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르크 마개의 발달과 압력에 견딜 수 있는 유리가 개발되면서 샴페인은 빠르게 거대한 와인 산업에 포함되기 시작했으며 메이저 브랜드들은 국제적인 명성을 쌓기 시작했다. 상파뉴의 개인 포도 재배자들은 값비싼 샴페인 제조공정을 감당할 수 없었고 때문에 대형 샴페인 하우스에 그들의 포도를 팔았다. 샴페인 생산량은 1800년 300,000 병에서 1883년 36,000,000 병으로 늘어났으며 포므리(Pommery)가 첫 번째 브뤼(Brut) 샴페인을 네이처(Nature)란 이름으로 1874년 시장에 내놓았다.
 

▲ 1874년 출시된 네이쳐 샴페인, 포므리(Pommery) 와이너리에 한 병이 보관되어있다. <사진=포므리 와이너리 홈페이지>

1908년 프랑스 정부는 상파뉴 지역을 구분했으며 여기에 더해서 와인 생산과 포도재배에 대해서 1927년에 정의했다. 남부에 위치한 오브(Aube) 지역은 1911년 샴페인 생산지에서 제외되었으나 1927년 다시 포함되었다. 이 때문에 1927년에 상파뉴에서 샴페인 양조용 포도를 재배할 수 있는 마을을 319개에서 357개로 확대됐다. 1935년 재배자와 중개인의 컨소시엄인 커미션 드 살롱(Commission de Chalons)은 샴페인의 퀄리티를 높이기 위한 기준을 만들었으며 가격을 조정 했다. 1936년 샴페인은 AOC(AOP)로 지정되었는데 레이블에 AOC(AOP)명을 표시하지 않아도 된다.샴페인은 러시아의 차르 황제(Tsars), 벨기에와 그리스 왕, 많은 영국 귀족들에게 팔려나갔으며 오랜 기간 동안 고급 기호식품으로서 프랑스 귀족과 명품 회사들과 관계를 맺어왔다. 샴페인의 화려한 마케팅은 여성, 레저, 스포츠, 역사 등과 연계되어 있으며 샴페인과 샴페인이 가지고 있는 이미지는 여전히 땔 수 없는 관계에 있다.

중단없이 계속되던 샴페인의 성장과 영광은 필록세라, 사기꾼, 전쟁으로 끝났다. 1890년대 필록세라가 상파뉴에 상륙했고 일부 양심없는 생산자들이 다른 지역의 와인을 수입해서 샴페인으로 둔갑해 판매시켰다. 이런 사기꾼을 진압하는 과정이 1908년 초기에 상파뉴 생산지역을 나누는 계기가 되었으며 구매자(Merchants)와 포도 재배자들과의 마찰을 촉발시켰다. 구매자들은 루아르, 랑그독 심지어 다른 나라에서 머스트를 들여오기도 했다. 이에 재배자들은 1911년 폭동을 일으켜 프랑스 군대가 출동하는 사태가 벌어지기도 했다.
 

▲ 샴페인의 발명으로 인해, 전세계 많은 사람들이 샴페인을 즐길 수 있게 되었다. <사진=픽사베이>

100년 전쟁, 16세기 종교 전쟁, 30년 전쟁 등으로 상파뉴의 포도 밭들은 황폐화 됐었다. 또한 1차 대전도 지역을 황폐화 시켰다. 상파뉴 지역은 거의 4년의 기간 동안 전쟁의 피해를 받았다. 부녀자, 아이들, 노약자들은 생명의 위협과 포격의 위험에 노출되어 있었고 인력, 비료, 말 등의 부족에도 불구하고 상파뉴 생산자들은 20세기 최고의 빈티지 중의 하나인 1914년 빈티지를 만들어냈다. 전쟁이 끝난 후 공황, 금주법, 러시아 혁명, 2차 세계대전 등으로 인해 독일, 미국, 러시아 등의 수출 시장이 가로막히고 침체에 빠지기도 했지만 현재 전 세계에서 생산되는 스파클링 와인 중 12병 중 한 병이 샴페인일 정도로 샴페인은 전세계 와인 산업에서 빼 놓을 수 없는 와인이 되었으며 2007년 기준 샴페인은 전 세계에 338,700,000병이 수출되고 있다.
 

▲ 오형우 소믈리에

오형우 소믈리에는 2015 한국 국가대표 소믈리에 대회 왕중왕전에서 우승을 차지하고, 2016 세계소믈리에 대회에 우리나라 대표로 참가한 국가대표 소믈리에다.  뿐만 아니라 사케와 전통주의 국가대표 타이틀도 차지한 우리나라 최고의 주류 전문가다. 이번 칼럼을 통해 전세계의 와인을 자세하게 설명한다.

소믈리에타임즈 오형우 소믈리에 wine1luv@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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