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니스트 신재연] 스페인의 동부, 지중해에 가깝게 위치한 와인 생산지 후미야(D.O. Jumilla)는 한국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낯선 지명이다. 무르시아(Murcia) 지방에 속하는 후미야의 와이너리들은 오렌지와 항구도시로 유명한 발렌시아(Valencia)보다 남서쪽의 내륙에 위치해 있고, 지중해에 가깝기는 하나 실제로는 산지에 둘러 쌓인 고원에 있어 스페인 내륙의 심장부인 라 만차(La Mancha) 지방과 연결되는 고온 건조한 대륙성 기후의 영향을 받는다.

이곳은 연평균 일조시간이 3,000시간에 달하고 강수량은 300l/m2 를 넘지 않는데, 비가 일정하게 오는 것이 아니라 폭우가 내리거나 가뭄이 지속되는 불규칙적인 기상 환경을 가지고 있다. 기온 또한 연평균 16°C라고는 하지만 겨울에는 영하를 밑돌고 여름에는 40°C를 웃도는 극심한 차이를 보이며 대륙성 기후가 강하게 나타난다.
 

▲ 고온 건조한 대륙성 기후의 영향을 받는 후미야의 포도밭 <사진 = Consejo Regulador de la Denominación de Origen Jumilla>

다행히 해발 400미터에서 800미터 사이에 위치한 포도밭은 갈색, 회갈색 밑 회색을 띄는 석회질 토양이 대부분인데 자갈이 많은 거친 형상이라 투수성이 좋고 수분 저장력이 높아 긴 가뭄을 견딜 수 있게 해준다. 또한 토양 자체가 매우 척박하여 필록세라의 증식을 억제하며 염분이 적고 강한 알칼리성을 띄는 토양은 메마르고 성긴 구조라 통풍에 유리한 면이 있다.

이런 모진 자연 환경에서 살아남아 후미야 고유의 떼루뇨(terruño – 프랑스어 떼루아(terroir)와 같은 스페인어로 와인이 만들어지는 전반적인 환경을 의미)를 가장 잘 전해주는 스페인의 토착 포도 품종이 모나스트렐(Monastrell)이다. 이 생명력 강한 모나스트렐은 후미야 재배 면적의 80% 이상을 차지하여, 단연 이곳이 본고장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껍질이 두껍고 알이 작은 특성을 지닌 모나스트렐은 색이 짙고 타닌이 풍부한 와인의 특징으로 연결되는데, 후미야의 모나스트렐은 특히 높은 일조시간을 견디고 건조하게 영글어 당도까지 더 높기 때문에 와인의 알코올 함량이 보통 14.5도를 웃돈다.
 

▲ 회갈빛 석회질의 토양으로 이루어진 자갈밭 <사진 = Consejo Regulador de la Denominación de Origen Jumilla>

이런 후미야 모나스트렐의 개성은 와이너리들을 통해 재해석되고 한병의 와인으로 전해지는데 대표적인 곳이 힐(Gil) 가족이 경영하는 후안 힐 와이너리(Juan Gil Bodegas Familiares)이다. 1916년 후안 힐 히메네즈(Juan Gil Jiménez)에 의해 설립된 후안 힐 와이너리는 이제 스페인 전역에 10개의 와이너리를 보유한 거대 그룹이 되었지만, 그 심장은 후미야에 있다. 후안 힐이 본격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2004년 로버트 파커(Robert Parker)가 후미야에서 생산한 후안 힐의 와인을 보르도(Bordeaux) 와인의 반값에 마실 수 있는 너무나 훌륭한 보르도라고 평가한 것은 물론, 몇 년 뒤에는2004년에 생산한 엘 니도(El Nido)에 99점을 부여하면서부터다.

하지만 엘 니도는 까베르네 소비뇽(Cabernet Sauvignon)과 모나스트렐을 블렌딩해서 만들고 보통 까베르네 소비뇽 비중이 70% 정도로 모나스트렐 비중보다 더 높다. 그래서 엘 니도가 후미야 모나스트렐의 개성을 보여준다고 보기는 어렵다. 가격 또한 100유로 이상을 호가하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매일 마시기에는 부담스런 가격이다. 하지만 엘 니도는 후안 힐의 양조 역량을 보여주는 정수이자 후미야 지방의 명성을 세계에 알리는 전환점이었다.

한편, 진정 후미야의 모나스트렐을 느낄 수 있게 해주는 것은 대중적으로 친근하게 마실 수 있는 라인인 후안 힐 골드, 후안 힐 실버, 후안 힐 블루 레이블이다. 골드와 실버는 모나스트렐 단일 품종으로만 양조하지만, 블루는 모나스트렐 60%, 까베르네 소비뇽 30%, 쉬라(Syrah) 10%를 블렌딩하여 만든다.
 

▲ 후안 힐 실버 레이블 <사진 = 보데가스 후안 힐(Bodegas Juan Gil) 공식 홈페이지>

후안 힐 실버의 경우 마드리드 레스토랑에서 많이 소비되는 인기 와인인데, 평균 2,500 kg/ha 밖에 생산하지 않는 포도밭의 모나스트렐로 만들기 때문에 와인의 농축미가 남다르다. 수확한 포도는 스테인리스스틸 탱크에서 보통 20 – 25일간 25°C를 유지하며 천천히 저온 발효하여 과육의 잠재력을 충분히 끌어낸 뒤에 프랑스산 오크 배럴에서 말로락틱 (Malolactic) 이차 발효를 거쳐 다시 프랑스산 오크 배럴에서 12개월간 숙성해 만든다.

이렇게 만들어진 와인은 검붉은 체리 빛을 가볍게 휘감는 보랏빛에서 농익은 붉은 베리 종류와 볶은 커피 향, 스파이스, 훈연이 느껴지고 입안에서는 식욕을 돋구는 과실의 풍미와 감칠맛이 도는 우아한 타닌이 복합적으로 느껴지면서 자연과 인간이 빚어낸 조화가 안정감 있는 구조를 이루어 힘찬 느낌이 든다. 한 모금을 넘긴 뒤에는 모나스트렐 특유의 감미로운 여운이 길어 그 다음 모금을 자연스럽게 부르며, 시간을 두고 변화하는 향과 풍미가 매력을 더한다.
 

▲ 까사 로호에서 생산하는 마초 맨 모나스트렐 <사진 = 까사 로호(Casa Rojo) 공식 홈페이지>

힘차고 강한듯 하면서도 부드럽고 감미로운 후미야의 모나스트렐 와인. 그래서 까사 로호(Casa Rojo)와 같이 개성 넘치는 레이블을 좋아하는 와이너리에서는 이를 두고 MMM, 마초 맨 모나스트렐(Macho Man Monastrell) 이라고 이름을 지었는지도 모르겠다. 한국에서도 까사 로호, 후안 힐, 블레다(Bleda) 등에서 생산한 후미야 와인을 맛볼 수 있다고 하니 후미야의 모진 기후를 견디고 잔에 담긴 모나스트렐을 만나보자.

▲ 신재연 소믈리에

[칼럼니스트 소개] 대학 졸업 후 8년여 직장생활을 뒤로 하고 스페인 마드리드에 위치한 IE Business School에서 MBA 과정을 밟았다. 이후 Escuela Española de Cata 에서 Sommelier 과정을 이수하였으며, 스페인의 와인과 먹거리를 공부하고 이를 알리기 위해 일하고 있다.

소믈리에타임즈 신재연소믈리에  jane.jy.shin@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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