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인 레이블을 보면, 알 수 없는 영어, 불어, 독일어, 스페인어 들이 뒤섞여있음에도 딱 하나 직관적으로 눈에 들어오는 숫자가 있다. 바로 빈티지이다. 하지만 와인 업계 종사자들을 제외 하고는 이 숫자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는 사람이 드물다. 이 숫자가 와인을 생산한 해를 의미하는지, 포도를 수확한 해를 의미하는지, 와인을 다 만들고 병에 넣은 해를 의미하는지, 혹은 와이너리가 설립된 해를 의미하는지 당최 알 수가 없다. 와인을 처음 접하는 사람들은 당연 할 뿐더러, 어쩌다 한 번씩 마트에서 와인을 사먹는 사람들도 이 숫자가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 헷갈려 한다. 소믈리에들은 그렇다면 빈티지를 정확히 알고 있을까? 의미는 알고 있다. 하지만 빈티지가 내포하는 그 이면은 소믈리에들 역시 전부 알지 못한다. 이 물음을 풀어본다.

답부터 말하자면, 빈티지는 포도를 수확한 해를 뜻한다. 북반구는 보통 8월 ~ 10월 사이, 남반구는 2월 ~ 4월에 사이에 수확하는데, 이 수확한 해를 와인 라벨에 표기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빈티지를 왜 표기하는 것일까? 첫 째, 와이너리는 빈티지 표기를 통해 특정 연도에 수확한 포도로만 만들었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다. 그리고 전 세계 와인 생산 국가에서는 빈티지 표기의 기준을 법적으로 규정해놓고 있다. 따라서 라벨의 빈티지 표기는 여러 해에 걸쳐 수확한 포도를 섞어서 만든 와인이 아니라, 한 해에 수확한 싱싱한 포도로 만들었다는 품질 보증 마크라고 이해하면 된다. 둘 째, 따라서 빈티지를 표기 하지 않고서는 와인이 시장에서 팔리지를 않는다. 요리를 위한 1L 이상의 팩 와인과 샴페인을 제외하고는, 빈티지가 없는 와인은 시장성이 없기 때문에 수익창출 면에서 빈티지 표기는 생산자의 선택이 아닌 필수가 되어 버렸다. 어느 누가 품질을 예측할 수 없는 와인을 사겠는가.

그렇다면 빈티지가 내포하고 있는 숨겨진 의미는 무엇이 있을까?

빈티지는 포도를 수확한 해를 의미하기 때문에 빈티지 와인의 품질은 그 해의 포도 품질을 의미하고, 포도 품질은 씨눈 발아부터 포도 수확까지 기간동안의 날씨와 직접적으로 연결된다. 즉, 프랑스 부르고뉴의 안느그로 샹볼 뮈지니 2015 빈티지의 와인을 앞에두고 2015년 부르고뉴의 날씨를 알면 와인의 품질과 시음 적기를 예측할 수 있는 것이다. 둘 째, 와인이 병에서 얼마나 숙성되었는지 예측할 수 있다. 다시 안느그로 샹볼 뮈지니 2000빈티지를 예로 들어보자. 2000년에 수확한 포도로 만들었고, 오크 숙성을 2년으로 예상했을 때 현재 2018년까지 와인은 16년의 시간동안 병에서 천천히 숙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빈티지는 와인의 나이를 의미하는 것이다. 정리하자면, 빈티지는 해당 년도의 날씨를 통해 와인의 품질을 예측하는 척도로서의 역할이 하나 있고, 동시에 와인의 나이를 알려줌으로써 현재 와인의 상태를 예측하고 시음 적기를 판단하는 기준을 제시한다.

그렇다면 여기서 질문. 좋은 빈티지와 나쁜 빈티지는 무엇일까?

일반적으로 좋은 빈티지는 포도 발아부터 수확까지 서리와 우박, 병충해의 피해가 없고, 열매가 열리기 전까지 비가 충분히 오면서 열매가 열린 후에는 햇빛이 풍부하고 비가 오지 않는 날씨를 의미한다. 위 모든 조건들이 반대로 적용되면 나쁜 빈티지가 된다. 하지만 좋은 빈티지와 나쁜 빈티지를 일반화 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특정 지역 안에서도 어떤 세부 지역은 비가 내리고, 다른 세부지역은 비가 내리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서리가 왔음에도 이를 예측하고 미리 방비를 해놓은 생산자가 있는 반면, 그렇게 하지 못한 생산자가 있을 수 있다. 토양에 따라서 나쁜 빈티지가 어느정도 극복 되기도 한다. 비가 많이 오는 지역은 배수가 잘 되는 자갈 토양이, 비가 너무 않 오는 지역은 배수가 잘 되지 않고 물을 머금고 있는 진흙 토양이 포도 열매의 가장 큰 적인 강우로부터 피해를 줄여준다. 날씨가 변덕스러운 프랑스 보르도와 부르고뉴의 생산자들이 토양을 최고로 강조하는 이유중에 하나가 바로 이것이다.

▲ 동일한 2013년, 동일한 양조방식에 왼쪽이 던디 힐 피노누아, 오른쪽이 쉐할렘 마운틴의 피노누아 <사진: 최태현>

미국 오레곤 주의 2013년은 수확시즌에 비가 많이 와서 좋지 않은 빈티지로 알려져있다. 하지만 오레곤 뉴버그에 위치한 VIDON 와이너리의 수석 메이커 데이비드 벨로우스는 필자에게 2병의 와인을 가져다주며 비교 테이스팅을 권했다. 같은 2013년인데 하나는 던디 힐(세부 지역 이름)의 피노누아, 다른 하나는 쉐할렘 마운틴(역시 세부 지역 이름)의 피노누아였다. 테이스팅 후, 놀랍게도 쉐할렘 마운틴의 피노누아는 완벽에 가까운 산도, 타닌, 과실향의 밸런스를 보여주는 반면, 던디힐의 피노누아는 산도가 과실을 덮어버리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는 빈티지를 평면적으로 받아들여 왔던 필자의 개념을 산산조각 내버렸던 아주 진귀한 경험이었다.

소믈리에들도 빈티지를 보고 와인을 정확히 설명할 수 없다고 앞에 설명한 부분이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전 세계 지역의 모든 날씨를 해마다 체크하고 외우기가 정말 어려울 뿐더러, 세부 지역별로 날씨가 다를 수 있고, 정성스러운 포도밭 관리와 세밀한 양조 관리를 통해 빈티지에 상관 없이 최상의 품질을 보이는 와인이 만들어질 수 있다. 최근에는 기술의 발달로 날씨가 좋지 않았던 해에 더 뛰어난 와인이 만들어지곤 한다. 와인 메이커가 더더욱 신경을 써서 만들기 때문이다.

정리하자면, 빈티지는 포도를 수확한 해이다. 이것만 알고 있으면 된다. 여기서 더 궁금증이 일어난다면 해당 지역의 날씨를 찾아보면 될 일이고, 궁금하지 않다면 이 와인이 몇 살이구나 이정도로 알고 넘어가면 되는 것이다. 복잡할 것 없다. 그저 눈 앞의 와인을 좋아하는 사람들과 즐기고 그 순간이 행복하면 그만이다.

소믈리에타임즈 최태현 칼럼니스트 cth929@gmail.com

저작권자 © 소믈리에타임즈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