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에서 와인을 마신다는 것, 머리로 마시지 말고 즐겨라 <사진=소믈리에타임즈 DB>

와인을 먼저 공부했다는 의무감에 가끔씩 와인 관련 글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거짓말도 자주 하면 늘듯이 글을 쓰다 보니 조금씩 관성이 붙어서 그만해야지 하면서도 또 쓰게 됩니다.

머리로 마시지 말고 즐겨라,
눈치 빠른 분은 알아채셨겠지만, 이 말이 하고 싶었던 거지요.
와인 공부, 와인잔의 선택, 와인 매너, 물론 다 중요합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과유불급이라고 세상사가 지나치면 모자란 것보다 못 합니다.
유럽에서 20년쯤 살아봤으니 서로의 차이를 말할 자격은 있겠지요?
서양 사람들 모임에서는 와인이 거의 함께 한다고 보면 틀리지 않습니다.

와인은 그냥 소통의 수단이라고 언젠가 글을 올린 기억이 있는데, 사실입니다.
대화중에 와인의 향이 어떻고, 품종이 뭐고, 등급이 뭔지는 관심이 없습니다. 잔을 제대로 갖춘 집도 거의 없습니다.

옆집 개가 새끼를 낳았다는 이야기, 같이 사는 남자가 바람이 났다는 이야기, 올여름에 갔던 여행지 이야기, 이런 시시한 사람 사는 이야기가 대부분입니다.

맛난 음식 서로 가지고 와서 나누어 먹고, 시장에서 산 됫병 와인 하나 들고 와서 그냥 머그잔에 따라 마시고, 떠들고 노는 것이 파티입니다.

우리나라에 와서 초대를 받아 가는 일이 자주 있는데, 고백하건데, 단 한 번도 마음 내려놓고 와인을 즐긴 적이 없습니다.
이건 무슨 와인 한 병 갖다 놓고 종교의식 거행하는 수준입니다.

주인은 디켄터에 와인을 부어놓고는 조심스러운 표정으로 저에게 한마디 개회사를 부탁합니다. 이럴 때마다 난감합니다.

가수 불러놓고 노래 한자락 하라는 것과 진배없지요.
이런 식이면 어깨에 힘들어가서 즐겁게 즐기는 거는 물 건너갑니다.
참석자들은 잔을 돌려야 하는지, 좌로 돌리는지, 우로 돌리는지, 눈치를 슬슬 보기 시작합니다.

대부분의 경우에 디켄팅은 필요가 없습니다.
와인잔은 대형마트에 가서 6개에 2만 원쯤 하는 와인 잔 세트 하나 구입하시면 충분합니다.

처음부터 리델이니, 잘토니, 슈피겔라우니 하는 명품잔 다 필요 없습니다.
운동을 시작하더라도 풀세트를 갖춘 다음에 시작하는 분들도 있죠..

물론 좋은 와인잔은 사용하면 일단 기분이 좋습니다.
그리고 향도 분명하게 느낄 수가 있습니다.
나중에 더 예민한 향을 즐기고 싶으면 그때 가서 구입하면 됩니다.

개인의 취향이고 선택입니다.

마시고는 블랙커런트니, 감초향이니, 흙냄새니,
한마디 해야 할 의무감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제발 그러지 마십시오.
인간은 누구나 후각세포가 있고, 미각이 있고 느낀 것을 말할 수가 있습니다.
와 닿지도, 자신도 잘 모르는 단어를 말한다고 뭐가 달라지지는 않습니다.
개인적으로 어려운 글들도 좋아하지 않습니다.
대부분의 경우에 쓰는 자신도 모르는 내용이 대부분일 때가 많습니다.
소싯적에 연애 좀 잘하려고 에리히 프롬의 "사랑의 기술"을 수십 번 읽었는데, 결과는 참담했답니다.

그녀가 떠난 다음에야 깨달았습니다.

사랑은 가슴으로 하는 거지 머리로 하는 것이 아니라는 걸, 와인이 그렇습니다.
그냥 당신의 예민한 오감에 맡게 두세요.
말하지 않아도 당신의 오감이 느끼면 그만입니다.

유럽에서 디플롬 소믈리에 최종시험 볼 때의 이야기입니다.
3차 시음 시험에서 두 번을 떨어졌습니다.
기회는 마지막 단 한번 이였습니다. 아무래도 남의 나라말로 표현하려니 표현에 한계가 있었습니다. 혼자서 들어가서 6명의 시험관들 앞에서 선택된 와인의 향을 표현해야 했습니다.

그날의 와인에서는 흙냄새가 나더군요.
제가 설명했습니다.

"어릴 때 시골 외가에 놀러 갔습니다.
점심을 배불리 먹고 마당 평상에서 외할머니의 무릎을 베고 잠이 들었습니다.
갑자기 여름 소나기가 내리기 시작했고, 멀리서 밀려오는 흙먼지 냄새에 잠을 깼답니다. 이 와인에서는 그때의 흙냄새가 나네요"

결과는? 합격이었습니다.
한 해에 단 8명 뽑는 시험에 말입니다.

▲ 정서나 문화는 하루아침에 체화되지 않습니다 <사진=소믈리에타임즈 DB>

정서나 문화는 하루아침에 체화되지 않습니다.
와인은 서양문화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정서적 DNA를 물려받았습니다.
와인을 마셔야 할 의무감 때문에 와인을 마실 필요는 없습니다.
다만 우리 식으로 마시고 즐기고 표현하면 됩니다.
그런데 와인은 확실히 매력이 있습니다.

의학도의 길까지 포기할 정도로 말입니다.
 

▲ 권기훈 교수

[칼럼니스트 소개] 권기훈은 오스트리아 빈 국립의대를 다녔고, 와인의 매력에 빠져 오스트리아 국가공인 Dip.Sommelier자격을 취득하였다. 이후 영국 WSET, 프랑스 보르도 CAFA등 에서 공부하고 귀국. 마산대학교 교수, 국가인재원객원교수, 국제음료학회이사를 지냈으며, 청와대, 국립외교원, 기업, 방송 등에서 와인강좌를 진행하였다.

소믈리에타임즈 칼럼 권기훈 a9004979@naver.com

저작권자 © 소믈리에타임즈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