, 자[字]는 중선[仲宣])과 진림(陳琳: ?~217, 자는 공장[孔璋]), 서간(徐干: 170~217, 자는 위장[偉長]), 유정(劉楨: 186~217, 자는 공간[公干]), 응창(應瑒: 177~217, 자는 덕련[德璉]), 공융(孔融: 153~208, 자는 문거[文擧]), 완우(阮瑀: 165?~212, 자는 원유[元瑜])──는 중국 시문학의 발전에 중요한 기반을 다져놓았다.

그리고 그 자신은 물론 두 아들인 조비(曹丕)와 조식(曹植)도 뛰어난 시인이자 이론가로 활약하며 이러한 발전에 유력한 힘을 보탰다. 무엇보다도 그가 위(魏)나라를 중심으로 추진했던 ‘구품중정제(九品中正制)’라는 새로운 관료 선발 제도는 재능과 학식보다 도덕적 인품을 중시하던 기존의 ‘찰거제(察擧制)’가 지닌 문제점을 보완하여 개성과 재능을 갖춘 인재를 중시함으로써 이후 남북조시기에 문학을 비롯한 예술과 학술, 철학 등의 광범한 분야에서 획기적인 발전을 추진하는 촉발제가 되었다. 남북조시기 중국 지식인 사회에 크게 유행했던 ‘명사(名士)’ 기풍은 바로 남다른 개성을 중시하는 사회 분위기가 만들어낸 독특한 문화 현상이었던 것이다.

이렇듯 정치와 군사, 문화를 주도하는 책임자로서 조조의 사명감과 원대한 포부는 그가 지은 여러 작품들에서 고루 나타나는데, 예술적인 면은 논외로 하고 그 안에 담긴 조조의 사상만 놓고 볼 때 이 〈단가행〉과 짝을 이룰 만한 작품이 바로 〈술잔 앞에서[對酒]〉이다.


술잔 앞에서 노래하노라!
태평한 시절이라
대문 앞에서 소리치는 아전도 없지.

군주는 어질고 현명하며
재상과 측근들은 모두 충성스럽고 현량하지.
모두들 예절 차려 겸양하고
백성들은 소송으로 다툴 일 없지.

3년 농사지으면 9년 몫의 수확을 하니
창고에는 곡식이 가득하지.
늙은이는 짐 지고 다닐 필요도 없지.

비가 이렇듯 풍성히 내리니
모든 곡식 잘 자라지.
말을 달리면
그 배설물로 좋은 밭에 거름을 주지.

제후를 비롯한 고관대작들
모두 그 백성을 사랑하여
관리를 내쫓고 승진시킴에 공정한 원칙이 있지.

자식은 부모 형제 공경하도록 가르치지.
예법을 어기더라도
경중에 따라 형벌을 내리니
길에는 남이 흘린 물건 주워 가는 이도 없지.

감옥은 텅 비고
동지에도 계속 이어지지.

사람들은 8, 90살까지
모두 천수를 누릴 수 있나니
은덕이 초목과 곤충에게까지 널리 미치지!

 

對酒歌, 太平時, 吏不呼門.
王者賢且明, 宰相股肱皆忠良.

咸禮讓, 民無所爭訟.
三年耕有九年儲, 倉穀滿盈.

斑白不負戴.
雨澤如此, 百穀用成.
卻走馬, 以糞其上田.

爵公侯伯子男, 咸愛其民, 以黜陟幽明.

子養有若父與兄.
犯禮法, 輕重隨其刑.

路無拾遺之私.
囹圄空虛, 冬節不斷.
人耄耋, 皆得以壽終.
恩德廣及草木昆蟲.

 

유토피아 같은 태평성대에 대한 상상이다. 가뭄과 홍수 가은 자연재해로 인한 기근과 전란, 관리의 부패로 인해 민생이 파탄에 이르렀던 동한 말엽의 상황에서 이런 상상은 너무나 비현실적이고 심지어 반(反) 현실적이라고 할 만하다. 그러나 혼란을 종식시키고 평안한 정국에서 백성의 복지를 꿈꾸는 것은 ‘승상’ 조조에게는 하루, 아니 한시도 잊지 못할 책임감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분란이 가라앉을 기미가 보이기는커녕 점점 삼국 분립의 형국으로 치닫고, 그 와중에 조정은 나날이 부패해가고 백성의 삶은 바닥이 보이지 않는 현실의 정세는 울분을 넘어서 절망에 가까워진다.

필자가 보기에 이 〈술잔 앞에서〉는 바로 이런 착잡하기 그지없는 상황에서 시름을 잊기 위해 만취에 가깝게 술을 마친 조조가 심장을 쥐어짜며 외친 비명이자 노호(怒號)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이 작품의 희망적이고 긍정에 찬 어휘들 사이사이로 뚝뚝 떨어지는 피 냄새를 맡을 수 있다. 이 작품은 심지어 〈단가행〉과 같은 소박한 문학적 기교조차 없어서, 마치 그대로 내던져진 살코기를 대하는 듯한 섬뜩한 인상을 풍긴다.

이 모두가 술 때문일까? 비록 공융의 반대로 무산되고 말았지만, 어쩌면 조조가 한때 금주령(禁酒令)을 내리려고 했던 것은 단순히 그 해에 기근이 들었는데 군사를 일으켜야 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만은 아닌 듯하다.

사족(蛇足)이지만 공융은 사사건건 조조에게 대들기로 유명했던 인물로서, 금주령을 두고 맞붙은 것은 여러 극적인 사건들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어쨌든 당(唐)나라 때 장회태자(章懷太子) 이현(李賢: 655~684)의 주도로 이루어진 《후한서》의 주석에는 공융이 조조의 금주령에 반대하면서 쓴 글이 인용되어 있는데, 거기에는 다음과 같은 독설이 들어 있다: “하(夏)나라와 상(商)나라도 아낙 때문에 천하를 잃었는데, 지금 혼인을 하지 말라는 명령은 내리지 않고 술만 시급하게 생각하는 것은 혹시 그저 곡식이 아까워서가 아닙니까?” 결국 공융은 ‘불효(不孝)’라는 조금 억지스러운 죄명을 뒤집어쓰고 조조에 의해 피살당하고 말았다.
 

▲ 백운재 교수

[칼럼니스트 소개] 백운재(필명)교수는 서울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문학박사(1999)를 취득했으며 현재 인제대학교 중국학부 교수로 재직중이다. 하늘을 나는 수레(2003), 한시에서 배우는 마음경영(2010), 전통시기 중국의 서사론(2004)등의 저서와 두보, 이하 등의 중국 시와 베이징(1997), 서유기(2004), 홍루몽(2012), 유림외사(2009), 양주화방록(2010)등 다수의 저서와 역서가 있다.
칼럼관련문의 백운재 peking0074@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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