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짜인 틀 안에 있다는 것이 얼마나 편안하고 아늑한 지! 그 안에는 수많은 규칙이 있지만 별로 불편함을 느껴본 적은 없다. 그래서 길거리에 침이나 껌을 뱉는 일이 경범죄를 넘어 중 범죄로 취급된다 해도 나랑은 별로 상관이 없는 일이다. 나는 거리에 침이나 껌을 뱉지 않기 때문이다.

규율이 많은 사회는 대부분 예외 없이 아귀가 딱딱 들어맞고, 체계적이다. 그 속에 사는 사람도 그렇게 산다. 논리적이고 합리적이어야 하며 결론은 충분한 근거가 있어야 하고 무엇보다 실현 가능해야 한다. 이 완벽한(?) 시스템을 일단 구축하면 그 안에서 그것을 지키고 잘 살면 된다.

세상에는 크게 나누어 두 가지 법률체계가 있다고 말한다. 로마제국의 시민법에서 출발하여 오늘날 독일과 프랑스 그리고 일본을 거쳐 우리나라가 채택한 대륙법 체계가 그중 하나고, 영국과 미국, 그 외 호주와 캐나다 등 영국의 식민지였던 국가들의 법체계인 영미법체계가 그것이다. 웬 뜬금없는 법 강의이냐 물을지 모르지만 잠깐 한번 들어 보시길. 세상의 모든 이분법이 그렇듯 너무도 단순하니 말이다.

대륙법 체계는 성문법(成文法) 주의라고도 한다. 각 부문의 법들이 성문화 즉 말 그대로 법전 위에 적혀 있다.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이 법체계 안에서 적용되고 운용되기 때문에 이 안에 우연적인 것과 현대인의 관점에서 비합리적인 판단은 들어갈 여지가 없다. 반면에 영미법은 성문화된 법보다는 그때그때 개개 사건의 판결에 의한 판례가 쌓인 결과로 이루어져, 불문법(不文法) 또는 판례법이라고 불린다. 이성적인 몇몇이 아니라 일반 시민의 상식적인 판단에 근거한다 하여 보통법이라고도 한다.

생각의 차이

사람이 시스템을 만들지만, 시스템이 사람을 만들기도 하나보다. 내가 언제부터 ‘대륙법 체계적’(?)인 인간이었는지 모르겠다. 사소한 것에서부터 질서와 체계를 잡고 싶어 안달이다. 예를 들면 번역된 영미권의 글을 읽을 때가 그렇다. 가슴으로 읽는 문학 작품이 아닌, 상황을 분석하고 의견을 표출하는 글을 읽고 이해하는 데에 늘 애를 먹는 편이다. 저자의 생각이 끊임없이 가지치기를 하고 그들만의 비유가 남발한다. 끝맺음은 또 어떤가. 요즘 유행하는 영화처럼 열린 결말이다. 무슨 얘기가 하고 싶은 거야? 보기 좋게 나열된 목차는 글 전체를 빠짐없이 아우르고 기승전결이 분명해야 하며 논리는 모순에 빠지지 않아야 하거늘 이 얘기 했다 저 얘기 했다가 삼천포로 빠지더니 결론도 없이 흐지부지 다. 일정한 체계도 없이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 같은 판례에나 의존하는 사람들의 사고방식을 내가 어떻게 이해하겠는가!

줄 세우고 질서 잡기 좋아하는 나의 방식이 생활 전체를 지배하게 될 때에 이것은 곰곰이 생각해 봐야 할 일이 된다. 다시 말해 내가 생각하는 상식과 합리가 스스로 만들어 놓은 틀 안에서 맴돌고 고여 있을 때에, 그렇다고 고집이 아주 세지도 않은 나는 슬슬 의심이 든다. 우주 같은 뇌를 가진 인간의 생각을 모순되지 않는 체계 안으로 밀어 넣는 것이 가능한가? 엉뚱한 생각이 반드시 실현 불가능한 생각일까? 우연적인 요소를 배제한 완벽한 체계를 만드는 것이 과연 가능한가? 어쩌다 입에 이물질이 들어가 길거리에서 침을 뱉어야 만 하는 상황도 있지 않을까?

의심이 많아질수록 틀 안을 벗어나 보고 싶은 욕망은 강해진다. 나라고 처음부터 ‘남들은 자유를 사랑한다지만 나는 복종을 좋아하지요’ 쪽의 타입으로 태어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일렬종대로 줄 지어져 꽉 들어찬 목차를 부수고 의식의 흐름 같은 생각들을 늘어놓으면서 결론도 없는 이야기들을 해 보고 싶어진다. 소위 말하는 리버럴한 사람이 되어 작은 가능성에도 열린 마음을 갖고, 우연과 의외로 가득 찬 거친 세상을 직접 보고 싶은 생각이 드는 것이다.

▲ 틀 안에 있으면 아늑하지만, 가끔은 창문 밖의 세상으로 나가고 싶어진다. <그림=송정하>

가치관과 사고방식은 사람을 지배하는 무서운 것이지만 따지고 보면 그래서 세상이 재미있는 것 같기도 하다. 각자 처한 환경이 생각의 차이를 만들고 그들만의 체계가 생겨 독특한 개성이 되기 때문이다. 합리와 이성 그리고 전통의 유럽과, 개방성과 유연함으로 무장한 영미의 사고 체계가, 각 대륙이 와인을 접근하는 방식에도 그대로 이어진다는 사실이 그래서 흥미롭다. 네, 그렇습니다. 유럽의 와인과 신대륙 와인의 차이를 이야기해 보고자 이토록 장황한 설명을 한 것이랍니다, 네.

역사적 지리적 차이

와인의 세계에서 구세계 란, 현대적인 와인 양조의 전통이 처음 유래한 곳을 의미하는데 대체로 역사와 지리를 구분하는 일반적인 개념과 비슷하다. 즉 프랑스와 이탈리아, 독일 등의 유럽 국가들이 이에 해당된다. 그중 프랑스의 영향력은 절대적이라 전 세계 와인 메이커들의 입맛을 결정 지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와인 제조의 기준을 프랑스에 맞추고 그들의 와인과 비슷한 맛을 내려고 모든 노력을 기울여 왔기 때문이다. 프랑스 보르도 와인과 샴페인의 블렌딩 기술은 균형 잡힌 와인이 무엇인가를 보여 주었고, 오늘날 전 세계 대부분의 와인 생산국에서 흔히 볼 수 있어 ‘국제적인 품종’이라 불리는 카베르네 소비뇽과 피노 누아, 그리고 샤르도네와 시라 등의 고향이 바로 프랑스이다.

프랑스는 엄격한 규제로 가득한 와인 제조법으로도 유명하다. 지역에서 허용하는 특정 포도 품종을 사용해야 하고 그 재배 방식과 수확 시기, 알코올의 최소 도수와 숙성 방법 등이 명시된 복잡한 규정은, 대륙법 체계의 성문 법전과 다르지 않다. 그들은 수 세기 동안 이어 온 전통을 소중히 여기기 때문에 해당 지역의 특성 즉 고유한 토양과 기후 조건, 자연환경을 아우르는 개념인 ‘테루아(terroir)’를 강조한다. 그래서 와인 라벨도 생산자와 생산 지역을 표시하는 데에 중점을 둔다. 소비자 입장에서는 여간 불편한 게 아니지만, 한번 해독(?) 하고 나면 해당 와인을 신뢰할 수 있게 된다.

반면 미국과 호주, 남미 등 신대륙 국가들은 상대적으로 자유롭다. 유럽의 와인을 모방하는 데서 출발했으나 점차 개방적이고 창의적인 발상으로 그들만의 새로운 와인을 개발하고 있다. 사적 자치를 최대한 용인하기 위해 최소한의 규제를 적용하는 영미 국가들이 그렇듯 각종 규제로부터 자유롭고, 아낌없는 투자와 발달된 기술을 활용하는데 주저함이 없다. 그들은 실험을 좋아한다. ‘왜 안되죠?’에서 출발한다. 희박한 대기를 가지고 있는 화성에 굳이 진출하려고 하는 어느 대담한 기업인처럼 말이다!

발상의 전환과 새로운 기술은 소비자들의 요구에 부합하는 와인을 만들고자 하는 의지다. 신대륙와인을 고를 때에는 프랑스 와인 라벨에서나 볼 법한 위압적인 고딕체의 지역 명칭과 생산자 이름과 씨름하지 않아도 된다. 그들은 친절하게도 포도 품종을 표기함으로써 소비자들이 대강의 맛을 유추할 수 있도록 돕는다. 종종 화려한 현대적 그림이나 그래픽이 들어간 라벨로 단번에 소비자의 눈을 사로잡기도 한다. 간편한 스크류 캡 마개와 종이 팩 혹은 캔에 담긴 와인은 또 어떤가. 그들에게 와인은 틀에 박힌 술이 아니라 다양한 가능성이 있는 아이디어 상품이다.

맛의 차이

신세계와 구세계의 와인은 지리적인 요소 이외에도 맛과 향에 있어서 확연한 차이가 난다. 유럽의 와인은 대체로 라이트 바디, 즉 입안에서 느껴지는 질감이 가벼운 편이다. 알코올은 낮고, 산도는 높으며 과일 향은 은은하고 상대적으로 미네랄리티가 돋보여 신선한 타입이다. 신대륙 와인은 반대로 맛에 무게감이 있는데, 알코올이 상대적으로 높고 산도는 부드러우며 와인 잔을 요리조리 돌리지 않아도 과일 향이 단번에 느껴진다. 이는 대체로 선선한 지역의 와인과 따뜻한 기후 와인의 차이로 설명할 수도 있다.

신대륙의 와인은 아주 화려하다. 눈 크고 코 크고 입도 크며 아주 글래머러스한 몸매를 가진 사람이라고 나 할까. 도저히 밋밋한 구석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어 멀리서도 단번에 눈에 띄는 미인 같다. 때때로 부담스러울 정도로 말이다. 반면에 구대륙의 와인은 슬림 한 편이다. 눈도 살짝 옆으로 찢어지고 코와 입도 작은 편이며 호리호리한 몸매를 가지고 있지만 알고 보면 꽤 다부진 몸을 가진 사람이다. 눈에 확 띄지는 않지만 어쩐지 세련되고 교양 있으며 은은한 매력을 풍기는 타입처럼 말이다. 표현이 느끼해 와인 스노브 같다고 해도 어쩔 수 없다.

단순한 생김새도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면 복잡다단하듯이 사실 사회를 규율하는 체계도, 와인도 이분법으로는 충분히 설명할 수 없다. 어느 한 쪽이 절대적으로 우월하지 않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서로를 기웃거린다. 삼계탕에 (굳이) 인삼, 수정과에 (굳이) 잣을 넣듯, 선조가 이어온 어느 정도의 노하우와 전통, 체계의 기반 없이 창조를 일굴 수는 없을 것이다. 반대로 틀과 전통만 고수하면 예상치 못한 상황 앞에서 발을 동동 구르게 될 것이다. 그래서 신세계의 와인 생산자도 유럽식 블렌딩 기술 등을 따르고 구세계 역시 소비자의 달라진 취향에 귀 기울이며 시대 변화에 적응해 나가는 것이다.

그래서 위에 말 한 맛의 스타일이란 것도 극단적인 비유일 뿐이고 수많은 예외가 존재한다는, 너무도 죄송스럽고 맥 빠지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다. 신세계에도 매끈하고 날씬한 와인이 있고, 유럽이라고 대담하고 화려한 와인이 없지는 않은 것이다. 그런데 와인을 마시는 우리의 입장에서 걱정할 일은 아니다. 모르는 와인을 두고 시음을 한다고 치자. 내가 마신 피노 누아가, 맑은 루비색에 은은한 숲속 같은 오묘한 향기를 풍기는 것이, 아무래도 프랑스 부르고뉴 즉 구대륙의 와인인 것 같다. 짜잔 하고 라벨을 감싼 덮개를 벗기는 순간, 역시 예상대로 라면 정답을 맞힌 쾌감에 너무도 기쁠 것이다. 그러나 미국이나 호주의 와인이라면? 이게 바로 그 예상을 벗어나는 경우라서 흥미로운 것이다. 전형과 예외, 이 두 가지를 벗어나지 않는다. 세상에는 두 가지 정답이 있는 것이다. 네, 세상이 다 그런 거죠.
 

▲ 송 정 하

법대를 나왔지만 와인이 들려주는 이야기가 좋아 프랑스 보르도로 떠났다. 보르도 CAFA에서 CES(Conseiller en sommellerie:소믈리에컨설턴트 국가공인자격증), 파리 Le COAM에서 WSET Level 3를 취득했다. 사람이 주인공인 따뜻한 와인이야기를 쓰고 싶다.

소믈리에타임즈 칼럼니스트 송정하 noellesong0520@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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