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선의 샴페인 여행] <5> 윈스턴 처칠이 사랑한 샴페인, 폴 로저(하)

승인2018.01.29 23:51:11

오크통 숙성의 전통을 과감히 버리고 순수한 샴페인을 만들다

▲ 반듯하고 나란히 놓인 스테인리스 통들은 폴 로저 하우스의 현대화와 생산 규모를 보여주었다. <사진= 김지선>

윈스턴 처칠의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은 후, 우리는 거대한 스테인리스 통이 죽 늘어서 있는 양조장으로 들어갔다. 반듯하고 나란히 놓인 통들은 폴 로저 하우스의 현대화와 생산 규모를 보여주었다. 연간 샴페인 생산량이 약 20,000hL나 된다고 하니, 과연 규모가 어마어마했다. 와인이 발효하고, 숙성 및 블렌딩 과정을 거치는 이 방은 온도가 철저하게 관리된다. 발효 이후에는 유산발효를 진행하여 와인에 부드러운 맛을 더해주고, 12월 초에 테이스팅을 하고, 1월 중순에 당해의 블렌딩 비율을 최종으로 결정한다.

폴 로저는 하우스에 남은 역사와 이야기는 소중히 지키지만, 양조에 있어서만큼은 철저하게 현대화를 추구하고 있었다. 이곳은 오크통 발효나 오크통 숙성을 생산과정에서 아예 배제한다. 오직 스테인리스 통에서 포도와 효모가 만들어내는 모습에 집중하는 것이다. 그래서 폴 로저 샴페인은 한 모금만 마셔도 입안에 신선한 청량감이 가득해진다.

▲ 폴 로저의 지하 저장고에는 약 2천 7백 명의 사람들이 10년간 매일 하루 한 병씩 마실 수 있는 만큼의 샴페인이 저장되어 있다. <사진= 김지선>

양조장을 나와 이번에는 계단을 내려가 카브로 들어갔다. 용도가 샴페인 보관용이어서 카브라고 부르지만, 샴페인을 빼놓고 보면 그냥 동굴이다. 에페르네의 카브는 보통 랭스의 것보다 더 어두운색을 띄었다. 샴페인이라는 지역 내에 있는 백악질인데도 색이 참 다른 걸 보면, 어렴풋하게나마 샴페인에 미칠 테루아의 영향이 짐작간다. 매튜씨가 백악질 토양에 만들어진 이 카브의 전체 길이는 7.5km이며, 현재 천만 병의 와인을 보관하고 있다고 말했다. 천만 병이면 약 2천 7백 명의 사람들이 10년간 매일 하루 한 병씩 마실 수 있는 양이다. 한반도 절반의 인구가 10년 동안 매일 마실 수 있다는 거다. 더 놀라운 건 그다음이다. 이 많은 와인 병들을 모두 사람이 직접 손으로 돌리며 숙성시켰고, 지금도 여전히 수작업으로만 리들링을 진행하고 있다.

▲ 손으로 병을 직접 돌려가며 샴페인을 숙성시킨다. <사진= 김지선>

여기서 병을 돌리는 인부를 리들러(riddler)라고 하는데, 한 명당 매일 5만 병에서 6만 병 정도를 돌린다고 한다. 기계를 쓴다고 해서 품질에 영향을 미치는 것도 아닌데 왜? 현대화한 스테인리스 양조장을 본 후여서인지 더 이해가 가지 않았다. 정확한 내부 사정을 알 수 없어 푸피트르는 폴 로저가 이어가고 싶은 소중한 유산일 거라 생각하고 넘어가기로 했다. 카브에서 만난 리들러 분들은 이곳에서 27년의 리들링 경력이 있었다. 한 직장에 무려 27년이나 있다니, 폴 로저의 복지 혜택이 대단한가보다.

폴 로저 테이스팅

▲ 왼쪽부터 브뤼 NV, 퓨어 엑스트라 브뤼 NV, 블랑 드 블랑 2009, 빈티지 2008, 서 윈스터 처칠 2006 <사진= 김지선>

브뤼(Brut) NV

샴페인의 대표적인 NM중 한 곳인 만큼 무려 30개의 크뤼 밭에서 자란 포도로 와인을 만든다. 피노 누아와 샤르도네, 피노 뫼니에가 같은 비율로 블렌딩 되며, 2012년에 수확한 포도로 만든 와인 75%와 25%의 리저브 와인으로 만들어진다. 리저브 와인은 3개 빈티지를 혼합하여 만드는데, 이날 마셨던 샴페인의 리저브 와인은 2010, 2009, 2008년 빈티지의 혼합이었다. 카브에서 4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숙성과정을 거쳤고 도자주는 8g을 넣었다. 복숭아 향이 많고 달콤한 벌꿀 향도 난다. 높은 산도에 탄산은 공격적으로 톡톡 쏘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런 모습 덕에 전체적으로 경쾌하고 섬세하다.

퓨어 엑스트라 브뤼(Pure Extra Brut) NV

앞서 마신 폴로저 브뤼와 아예 같은 와인으로 만들었는데, 마지막에 병입되기 전에 도자주를 넣지 않아 '퓨어 엑스트라 브뤼'라는 이름으로 세상에 나온 샴페인이다. 와인과 설탕 시럽만 넣지 않았을 뿐인데도 폴 로저 브뤼와는 꽤나 다른 인상을 준다. 달콤한 꿀 향은 사라지고 침샘을 자극하는 새콤한 과일향과 꽃향으로 가득하다. 역시 산도가 높고 향과 맛, 후미까지 이름처럼 깨끗하다. 도자주를 넣지 않는 유행에 발맞춰 폴 로저도 제로 도자주 샴페인을 내놓은 것으로 보인다. 산미에 익숙하지 않다면 이 샴페인을 마실 때는 꼭 음식과 함께하길 추천한다.

블랑 드 블랑(Blanc de Blancs) 2009

코트 데 블랑에서 자란 샤르도네 100%로 만들었다. 화사하면서 섬세하다. 레몬과 라임 등의 상큼한 감귤 향에 살짝 쌉싸름한 레몬 껍질 향이 스친다. 전체적으로 포도의 순수함이 잘 드러나 있다.

빈티지(Vintage) 2008

피노 누아 60%, 샤르도네 40% 블렌딩으로 만들어졌으며, 8년간 카브에서 숙성했다. 피노 뫼니에는 오래 숙성하면 좋지 않은 향을 더하기 때문에 빈티지 샴페인에는 보통 뫼니에를 넣지 않는다고 한다. 오래 숙성해서인지 구수한 누룩 향이 가득하다. 신선한 복숭아, 살구 향이 나며, 역시 산도가 높다. 다채로운 향이 매력적이다.

서 윈스턴 처칠(Sir Winston Churchill) 2006

경작이 좋았던 해에만 생산되는, 처칠처럼 단단한 모습을 보여주는 풀바디 샴페인이다. 정확한 블렌딩 비율은 알려져 있지 않으나 피노 누아의 비율이 높다. 구수한 효모, 꿀, 아주 잘 익은 복숭아, 흰꽃 등 향이 굉장히 복합적이고 가득 차 있다. 후미도 길고 달달하면서 견과류, 요거트 향이 많다. 이미 십 년을 숙성했으나, 더 기다리면 발전된 모습을 보여줄 듯 하다.

폴 로저 하우스를 떠나며

▲ 젠틀맨의 샴페인을 만드는 곳, 폴 로저 하우스 <사진= 김지선>

샴페인을 찾아 떠나왔지만, 막상 내가 마신 샴페인의 맛보다 더 선명하게 기억에 남는 건 나와 함께 이야기를 나눈 사람들이다. 카브와 공장을 돌며 만난 여러 직원분들, 그리고 나를 안내해준 매튜씨. 특히 매튜씨는 자신이 일하고 있는 이곳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면서도 으스대거나 거만한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상대방이 편안함을 느끼도록 끊임없이 배려해주었다. 자긍심과 배려심이 자연스럽게 묻어난 이들의 말과 행동에서 '젠틀맨'이라는 이미지는 이 하우스의 마케팅뿐 아니라 오랫동안 지켜온 폴 로저의 정신 그 자체임을 느낄 수 있었다.

소믈리에타임즈 칼럼니스트 김지선 j.kim@sommelier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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