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비즈 포도밭에서 수확한 포도로 만든 샴페인들이 숙성중이다. <사진= 김지선>

아비즈에 있는 샴페인 하우스, 프랭크 봉빌(Franck Bonville). 프랭크 봉빌은 이웃한 샴페인 하우스 자크 셀로스나 아그라파보다 유명세는 덜하지만, 샴페인을 향한 장인 정신 만큼은 뒤처지지 않는다. 그리고 난 이 사실을 현재 하우스의 오너인 올리비에 봉빌씨를 만난 후에야 알게 되었다. 프랭크 봉빌을 알게 된 일은 순전히 우연이었다. 이번 샴페인 여행에서 이곳을 방문할 계획은 없었는데(샹파뉴에 가기 전에는 프랭크 봉빌을 몰랐다), 아비즈에서 동네를 둘러보던 중 우연히 하우스 앞을 지나며 뒤늦게 약속을 잡게 되었다. 이 날 만난 분은 프랭크 봉빌에서 일을 하시던 나이가 지긋한 여성분이었다. 갑자기 찾아와서 시간을 내어줄 수 있느냐는 요청이 당황스러우셨을 텐데, 감사하게도 흔쾌히 방문 일정을 잡아주셨다.

▲ 프랭크 봉빌 하우스 전경 <사진= 김지선>

아비즈를 떠나는 날 아침, 하우스를 다시 찾았다. 나선형의 나무 계단이 있는 2층짜리 건물인 프랭크 봉빌 하우스는 아담하고 정돈되어 있었다. 처음에 만난 분이 우릴 맞아주었는데, 1층에 연결된 지하 카브부터 투어를 시작했다.

4대째 이어져 온 아비즈의 샴페인 하우스

프랭크 봉빌은 4대째 가족이 경영하는 소규모 하우스다. 처음에는 포도를 판매하는 곳이었는데, 1930년대 경기 침체로 포도가 팔리지 않자 아비즈에 있는 한 와인메이커의 하우스를 구매하여 직접 와인을 생산하기 시작했다. 프랭크 봉빌과 그의 아버지가 1937년에 하우스를 산 이후, 아비즈의 포도밭을 꾸준히 늘려갔다. 이들이 생산한 초기 샴페인의 브랜드 이름은 '봉빌 페르 에 필스(Bonville Père&Fils)'였다. 프랭크 봉빌의 아들 질(Gilles)에 이어 가문의 4대손인 올리비에 봉빌(Olivier Bonville)이 97년부터 지금까지 하우스를 운영하고 있다.

▲ 올리비에씨를 졸졸 따라다니던 반려견들 <사진= 김지선>

카브를 나오니 온몸이 까만 강아지 2마리가 호기심 어린 듯 나를 쳐다보았다. 곧이어 누군가가 대문을 열고 들어오자 강아지들이 그를 맴돌며 신나게 뛰어다녔는데, 이들의 환호를 통해 저분이 올리비에씨라는 것을 확신했다. 그가 강아지들을 진정시킨 후 인사를 나눴다. 

양조장에서의 즉석 테이스팅, 기포없는 샴페인을 마시다

올리비에씨와 양조장으로 향했다. 양조장에 들어서니 스테인리스 스틸통이 벽면을 따라 있고, 중앙에는 오크통들이 가지런히 줄 서 있었다. 이 오크통들은 228리터 크기의 부르고뉴 와인용 통인데, 프랭크 봉빌에서는 2000년대부터 사용되기 시작했다. 이렇게 숙성을 거치는 리저브 와인은 와인에 탄산을 만들어주는 티라주(tirage) 또는 마지막 와인의 당도 등을 결정하는 도자주(dosage)용 와인으로 사용된다. 다른 하우스를 방문할 때에는 양조장을 둘러보기만 했기에 설명이 끝난 후 나가려는데, 올리비에씨가 여기서 숙성중인 와인을 마셔보겠냐고 물었다. 와인을 블렌딩하는 셀라 마스터에게만 허락될 줄 알았던 베이스 와인을 마실 경험을 얻다니, 완전 횡재다! 그는 '어디 한번 샴페인의 정수를 맛좀 봐라'는 듯이 스테인리스 스틸 통과 오크통에서 숙성 중인 와인들을 하나씩 따라주었다.

▲ 현 오너 올리비에 봉빌 <사진= 김지선>

그에게서 받아든 와인은 우리가 평소에 마시는 화이트 와인과 달리 탁했다. 와인을 투명하게 하는 정제 과정을 거치지 않았기 때문인데, 마셔보니 스테인리스 스틸 통에서 나온 와인은 산도가 높고 복숭아, 사과 등 새콤달콤한 과일 향이 가득했다. 여기에 아주 옅은 탄산감까지 있어 내추럴 화이트 와인을 마시는 기분이었다. 오크통에서 꺼낸 와인은 앞서 마신 와인의 과일 향에 고소한 바닐라 향까지 은은하게 더해져 있었다. 이대로 팔아도 잘 팔리겠다는 말이 목에서 절로 터져 나왔다.

강아지를 사랑하는 샴페인 생산자와 함께한 포도밭 드라이브

아비즈는 최고의 샤르도네가 자라는 코트 데 블랑에 있다. 샹파뉴에 있는 17개 그랑 크뤼중 코트 데 블랑에 그랑 크뤼가 6개나 있으니, 이곳에서 만들어진 와인들은 보통 품질이 보장된다. 프랭크 봉빌이 소유한 15헥타르의 포도밭은 아비즈, 오제, 르-메닐-쉬르-오제에 있다. 지난번에 만난 아비즈의 유명 RM(Récoltant manipulant) 자크 셀로스, 아그라파처럼 올리비에씨도 포도밭의 포도가 와인 품질을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라고 말했다. 포도밭을 가보겠냐는 그의 말에 나는 덥석 가겠다고 했다. 샴페인 생산자와 함께 포도밭을 산책하는 기회를 놓칠 수 없었다. 

▲ 프랭크 봉빌 소유의 포도밭 중 일부 <사진= 김지선>

그는 차를 타기 전 좌석 시트위에 담요를 깔아주었는데, 강아지들이 남긴 발자국 때문이었다. 과연 자리에 앉으니 강아지들의 흔적이 역력했다. 뒷좌석 시트에 긁힌 자국들을 보며 평소에 올리비에씨는 개들을 자유롭게 기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올리비에씨가 보일 때마다 신이 나서 꼬리를 흔들고 쫓아다니던 강아지들의 모습도 이해됐다.

그는 운전하며 이쪽까지는 아비즈, 이곳부터는 오제라고 포도밭의 위치를 알려주었다. 사실 샹파뉴에 처음 온 내게 눈으로만 봐서는 그 밭이 그 밭처럼 보였다. 그저 지도로만 보던 곳을 직접 눈으로 본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뿌듯했다. 한 10분 정도 차를 타고 갔을까? 프랭크 봉빌 소유의 포도밭에 내려 11월의 수확이 끝난 포도나무들을 자세히 들여다 볼 수 있었다.

뜻밖의 만남에서 얻은 행운들, 그리고 워라밸과 장인 정신에 대한 생각

때때로 여행의 묘미는 예상치 못한 곳에서 생긴다. 이번 여행에서는 계획에 존재하지 않던 프랭크 봉빌 샴페인 투어가 그랬다. 예기치 못한 만남과 그 만남이 주는 기쁨. 인심 좋은 올리비에씨가 설익은 와인 전문가에게 베푼 도움으로 샹파뉴에서만 할 수 있는 일들을 마음껏 누렸다. 그에게서 자신이 소중하게 기르고 가꾸는 샴페인을, 이를테면 사랑스러운 반려동물 사진들을 보여주는 내 친구들처럼, 많은 사람에게 더 보여주고 싶은 마음이 풀풀 느껴졌다. 이렇게 자랑스러운 마음으로 만드는 샴페인이니 맛이 없을 수가 없다.

▲ 프랭크 봉빌의 프레스티지 와인 '레 벨 부아(Les Belles Voyes)'. 배용준·박수진 커플의 웨딩 샴페인으로도 사용되었다. <사진= 김지선>

올리비에씨를 비롯한 많은 샴페인 생산자에게 샴페인은 돈을 버는 것 이상의 가치가 있다. 포도를 기르는 것부터 와인을 병에 담는 과정까지 일일이 정신적, 육체적인 노력을 쏟는데, 장인 정신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높은 강도의 노동에 워라밸 관점에서 보자면 완전히 '밸붕'이지만, 삶과 일을 하나로 통일한 장인에게 워라밸은 의미 없는 단어다. 자신이 밤낮없이 갈고닦아 만든 작품은 삶 전체에서도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기 마련이다. 샹파뉴 곳곳에 있는 장인을 만나다 보니, 나도 스스로에게 일과 삶의 관계를 묻게 된다. 그러나 샹파뉴에서 나를 지탱하고 있던 두 다리가 되묻는다. 네가 사랑하는 와인 마을에 올 때부터 이미 삶과 일이 섞인 게 아니냐고.

김지선 칼럼니스트는 영국 와인 전문가 교육 WSET Advanced 과정을 수료후 WSET Diploma 과정을 공부하고 있다. 아무리 마셔도 끝이 없는 와인의 세계에 빠져 와인을 글로 남기기 시작했으며, 전 국민이 와인의 참맛을 아는 날이 오도록 힘쓰고 있다.

소믈리에타임즈 칼럼니스트 김지선 j.kim@sommelier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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