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정하의 와인스케치북] 아로마가 열리기까지 (후유증 ①)

2022-09-06     송정하

강의를 듣는 분들로부터 가끔 그런 소리를 듣는다.

“비싸게 산 프랑스 와인인데, 편의점에서 산 만 원도 안 되는 신대륙의 어느 메를로 와인보다 향이 강하지 않은 것 같아요. 좋은 와인일수록 풍기는 향이 강렬하다면서요. 어떻게 된 걸까요?”

나는 이렇게 대답한다.

“이 와인은 아주 섬세하답니다. 거칠고 단순한 몇 가지 향으로 단번에 사람의 코를 찌르는 와인이 아닌 거죠. 잔을 살살 돌리면 복합적이고 오묘한 아로마가 살며시 퍼지다 그 향은 곧 강하고 오래 지속될 거예요."

복합적이고 오묘한 아로마는 어디로 갔을까? 달콤한 산딸기와 블랙커런트 등의 베리류, 한 여름 에어컨 냉기로 가득한 삭막한 실내에서도 아름답게 펼쳐지는 제비꽃의 향긋함, 새벽 숲의 신선한 향기, 그리고 송로버섯! 그 많은 향은 다 어디로 갔을까? 부르고뉴 메르퀴레(Mercurey) 지방의 일 등급 포도밭 와인에서 기대한 향기를, 나는 맡을 수 없었다.

주변 사람 다 겪고도 나만 멀쩡했었다. 비록 저질 체력일지 언정 최악의 역병 바이러스가 침범할 수 없는 또 다른 의미의 단단한 육체를 지니고 있었구나, 나도 좋은 점이 하나는 있구나, 그렇게 생각했었다. 그러나 더위와 냉방병의 악순환으로 맥을 못 추는, 내게는 가장 힘겨운 계절인 여름의 한복판에, 나는 결국 코로나에 걸리고 말았다.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시작은 미약한 법이다. 흔한 감기 몸살 같았다. 그러나 그날 밤, 평소에는 더워 덮지도 않는 풍기 인견 이불을 돌돌 감아도 살을 에는 추위를 느끼고, 다음 날은 칼이 목을 쑤시는 고통으로 침조차 넘길 수 없었다. 집에서 500 미터 거리에 있는 이비인후과에서 검사를 받고 휴대폰에서는 코로나 양성이라는 요란한 문자가 울리는 동안 나는 말 그대로 집에 기어서 왔다.

목이 이 지경인 걸 보니 아무래도 인후통이 있다는 말을 안 했던 것 같다. 나는 병원에 전화를 걸어 처방약이 뭔가 부족한 것 같다는 생떼를 쓰기 시작했다. 아이처럼 칭얼대는 나에게 의사는, 지금 누구나 겪는 거예요, 아파도 억지로라도 뭔가를 먹고 약을 드세요, 이 고비만 넘기면 돼요 하며 달래듯 말했다.

수십 년 동안 쌓아 온 최소한의 이성과 판단력은 어디로 갔을까. 나는 완벽한 어린애가 되어 먹지도 않고, 울고 짜증만 내다가 기어코 화장실에서 정신을 잃고 쓰러지고 말았다. 변기에 머리를 찧고 쓰러져 변기가 깨지고 물이 콸콸 흘러나왔다는데 (어떻게 하면 머리로 변기를 깨뜨릴 수 있는지, 집 화장실에 CCTV가 없으니 알 수 없는 노릇이다), 나중에 들으니 부지런한 수리기사님께서 사건(?) 2시간 만에 호텔식이라는 새로운 변기로 교체하고 가셨다고 한다.

반쯤 빈사상태가 되어 침대에 퍼져 있는 동안에도 나는 프랑스에서 이런 일을 겪을 경우를 떠올리고 있었다. 변기 수리 업체에 일단 예약(그 유명한 랑데부)을 잡는 연락을 한다. 평일이라면 변기에 머리를 박고 있는 나를 불쌍히 여겨 오늘 방문해 주실지도 모른다. 우선 수리 견적을 내야 한다. 그리고 견적에 맞는 변기를 들고 온다는 분들은 그날 유난히 바빠서 혹은 나와의 약속을 잊어버리고 여름 바캉스에 가실 것이다. 그동안 나는 동전과 두루마리 휴지를 들고 근처 유료 화장실을 찾아 이리저리 돌아다녀야 할 것이다. 이런 상상을 했던 걸 보니, 지금 생각해 보면 역시 죽을 정도로 아픈 건 아니었던 것 같다.

고통에 몸부림치던 밤 11시 즈음, 이번에는 화장실 수건걸이에 머리를 부딪쳐 다시 한번 쓰러지고, 급기야 구급차에 태워졌다. 세상에서 가장 친절한 구급 대원분은 길 한 모퉁이에 멈춰 선 구급차 안에서 2시간 동안 서울과 서울 외곽의 모든 병원에 전화를 걸며 같은 말을 기계처럼 반복했다.

“코로나 양성 환자인데요, 넘어져 머리를 다쳐서 검사가 필요합니다. 격리실 있나요? “

머리에 그저 커다란 혹이 났을 뿐인데. 수액이라도 맞을 줄 알았더니 부딪친 머리 때문에 응급 CT 촬영이라니, 나는 누워 있기도 민망하고 죄송스러워져서 집으로 가고 싶었다. 심정지가 오지 않는 이상 코로나 양성 환자가 곧장 응급실에 갈 수는 없다고 한다. 곧장 갈 수 없는 가벼운 증세를 오히려 감사해야 했던 거다. 결국 인천의 한 병원이 나에게 문을 열어 주고, 나는 결과가 뻔한 CT 촬영을 한 후 무심히 병원을 걸어 나왔다. 그리고 몇 주가 지난 지금, 앳된 목소리로 열심히 전화를 돌리던 구급 대원의 목소리가 아직도 귀에 들리는 것만 같다. 가련한 상황들을 해결하기 위해 또 얼마나 노력하고 계실까 생각한다.

코로나 선배가 되는 나의 엄마는, 다시없을 2022년의 화사한 봄을 코로나로 인해 완전히 잃어야만 했었다. 워낙 몸이 약해 백신만 맞아도 며칠간 몸살을 앓을 정도이니 코로나 양성으로 인한 격리 역시 혹독한 건 당연했다. 요리가 주된 취미이자 특기인 엄마는 회복 후에도 특히 냄새를 못 맡고 맛을 느끼지 못하는 걸 힘들어하셨다. 그러던 어느 날, 평소 좋아하던 커피의 헤이즐넛 향이 미세하게 코의 후각세포를 자극하는 순간, 살아 있음을 맹렬히 느꼈다, 그래서 행복했다고 말씀하셨다.

프랑스에서 몇 개의 와인 시험을 거치는 동안 시음테스트는 늘 나에게 힘든 부분이었다. 타고난 코가 예민하지 못하고, 시험이라는 특수한 상황에서 긴장을 하는 성격 탓에 모자란 부분은 늘 지식으로 채우곤 했다. 그래도 몇 해를 와인과 함께 보내는 동안 내게도 조금은 구르는 재주가 생겨, 와인의 대체적인 품종과 나이, 그리고 유럽과 신대륙, 나아가 나라의 특징들을 구별하게 되어 얼마나 신기했는지 모른다.

그러나 코로나도 지나간 일이 되고, 가끔 도대체 어떻게 머리로 변기를 깼을까 골몰하며, 팔짱을 끼고 변기를 한참 쳐다보는 동안에도 균형 감각에 전혀 이상을 느끼지 않을 정도로 건강해진 지금까지, 나의 노력형 후각은 쉽게 돌아올 줄 모르는 것 같다. 어느 연구 결과에 의하면 사람은 약 10,000 가지 이상의 냄새를 구별할 수 있다고 하는데, 코로나 이후 나의 감각이 조금 무뎌진 걸 감안하면 그중 1% 즉 100 가지 냄새는 맡을 줄 알아야 하는 거 아니냐 말이다. 미각의 80 퍼센트 이상을 차지하는 것이 후각이기 때문에, 미각도 잃어 약 2kg의 살이 빠진 것은 매우 환영할 만한 일이긴 하지만 말이다.

현재 상황으로 보아 와인의 은은함 이니 화려함 따위를 따질 입장은 아니지만, 나는 개인적으로 와인 마개를 여는 순간부터 냄새가 진동하는 와인보다, 잔에 따른 후 몇 번을 돌린 후 슬그머니 향이 피어오르는 와인을 더 좋아한다. 이유는 별것 없다. 그 편이 더 재미있기 때문이다. 그 은근함이 마음에 든다. 처음부터 과도하게 활발하고 모든 걸 보여주는 사람보다, 지내고 보니 피식 웃음 나오게 하는 희한하게 매력적인 구석을 보이는 사람처럼. 그리고 그쪽이 더 향기가 더 오래간다는걸, 아는 사람은 알 것이다.

이런 사람은 어떻게 보면 시동이 늦게 걸리는 사람이다. 남이 보기에 언뜻 소극적이고, 닫혀 있는 걸로 보인다. 그러나 영원히 닫혀 있지 않다. 열리기까지 시간이 걸리지만, 한번 열리면 또 놀라운 모습을 보여준다.

진짜 자기 모습을 드러내기까지 시간이 걸리는 사람도 있다. (그림: 송정하)

여기에 나의 경우를 끼워 넣자면 (절대 자랑이 아닌데 듣기에 따라 그렇게 들릴 수도 있음에 미리 죄송한 말씀드립니다) 나 야 말로 입을 벌리고 표현하는 데 시간이 굉장히 오래 걸리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이 앞에 나와 강의를 하는 직업을 가지고 있으면 강의 전 약 한 시간 전부터 헤비메탈 음악을 듣든, 웃겨 죽겠는 예능을 보든 해서 발밑에서 잠자고 있는 나의 에너지를 얼굴까지 끌어올려야 한다. 평소에 입을 작게 오므리고 뚱하니 ‘오ㅡ’ 하는 상태를 유지하는 프랑스인들이 어느 날 갑자기 입을 크게 벌리고 ‘오우 마이, 가앗! 퐌 타ㅡ스틱!!!’ 하는 영어가 쉽게 나오지 않는 것과 같다고나 할까.

와인과 사람, 사물이 다양한 데에는 다 이유가 있나 보다. 왜냐하면, 지금 나에게는 당장 나의 코를 뚫어 줄, 그래서 살아있음을 맹렬히 느끼게 할 비타민 같은(한두 가지 단순한 향이라도!) 와인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흔들고 두드리지 않아도 활짝 웃으며 공간을 심플한 향기로 가득 채워 줄 그런 와인 말이다.


법대를 나왔지만 와인이 들려주는 이야기가 좋아 프랑스 보르도로 떠났다. 보르도 CAFA에서 CES(Conseiller en sommellerie:소믈리에컨설턴트 국가공인자격증), 파리 Le COAM에서 WSET Level 3를 취득했다. 사람이 주인공인 따뜻한 와인이야기를 쓰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