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꿈같은 상상을 해 본다. 온 세상이 나를 위해 존재하기라도 한 것처럼 지금 이 순간 나는 최고로 행복한 사람이다. 환희의 순간을 함께 할 가족, 친구들, 동료들 사이에서 나는 한 번도 가져보지 못했던, 입이 귀에 걸리는 함박웃음을 터뜨린다. 이윽고, 다가오는 아이스버킷 속 샴페인을 장엄하게 들고는 미친 듯이 위아래로 흔든다. 터져 나올 코르크 마개가 튀어 오르는 각도 따위는 무시하고 엄지손가락 하나로 마개를 툭 건드려 샴페인을 딴다. 병을 너무 많이 흔들었나? 거품이 끊임없이 쏟아져 나온다. 상관없다. 넘치는 거품은 넘치는 기쁨에 비례하니까!

마시기에 애매한 와인이 있다면 그건 샴페인일 것이다. 누가 뭐라고 하는 것도 아닌데 유난히 샴페인을 열 타이밍과 상황에 신경 쓰게 된다. 오랜만에 샴페인을 한 병 샀다고 하면 “오늘 무슨 좋은 일 있어요?”라는 물음이 따라온다. 그럼 자꾸 망설여진다. ‘이왕이면 더 좋은 날 마실까? 여러 좋은 사람들과 함께?’ 더 나아가 샴페인 한 잔 마시려는 데에도 자기 성찰 비슷한 것을 하는 지경에 이른다. ‘지금 내가 샴페인 마실 때인가?’, ‘마실 자격이 있는가?’ 언제나 그렇듯, 생각해 보니 오늘도 ‘그날이 그날’인 날에 불과하고 이렇게 샴페인 따는 날은 차일 피일 미뤄진다.

▲ 펑! 하고 터뜨리면 기분도 펑! 하고 날아오를 것 같다. <그림=송정하>

샴페인은 언제부터 이렇게 전 세계적으로 ‘특별함’의 아이콘이 되었을까? 샴페인의 유래가 된 프랑스 샹파뉴(Champagne) 지방은 사실 와인보다는 울(wool) 섬유 산업으로 유명했다고 한다. 그 지역의 와인이 한때 울 산업을 프로모션 하기 위해 덤으로 끼워주던 증정품에 불과 했다는 사실은 오늘날 승리와 럭셔리의 상징인 샴페인의 이미지와 너무도 다르다. 샹파뉴 지역이 포도 재배지 중 프랑스에서 가장 북쪽에 위치한 것을 감안하면 분명 훌륭한 와인을 만드는데 적합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후의 샴페인 역사를 들여다보면 영리한 마케팅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 같다. 소비 행위를 통한 자신의 정체성 확립이라는 개념을 그대로 샴페인의 마케팅에 적용했으며, 샴페인 하우스들의 이러한 노력은 시대와 상황에 맞게, 즉 유럽의 왕실을 시작으로 산업화와 현대화를 거치며 재빠르게 변모하는  마케팅으로 이어졌다.

18세기, 후에 ‘모에 샹동(Moët et Chandon)’이라는 이름을 가지게 될 샴페인 하우스의 설립자, 클로드 모에(Claude Moët)는 고객과의 직접적이고 내밀한 접촉의 중요성을 일찌감치 깨달은 인물이었다. 당시 루이 15세의 공식적인 정부였던 마담 퐁파두르(Madame de Pompadour)에게 사교 모임에 와인이 얼마나 적합한지를 설득하는 데 공을 들였다. 그리하여 프랑스 왕실에 최초로 샴페인을 공급하기에 이른다.

한편 샴페인의 역사를 말하자면 두 명의 여인을 빼놓을 수 없다. 그 중 한 명은 남편에 이어 샴페인 하우스를 경영하며 영국 시장을 공략하는데 큰 성공을 이룬 마담 포므리(Madame Pommery)다. 이러한 성공은 경쟁 업체들의 많은 시샘을 유발했는데 급기야 그녀가 재정적인 위기 상황에 처해 있다는 악의적인 소문이 퍼지게 된다. 이를 잠재우기 위한 마담 포므리의 선택은, 당시 최고의 화가였던 장 프랑수아 밀레(Jean-François Millet)의 그림 <이삭 줍는 여인들(Les Glaneuses)>을 거액을 주고 구입하는 것이었다. 비즈니스를 향한 그녀의 배포가 놀라우면서도, 한편으로 샴페인 하우스의 성공과 건실함을 보여주기 위해 선택한 것이 고된 노동자의 현실을 소재로 한 그림이었다는 사실이 더욱 놀랍고 아이러니하다.

마담 포므리가 영국을 공략했다면, 마담 클리코(Madame Clicquot)의 관심은 러시아에 있었다. 1815년, 나폴레옹 군대가 패하고 러시아가 샹파뉴의 랭스(Reims) 지방을 점령했을 당시, 러시아 장교들을 자신의 지하 와인 저장고에 초청하여 샴페인을 소개한 일화는 유명하다.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일단 마시면, 돈을 낸다니까!

산업화가 진행되고 부르주아 계층이 성장하던 19세기 후반은 사회적 계층이 빠르게 변화하던 시기다. 한 역사학자의 말을 빌리자면 당시 샴페인 하우스들의 네고시앙(Négociant: 샴페인 제조, 판매업자)들은 불확실하게 변모하는 현대 사회에서 ‘사회적 지위를 정의하기 위한 방법’으로 샴페인을 시장에 내놓았다. 한 마디로 샴페인은 ‘엘리트를 위한 사치품’인 것이다. 샴페인 라벨에 귀족의 문장(紋章)과 ‘왕실(Royal)’, ‘백작(Comte)’, ‘왕자(Prince)’와 같은 타이틀이 등장한 시기도 이 때다. 이는 어지럽게 돌아가는 산업혁명기에, 산업 혁명 이전의 고전적이고 전통적이며 특별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데 기여했다.

이 시기에는 또한 그 유명한 '동 페리뇽(Dom Pérignon:1638~1715)' 신화가 등장한다. 그가 랭스 지방 수도원의 식품담당 수도사로서 거품이 이는 와인의 매력을 발견하고 그 질을 향상시킨 인물임에는 틀림없다. 특히 샴페인 기술의 결정체라고 할 수 있는, 최상의 맛과 향을 위해 수십 가지의 와인을 조합하고 배합하는 '블렌딩' 기술을 정립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는 평가받는다. 그러나 그가 샴페인을 발명한 것은 아니다. 거품이 이는 와인은 이미 오래전부터 존재했기 때문이다. 그가 죽은 지 약 한 세기가 지난 후 ‘스파클링 와인의 아버지’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다시 나타난 것은, 치열한 와인 시장에서 차별화될 수 있는 그들만의 역사성과 정통성을 강조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그러나 샴페인이 과거의 문화유산으로서의 이미지만 부각된 것은 아니었다. 20세기 초반, 이번에는 현대화의 옷으로 갈아입고 증기선이나 자동차, 비행기, 열기구 등의 다양한 신문물을 이용한 광고에 샴페인이 등장했기 때문이다. 이렇듯 샴페인은 시대 상황에 맞는 다양한 마케팅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지만 그것이 내세우고자 한 모습은 하나다. 고급스럽고 세련되며 격식 있고 당당한 이미지가 그것이다. 

샴페인 한 병을 여는 데에도 내 처지와 주변 상황을 돌이켜 보며 호들갑을 떠는 것, 그저 마시고 싶은 음료 앞에서 괜히 움츠러드는 이 모든 것은, 샴페인 마케팅의 역사가 보여주는 일관된 이미지에 갇혀서 일까? 이럴 땐 영국의 저명한 경제학자이며 철학자인 케인즈(Keynes)가 죽기 전 마지막으로 남겼다는 말을 떠올려 본다.

“샴페인 좀, 더 마실 걸. 그거 하나 후회되네“

▲ 송 정 하

법대를 나왔지만 와인이 들려주는 이야기가 좋아 프랑스 보르도로 떠났다. 보르도 CAFA에서 CES(Conseiller en sommellerie:소믈리에컨설턴트 국가공인자격증), 파리 Le COAM에서 WSET Level 3를 취득했다. 사람이 주인공인 따뜻한 와인이야기를 쓰고 싶다.

소믈리에타임즈 칼럼니스트 송정하 noellesong0520@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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