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화구이.

샴페인 하우스 아그라파에서 받은 인상은 기름기가 쭉 빠진 직화구이와 같았다. 홈페이지에 필수적인 정보만 간결히 적어놓은 오너 파스칼 아그라파(Pascal Agrapart)는 직접 만나서 대화할 때도 미사여구로 화려하게 말을 장식하는 일이 없었다. 옷차림은 편안한 니트에 청바지(그러나 하우스를 돌아다니며 RM 생산자들은 대부분 이렇게 편안한 차림으로 손님을 맞는다는 걸 알게 되었다)고, 자신의 이름이 적힌 명함도 없다. 뭐랄까. 그는 사시사철 포도를 열심히 길러 와인을 만드는 농부로만 보였다. 마케팅이나 브랜딩은 판매하는 자의 몫이고 말이다. 으레 특별한 날, 잘 차려진 자리에서 큰맘 먹고 마시는 게 샴페인인데, 그런 샴페인이 이처럼 꾸밈없는 사람으로부터 만들어진다니 새삼 재미있다. 이쯤 되니 그의 생각이 궁금해진다. 선생님이 만드는 샴페인이 세계의 아주 많은 이에게 사랑받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나요?

▲ 아그라파 샴페인 하우스의 마당에 나무들이 자유롭게 심어져 있다. <사진= 김지선>

약속 시각대로 아침 9시에 맞춰 갔는데, 정문은 열려있고 마당에는 아무도 없었다. 저번처럼 잘못 찾아왔나 여러 번 주소를 확인해봐도 이곳이 맞다. 용기를 내어 마당에 있는 여러 문 중 한 곳 앞에 서서 두드렸다. 잠시후 파스칼씨의 아들로 보이는 갈색 머리의 젊은 남자가 나왔다. "여기 아그라파 하우스 맞나요?"라고 묻자, 맞는데, 잠깐 기다려달란다. 곧이어 파스칼씨가 나왔다. 그런데 또 기다려 달란다. 무언가 문제가 생긴 듯 이 두 명의 남자는 분주하게 마당을 걸어 다니더니, 마당 구석에 있는 하수구 앞에 납작 엎드려 그 안을 들여다보았다. 낯선 외부인이 있는데도 이토록 편안하게 행동하다니. 이들의 일상적인 모습을 보고 있자니 나까지 이 하우스의 일원이 된 듯한 기분이 들었다. 

한 10여 분이 지나자 손을 툭툭 털고 일어난 파스칼씨가 드디어 내게 말을 건넸다. "자, 이제 가실까요?"

19세기 말, 아비즈에 세워진 작은 샴페인 하우스

▲ 하우스 벽면에 써있는 '아그라파 에 필스'는 '아그라파와 아들'이라는 뜻이다. <사진= 김지선>

다른 하우스와는 달리 파스칼씨는 아그라파의 역사 설명을 생략하고 바로 양조장으로 향했다. 그래서 다음은 아그라파 홈페이지를 참고한 내용이다.

아그라파의 역사는 비교적 짧다. 1894년 아서 아그라파(Arthur Agrapart)가 현재 하우스가 위치한 아비즈에 세웠다. 아서 아그라파의 손자인 피에르(Pierre)가 1950-1960년대에 하우스를 넓혀서 현재 12헥타르 이상의 밭을 코트 데 블랑에 소유하고 있다. 코트 데 블랑은 샤르도네 생산지로 유명한데, 그래서 아그라파가 주로 사용하는 포도 품종도 샤르도네다. 아그라파의 포도밭은 코트 데 블랑 중에서도 아비즈, 오제, 크라망, 오이리의 그랑 크뤼 지역에만 있으며, 하우스가 설립된 이후부터 지금까지 개인 샴페인 생산자(RM)로 샴페인을 만들어왔다. 즉, 아주 좋은 밭에서 이들이 만든 포도만으로 샴페인을 만든다는 것이다. 참고로 아비즈에서 유명한 대표 샴페인 생산자는 자크 셀로스와 아그라파다.

연둣빛 포도 그림에서 생각한 와인의 본모습

▲ 포스터에는 연둣빛 청포도가 크게 그려져 있고, 그 아래에 바다처럼, 또는 땅처럼 펼쳐진 샴페인이 깔려 있었다. <사진= 김지선>

파스칼씨는 말수가 적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무뚝뚝하지는 않았다. 그는 다른 개인 샴페인 생산자와 마찬가지로 테루아의 힘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심지어 "포도가 와인의 전부다"라고까지 말했는데, 그가 테이스팅룸에서 가리킨 포스터를 보자 그 말뜻이 이해되었다. 포스터에는 연둣빛 청포도가 크게 그려져 있고, 그 아래에 바다처럼, 또는 땅처럼 펼쳐진 샴페인이 깔려 있었다. 어떤 한 분야를 공부하다보면 자세한 부분에 몰두하여 정작 큰 그림을 보지 못할 때가 있는데, 이 연두빛 포도를 보자 와인은 결국 포도라는 가장 기초적인 사실을 다시금 생각하게 되었다. 또 다른 관점에서 보자면, 적포도가 아닌 청포도를 그린 것은 아그라파가 샤르도네를 위주로 샴페인을 만든다는 정체성이 드러난 것이기도 하다.

소소한 개인 공간 같은 양조장과 카브

▲ 이 공간이 차고였을지 양조장이었을지 원래 용도는 알 수 없다. <사진= 김지선>

그를 따라 작은 공간들을 이리저리 따라다녔다. 이 샴페인 하우스는 곳곳이 흥미로운 것 천지인데, 특히 양조장이 재미있다. 압착기가 있는 양조장은 자가용과 자전거를 보관하는 차고로 함께 쓰이고 있었다. 차고로 쓰이면 먼지가 많지 않을까 하는 의문도 들었으나, 다행히 포도 압착기를 포함한 공간 전체가 먼지 하나 없이 아주 깨끗했다.

▲ 파스칼씨는 하우스를 소개해주다가도 일하는 직원분이 보이면 금세 달려가 도와주곤 했다. <사진= 김지선>

파스칼씨는 가장 좋은 와인이란 포도가 자란 테루아의 특성이 잘 표현된 와인이라고 했다. 테루아를 잘 살리기 위해서는 포도를 기르는 일뿐만 아니라 포도를 발효하고 와인을 숙성하는 일도 중요하다. 그래서 아그라파는 포도를 발효할 때 인공 효모가 아닌 자연 효모를 이용한다. 여기에 와인을 숙성할 때 오래된 오크통을 사용함으로써 나무의 향을 최대한 적게 더한다고 한다. 이렇게 숙성한 와인을 병에 넣어 2차 발효를 하는데, 이 병들이 발효하고 숙성하는 공간인 지하 카브는 연중 내내 10도의 온도를 유지한다고 한다. 아무런 온도 조절 장치가 없는데도 말이다.

▲ 카브가 크지 않아 좁은 길 양옆으로 샴페인 병들이 높이 쌓여 있다. <사진= 김지선>
▲ 부러워 마지 않았던 지하의 개인 셀러 <사진= 김지선>

카브를 떠나 원형 계단을 올라가는데, 계단 양옆의 벽면에 샴페인들이 차곡하게 보관되어 있었다. 우리 집 벽에 이렇게 샴페인이 가득하면 얼마나 좋을까 상상하며 걸었는데, 계단을 다 올라가니 웬 셀러가 등장했다. 야외로 나가기 직전인 반지하에 파스칼씨만의 개인 셀러가 있었던 것이다. 부르고뉴 와인은 말할 것도 없고 론 와인을 포함한 프랑스 와인에 이탈리아, 스페인 등 그야말로 국가별로 다양한 와인이 보관되고 있었다. 과연 아그라파의 셀러에는 어떤 와인이 있을까 궁금한 호기심 반, 부러움 반으로 한참 그의 와인 셀러를 구경했는데, 내가 너무 뚫어지라 구경했는지 파스칼씨가 쑥스러워하는 듯하여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옮겨 야외로 나왔다.

아그라파의 샴페인들

▲ 시음용 샴페인에는 마커로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만 이름을 적어 놓았다. <사진= 김지선>

7 크뤼(7 Cru) NV

이 샴페인에 사용된 샤르도네가 7개 마을에서 수확한 것이라 7 크뤼라는 이름이 지어졌다. 블렌딩 비율은 샤르도네 90%, 피노 누아 10%고, 두 해의 와인을 섞어 만든다. 와인 전체가 유산 발효를 거치고, 오크통에서 숙성한다. 이후 2차 발효를 위해 병입된 후에는 24개월에서 36개월간 다시 숙성한다. 도자주는 7g이다.

테루아 엑스트라 브뤼 블랑 드 블랑 그랑 크뤼(Terroirs Extra Brut Blanc de Blancs Grand Cru) NV

아그라파가 소유한 여러 밭에서 수확한 샤르도네만으로 만든 샴페인이다. 7 크뤼와 같이 두 해의 와인을 섞어 만든다. 유산 발효와 오크통 숙성을 거치며, 그랑 크뤼밭 포도의 풍부함을 끌어내기 위해 36개월에서 48개월을 병에서 숙성한다. 도자주는 5g이다.

콩플란테 엑스트라 브뤼 그랑 크뤼(Complantée Extra Brut Grand Cru)

아비즈에서 자란 피노 누아, 피노 뫼니에, 피노 블랑, 프티 메슬리에(Petit Meslier), 샤르도네 품종이 모두 들어간 샴페인이다. 이례적으로 샴페인에 쓰이는 세 개의 품종 이외의 포도가 사용되었다. 와인을 여과하지 않은 채 오크통에서 숙성시키며, 유산 발효를 거치고 4년간 숙성한다.

미네랄 엑스트라 브뤼 블랑 드 블랑(Minéral Extra Brut Blanc de Blancs Grand Cru)

소금기가 있으면서도 살짝 쌉쌀한 미네랄리티가 표현되어 있어 미네랄이라고 이름 지었다. 석회암 토양인 아비즈와 크라망 마을의 오래된 포도에서 수확한 샤르도네로 만들었다. 와인의 반 정도는 오크통에서 필터링을 거치지 않은채 숙성되며, 역시 유산발효를 거친다. 5년간 병에서 숙성하며 도자주는 4g이다.

아비즈와즈 엑스트라 브뤼 블랑 드 블랑 그랑 크뤼(Avizoise Extra Brut Blanc de Blancs Grand Cru)

진흙이 많은 아비즈 마을 언덕에서 자라는 50년 이상 오래된 나무의 샤르도네로 만든다. 여과과정 없이 와인 전체가 오크통에서 숙성되며, 유산발효를 거친다. 병 숙성 5년, 도자주는 4g이다.

베누스 브뤼 나투르 블랑 드 블랑 그랑 크뤼(Vénus Brut Nature Blanc de Blancs Grand Cru)

무려 1959년부터 심어진 아비즈의 포도밭을 기계가 아닌 말 베누스를 이용해서 경작했다. 그래서 지어진 이름이 베누스인데, 말로 포도밭을 경작하면 흙이 덜 촘촘하게 되어 공기가 잘 통한다. 또한 사용하는 지역은 라 포세(La Fosse) 포도밭의 일부인데, 이곳은 백악질 토양이 위주다. 양조 과정은 앞선 샴페인들과 같이 여과를 거치지 않은 와인이 그대로 오크통에서 숙성된다. 도자주를 넣지 않았다.

▲ 푸근한 분위기를 풍기는 파스칼씨가 샴페인을 따라준다. <사진= 김지선>

시골에서 농사일하시는 삼촌이 계셨더라면 이런 느낌이 들지 않았을까. 워낙 많은 손님이 찾아온 것도 이유일 수 있지만, 그에게는 애써 노력하지 않아도 상대를 편하게 해주는 능력이 있었다. 엄지 척 들 수밖에 없었던 아그라파 샴페인의 깨끗하고 싱그러운 맛이 한국에 돌아온 지금까지 입안에 맴도는 듯하다.

소믈리에타임즈 김지선 칼럼니스트 j.kim@sommelier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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