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갑은 두둑한데 시간에 쫓기는 사람과 가진 거라고는 시간밖에 없는 사람의 여행은 다를 수밖에 없다.

내가 비록 후자에 속하는 사람이라고 해서 크게 불만이 있다는 얘기는 아니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하루 종일 오르셰 미술관에 있을 수 있는 축복은, 미슐랭 스타 레스토랑의 예약 시간에 닿기 위해 미술관을 한 시간 만에 완주해야 하는 사람의 긴박함에 비할 바가 아니기 때문이다. 거기에 배가 고프면 밤늦게까지 하는, 이민자 출신의 친절한(파리 치고는!) 사장님이 운영하는 케밥 가게에서 아주 만족스럽게 케밥을 먹을 줄 아는 서글서글한 식성까지 가지고 있으면 문제 될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렇게 보면 인생은 공평한 것 같기도 하다. 다행히 나는 케밥을 좋아한다.

각자의 사정에 따른 차이는 여행 스케줄을 짜는 그 순간부터 달라진다. 특히 한국에서 귀한 시간을 쪼개 유럽으로 가는 사람과 이미 유럽에 거처는 있지만 돈과 시간이 극단적으로 반비례한 나 같은 학생은 스케줄을 짜 주는(?) 주체부터 다르다. 내 스케줄을 결정하는 것은 내가 아니다. 바로 비행기다. 즉 가장 저렴한 티켓이 있는 시간이 내가 여행을 시작할 타임인 것이다. 세계 최고의 디저트 와인인 포트(Port)라는 이름의 유래가 됐으며 수도 리스본 보다 더욱 아련한 향수를 풍기는 포르투갈의 제2의 도시, 포르투(Porto)로 향하는 최저가 항공편이 수요일 오후 3시 20분에 출발을 하기로 결정했다면 그런 것이다. 더 이상 설명은 필요 없다.

하지만 여행지에 늦은 시각에 도착하는 것이 왠지 억울한 느낌이 드는 것은 사실이다. 여행 일 수를 늘리고 싶다면 여행경비의 우선순위에서 가장 멀어지는 것은 역시 나로서는 숙박비일 수밖에 없다. 어차피 잠만 자는 곳이기 때문에 개인 욕실이 있고 포르투 중심가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위치에만 있다면 다른 것은 아무 문제 되지 않을 것이라고, 그때는 그런 생각을 했었다.

포르투 공항에 도착해서 노란색 손잡이가 인상적인 깔끔한 메트로로 갈아타고 캄포 24 아고스토(Campo 24 de Agosto) 역에 내린 후, 예약한 호텔을 찾으려 두리번거릴 때에는 이미 오후 늦은 시각에 바람도 불고 꽤 쌀쌀한 날씨였다. 하필 휴대폰의 인터넷이 잡히지 않아 공항에서 얻은 종이 지도를 펄럭이며 걸어야 했지만 의외로 쉽게 호텔을 발견했다. 벌써 어둑해졌지만 남색 지붕과 민트색으로 도배한 이국적인 양식의 건물이 낮에 보면 꽤 예쁠 것 같았다. 입구에 들어설 땐 왜 몰랐을까? 동화 속 그림 같은 유럽의 건물은 가혹한 반전이 있다는 것을.

까만 머리색과 살짝 구릿빛이 도는 얼굴색의 호텔 직원을 보자마자 나는 마음이 따뜻해지는 것을 느꼈다. 실제로 그들은 그때만 해도 동양인이 많지 않았을 관광객을 아주 친절하게 맞이해 주었다. 하지만 을씨년스러운 1월의 겨울날, 이 따뜻함은 오래가지 않았다. 배정받은 방으로 들어가는 순간 나는 인생 최악의 숙소를 경험하리라는 것을 단번에 느꼈기 때문이다. 벽에 붙은 것은 분명 냉난방 겸용 에어컨인데 뜨거운 바람이 아니라 찬 바람이 나오고 있었다. 세상에서 가장 차가울 것 같은 돌 벽에 바짝 붙은 딱딱한 침대 위에는 희고 얇은 천이 둘러져 있었고 덮을 이불이라고는 얇고 뻣뻣한 담요 두 장이 전부였다. 그것은 어릴 적 할머니를 따라 간 노인정에서 동료 할머니들이 화투용 판으로도 쓰지 못할 만한 것이었다. 욕실엔 샴푸도 비누도 없었으며 아치형 모양의 키 큰 갈색 옷장과 높은 천장은 공포스러울 정도로 추운 느낌을 가중시켰다. 그렇다. 그곳은 호텔 방의 모양을 한 동굴이었다.

이럴 때는 어느 책의 제목처럼 ‘그냥 집에 있을걸’이라는 말이 절로 나온다. 당시 보르도 숙소도 바람이 불면 덜컹거리는, 전혀 작동하지 않는 벽난로가 있는 스산한 집이었지만 그곳엔 내가 열심히 구비한 한국 최고의 방한 용품 즉 전기매트와 두꺼운 솜이불이 있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거긴 나의 집이었다. 누굴 탓하랴. 한 겨울 유럽의 저렴한 숙소에 오면서 전기매트 챙길 생각을 못 한 내가 어리석었을 뿐. 나는 추위로 인한 충격과 허기짐을 달래기 위해 인터넷에서 봐 둔 레스토랑으로 향했다. 배고픔과 추위는 같이 온다고 하지 않는가. 이게 다 배가 고픈 탓인지도 모른다.

내일 가 볼 재래시장, 볼량 시장(Mercado do Bolhão)을 지나 곧장 포르투갈의 전통 레스토랑 ‘아바디아 도 포르투(Abadia do Porto)’로 향했다. 복층 구조로 꽤 큰 규모의 그 레스토랑은 벽을 장식한 파란색 아줄레주(Azulejo) 타일만 아니었다면 서울의 여느 고급스러운 중식당에 온 줄 착각했을 것이다. 등받이가 높은 의자와 빨간색 테이블보, 넓은 사각 테이블은 오늘날의 사회적 거리두기를 예상하기라도 한 듯 테이블 간 간격 또한 넓었다. 비수기임에도 불구하고 다양한 국적의 관광객이 듬성듬성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숙소로 인한 충격을 보상하기 위해 한껏 나에게 너그러워지기로 작정했다. 나는 전채로 새우와 홍합요리를 주문하고 메인으로 포르투갈의 명물, 문어와 대구 요리를 주문했다. 그런데 무슨 일인지 따뜻한 문어와 대구 요리가 먼저 나왔다. 대구는 포르투갈을 대표하는 식재료로서 포르투갈어로는 ‘바칼랴우(Bacalhau)’ 라고 불리며 주로 건조 후 염장해서 먹는다. 천 가지가 넘는다는 다양한 조리법이 있지만 내가 주문한 것은 올리브오일과 마늘, 양파, 피망 등과 함께 구운 큼직한 대구살에 고소하게 삶은 감자가 곁들여진 것이었다. 프랑스에서 감자, 달걀, 양파 등을 넣어 동그란 크로켓 형태의 냉동 바캴라우만 먹어 봤던 나는, 오랜만에 만나는 부드럽고 짭조름 하며 향긋한 바다 느낌이 나는 제대로 된(?) 생선이 그저 반가웠다.

사실 문어 요리는 기대하지도 않았었다. 해산물은 그 다양한 재료와 조리법에 있어서 우리나라를 따라올 자가 없다고 하면 지나친 생각일까? 아무튼 많은 서양인들이 그 생김새에 있어서 위협적이라 느끼는 문어를, 포르투갈이라고 그 맛을 잘 살려낼 것 같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역시 올리브 오일, 삶은 감자와 마늘 등의 채소와 함께 나온 두툼한 문어 다리를 잘라 한 입 베어 무니 겉은 바삭하고 속은 매우 부드러우며 씹을수록 쫄깃하다. 직원분께 물으니 푹 삶았다가 적당히 자른 뒤 다시 구운 것이라고 한다. 남유럽의 요리를 접할 때마다 느끼는 놀라운 점은 올리브 오일과 어쩌면 뻔한 몇 가지 향신료를 가미하는 단순한 방법으로 재료 본래의 맛을 상승시켜 탁월한 감칠맛을 낸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감동을 느끼는 포인트에서 유난스러운 구석이 있는 나는, 메인인 문어와 대구보다 다른 것에 마음을 빼앗겨 버렸다. 내가 주문 한 대구와 문어는 모두 ‘라가레이루(Lagareiro)’ 방식의 요리였는데, 이는 감자에 소금과 올리브 오일, 마늘과 각종 삶거나 구운 채소를 메인 해산물 요리에 곁들여 먹는, 포르투갈과 스페인 등 지중해 나라에서는 일반적인 조리법이다. 그중 채소 곁들임, 즉 영어로 케일(Kale)이라 번역되고 한국에서는 무청이라고도 불리는 포르투갈의 채소 ‘그렐로(Grelos)’의 맛을 나는 아직도 잊을 수 없다. 사실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흔한 채소지만 날 것을 그대로 먹는 샐러드나 단순 데침, 볶음류에서 벗어난 이 채소 절임(?) 은 신기하게도 한국의 나물 반찬과 같은 깊은 맛이 났기 때문이다. 나는 매우 감동했다.

‘이 사람들, 채소 먹을 줄 아는구나!’

한국이라면 반찬 좀 더 가져다 달라고 말했겠지만 차마 그런 말은 하지 못했다. 부탁했으면 혹시 조금은 더 갖다 줬으려나?

▲ Polvo à lagareiro, 뽈부(polvo)는 포르투갈어로 문어다. <사진=송정하>

음식과 같이 마시기 위해 직원분이 권한 포르투갈의 화이트 와인, ‘마르케스 보르바(Marquês de Borba Branco)’ 한 병을 시켰다. 라벨을 보니 포르투에서도 한참 먼 남부 지방, 알렌테주(Alentejo) 출신이다. 사실 이 지역은 코르크 생산지로 유명한 곳이다. 전 세계 코르크 마개의 절반이 포르투갈에서 생산되고 있으며 그중 대부분의 생산이 바로 이곳 알렌테주의 코르크 나무 숲에서 이루어 지기 때문이다. 한편 덥고 건조한 기후 특성상 화이트 와인보다는 레드 와인 생산에 알맞은 지역이기도 하다. 그러나 와인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은 주방에서 음식을 조리하는 사람이라는 와인학교 선생님의 말 대로 나는 추천받은 화이트 와인을 얼른 마셔 보고 싶었다.

연한 밀짚 색에 신선한 레몬, 감귤 향이 입안에서도 그대로 퍼진다. 멜론과 배, 복숭아류의 과일 맛도 조금 나지만 대체로 가볍고, 입맛을 돋우는 산도가 해산물의 담백한 맛과 잘 어울린다. 찾아보니 알렌테주 지역의 토착 품종인 산미 가득한 아린투(Arinto)와 샤르도네와 매우 닮았다는 안타웅 바스(Antão Vaz), 그리고 국제적 품종인 리슬링과 비오니에가 블렌딩된 것이다. 맛이 괜찮냐는 듯한 표정으로 테이블 사이를 돌아다니는 직원분과 눈을 맞추며 한 모 금 홀짝인 후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식사가 끝날 무렵 어째서인지 차가운 새우와 홍합 요리가 나온다. 합체되어 나란히 누워 있는 다섯 세트의 새우와 홍합이 보기만 해도 춥다. 나는 이미 배가 불러 아쉽게도 더 이상 맛을 느낄 수가 없어 주문한 것을 후회했다. 역시 과유불급이었나 보다.

기분 좋게 먹고 취해 식당을 나오니 그제서야 깜깜한 어둠 속에서도 포르투의 정겨운 집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가로등 불빛 아래에서 보는 건물들은 한 건물, 심지어 한 벽 내에서도 서로 다른 색을 가지고 있었다. 날이 밝으면 얼마나 선명하게 보일까? 비록 습하고 흐린 겨울이지만 내일이면 이 시기만이 보여줄 수 있는 포르투 만의 분위기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 밤의 포르투 골목은 따듯한 느낌이다. <사진=송정하>

걷는 동안 알코올의 효과가 떨어지더니 슬슬 돌아갈 숙소가 걱정이다. 추위로 인한 고통을 잊을 정도로 인사불성이 되도록 술을 마셨어야 하나 갑자기 후회가 몰려오기 시작할 무렵 내 의지와는 다르게 금 새 호텔에 도착해 버렸다. 로비에 맡긴 열쇠를 돌려받고 계단을 오를 무렵, 어딘 가에서 영화 ‘일 포스티노(Il postino)’의 마리오를 닮은 매니저 분이 이불 두 개를 들고 나타났다. 추울 테니 들고 올라가라는 것이다. 그러고는 늦은 시각이라 이미 운영이 끝난 로비 한 귀퉁이의 작은 바(bar)에서 따뜻한 커피까지 내려 건넨다. 나는 내가 아는 유일한 포르투갈어인 ‘오브리가도(Obrigado)’를 고개까지 숙여가며 외치고 방으로 올라갔다.

그러나 이 동굴은 이불 두 개를 추가한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었다. 나는 양말을 신고 외투를 제외한 모든 옷을 입은 채, 피로와 얼마 안 남은 알코올 기운에 의지해 포르투에서의 첫날밤을 보냈다.

▲ 송 정 하

법대를 나왔지만 와인이 들려주는 이야기가 좋아 프랑스 보르도로 떠났다. 보르도 CAFA에서 CES(Conseiller en sommellerie:소믈리에컨설턴트 국가공인자격증), 파리 Le COAM에서 WSET Level 3를 취득했다. 사람이 주인공인 따뜻한 와인이야기를 쓰고 싶다.

소믈리에타임즈 칼럼니스트 송정하 noellesong0520@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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