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정하의 와인스케치북] 마이 디어 빈티지(My dear Vintage)
‘적어도 니 인생의 주인공은 너잖아’ 하고 계속 말을 거는 것만 같았다.
가득 담긴 빨래 바구니가 휘청거리고 쓰러질 때마다 그 옆에 서 있는 너도 같이 넘어져 베란다 타일에 달그락 달그락 소리를 내며 이리 데구르르 저리 데구르르 한다. 그러다 좁은 바구니에서 뛰쳐 나온 옷가지들에 닿을 것 같으면, 너의 라벨에 덕지덕지 붙은 곰팡이가 행여나 빨랫감에 들러붙기 라도 할까 구르는 너를 얼른 일으켜 세우고 너를 만진 더러운 손을 재빨리 씻는다. 베란다가 아무리 좁다 하기로 서니 왜 하필 빨래 바구니 옆에 너를 두었는지 모를 일이다. 아무튼 벚꽃도 다 진 완연한 봄도 왔겠다, 떨어질 줄 모르는 이 지독한 기침은 분명 이 먼지 가득한 집을 청소하지 않으면 낫지 않겠다는 판단하에, 나는 결심 했다. 몇년 전, 21세기에는 어울리지 않는 결핵에 걸렸다는 이유로 키우던 애꿎은 강아지를 다른 곳에 보내야 했던 그 때 처럼. 이번에는 너의 차례다. 너는 곰팡이가 너무 많아 보기만 해도 그 포자를 나에게 날릴 것만 같다. 그 안에 니가 품고 있는 코르크 마개도 건강하지 못한 청갈색의 기이한 색을 띄고 보글보글 끓다 만 거품 모양을 화석처럼 남겨두었다. 아무래도 너를 놓아줄 때가 된 것 같다. 아니, 이제는 속 시원히 너를 치워버리고 싶다. 사실이든 아니든 내 기침은 너 때문 인 것 같다.
너를 처음 본 곳은 보르도의 작은 와인숍 이었다. 영화에서 처럼 그 날 만든 신선한 크루아상을 사기 위해 동전을 들고 빵 가게로 가는 길이었다. 그 곳에서 비스듬히 누워 있는 너를 보았다. 내가 태어난 연도의 숫자를 가슴팍에 달고 있는 너를 본 순간, 데리고 와야 한다는 것을 바로 느꼈다. 나이가 같아야만 친구가 될 수 있는 한국인 특유의 배타적이고 끈끈한 동질감을 너에게서 느꼈을까. 사람을 사귀는데 나이는 중요치 않다고들 하지만, 솔직히 말해 얼른 서열부터 정리하고, 나와 같은 해에 태어난 사람을 골라 아무렇지 않게 ‘야!’ 하고 부를 수 있는 친구가 필요했다. 그 무례하고 정감 어린 호칭이 어른의 세계에서는 아주 드물고 그래서 매우 귀하다는 걸 깨닫던 때다. 나와 동갑인 너를 발견한 순간 너는 내 친구라는 것을 단번에 알았다. 너를 두른 라벨이 이미 우리의 나이를 짐작하게 했지만 새 옷과 달리 적당히 바랜 그것은 꽤 근사한 옷이었다. 나는 그런 너를 아기 다루듯 한아름 안고 집으로 왔다.
너는 ‘샤또 드 레인느 비뇨(Château de Rayne Vigneau)’라는 길고도 고풍스러운 이름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구글에서 너의 이름을 한국어로 치면 웬 비뇨기과 이름들이 줄줄이 나와 나를 당황케 하기도 한다(프랑스어는 이게 참 문제다). 알파벳으로 다시 검색하니 너의 신상이 주르륵 뜬다. 너의 이름과 역사, 소테른이라는 너의 고향, 너를 만든 품종과 달콤한 너의 정체성 그리고 태어났을 때의 환경. 그것들을 조합한 너에 대한 종합적인 평가가 나온다. 나와 같은 해에 태어난 너는 1등급이라는 태생적 타이틀은 가지고 있지만, 다른 해에 태어난 형제들에 비해 그다지 대단할 건 없다는 것이 판정단의 결론이다. 그 평가를 바탕으로 한 너의 가격 역시 살아서 견뎌온 너의 세월에 비하면 그다지 높게 매겨져 있지 않다.
우리가 비록 태어나 자란 곳은 다르지만, 같은 해에 태어났다는 것을 알려주는 그 네 개의 아라비아 숫자는 이상한 감정을 불러 일으키고는 했다. 짧은 세월인지 긴 세월인지, 절대적으로 판단할 수 없는 시간들 속을 가로질러 나를 저 만치로 데려다 놓았기 때문이다. 세상의 주인공이 내가 아니고, 나는 수많은 존재들 중 하나일 뿐이라는 것을 이미 오래전 깨달았지만, ‘적어도 니 인생의 주인공은 너잖아’ 하고 계속 말을 거는 것만 같았다. 같은 세월동안, 잘 지냈냐고 묻는 것 같았다. 그러면 나는 외울 수 있는 몇 안 되는, 윤동주의 시 한 편이 떠오른다. 우물에 비친 사나이가 미워서 돌아가다가, 생각하니 다시 그리워지는 나의 자화상. 너의 빈티지를 볼 때마다 내가 미워졌다가, 다시 가엾어 졌다가 오락가락 한다. 좀 더 멋진 인생을 꾸려 나가는 사람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은 있지만, 판정단의 별 표시처럼 나의 인생을 점수 내지는 않으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가 저명한 전문가 들로부터 줄곧 회자되는 빈티지임을 인정받고 그에 걸 맞는 값어치를 가지고 있었다면, 내가 과연 너를 지금의 모습대로 내버려 두었을까, 싶다. 역시 내게 너는 세상의 수많은 와인 중 하나에 불과했던걸까. 유학생활을 접고 돌아오는 비행기내에서 너의 상태를 여러 차례 확인하며 서울의 집까지 데리고 왔지만, 잠시 머물던 부모님 집에서 나오며 너는 그대로 두었다. 새로 마련한 나의 집이 좁다는 이유였지만 솔직히 말하면 이미 내 안중에 너는 없었다. 나는 더 이상 학생이 아니고, 일을 하며 알게 된 더 큰 와인의 세계를 보았기 때문이다. 태생적 신분은 말 할 것도 없고, 그 능력과 재능 그리고 그것들을 증명할 값어치까지 누가 봐도 천재적인 와인은 넘쳐났다. 그동안 내가 모아 온 와인만 봐도 이미 너가 끼어들 자리는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나의 엄마에게 전화가 왔다. 잠시 맡아 키우던 강아지가 병이라도 난 듯, 엄마의 목소리는 미안함과 안타까움으로 가득 했다. 너의 코르크가 어느 순간 아래로 쑥 빠져 병 속에 둥둥 떠 있더라는 것이다. 나는 그제야 잊고 있던 너의 존재가 떠올랐다. 명색이 와인을 공부한 사람으로서 관리를 소홀히 한 나 자신에 대한 짜증스러움과 이제 막 책상 앞에서 와인 공부를 끝낸 내가 뭘 할 수 있었겠냐는 자기 합리화가 동시에 밀려왔다. 내가 무엇을 느끼든 너는 그 날로 수명을 다 한 것이다. 그게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이 아니었다. 며칠 뒤 부모님 집에 갔을 때, 버리느니 한번 입에 대어나 보자 하고 맛을 본 너는 말 그대로 ‘살아 있었다.’ 마실 수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가 아니었다. 누구나 생애 한번이라도 마셔볼 수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였다. 질 좋은 꼬냑이 연상되는 달콤한 아몬드향, 그 진득한 맛과 향기로움은 부지런한 벌이 만든 꿀 그 자체였다. 그 벌이 만났던 수많은 꽃의 향기를 가득 담은 꿀 말이다. 동시에 너는 나를, 우리가 어렸던 그 때로 데려다 주었다. 이맘때면 꽃이 만발한 놀이공원 한 켠에서 파는, 깨끗하고 순수한 설탕 결정만이 만들 수 있는 솜사탕의 맛을 주었다. 그러나 더욱 놀라웠던 것은 너가 품은 젊음이다. 나이는 어디로 먹은건지! 신선한 총기가 달콤한 테두리 안에 심지처럼 숨어 있었다. 와인은 이제 나에게 직업일 뿐, 그걸 가지고 시를 쓰는 사람은 아니지만 너를 마시는 동안 나는 푼수가 될 수밖에 없었다. 동네 사람들! 이리 와서 내 빈티지 와인 좀 보세요, 기가 막힙니다!
역시 그렇게 어이없이 사그라들 너가 아니었다는 생각에 나는 죄책감이 생겼다. 그리고는 부식된 코르크 마개가 안에서 덜그락 거리는 빈 병을 나의 영원한 친구로 삼겠다는 마음으로, 다시 집으로 데리고 왔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나는 또 무심한 직업인이 되어 속이 텅 빈 너를 금세 잊어버렸다. 그러려고 한 건 아닌데, 너는 그냥 세탁기 옆 그늘에 그렇게 서서 몇번의 계절을 보냈고, 그 마저도 빨래 바구니에 가려져 대부분은 눈에 띄지도 않았다. 그러는 동안 너의 라벨은 더 많은 곰팡이로 덮이고 그 안에 든 회갈색의 코르크 마개까지 더 해 더욱 흉물스레 변해 갔다. 이제 너는 그냥 곰팡이 핀 와인 병에 불과 했다. 너의 빈티지이자 나의 빈티지인 빨간색의 그 연도를 볼 때마다, 이제는 그냥 모른 척하고 싶다. 코로나에 걸린 이후 단 한 번도 기침이 멈추지 않는 이 마당에, 그냥 다시 태어나고만 싶다.
그렇게 마음먹었었는데. 어찌된 일인지 너는 아직도 우리 집 베란다 한 곳에 서 있다. 며칠 새 쨍 했던 햇볕을 받고 다시 피기로 한 꽃처럼 회춘이라도 한 건지, 자세히 보니 곰팡이도 조금 옅어진것 같다. 그 사이로 드러나는 우리의 빈티지가 좀 더 선명해진 것 같기도 하다. 너를 들어 베란다 창 밖으로 내밀어 봤다. 불어오는 바람에 너의 먼지가 폴폴 날아간다.
"사람이 주인공인 따뜻한 와인 이야기를 쓰고 싶다"
송정하 소믈리에는 법대를 나왔지만 와인이 들려주는 이야기가 좋아 프랑스 보르도로 떠났다. 보르도 CAFA에서 CES(Conseiller en sommellerie:소믈리에컨설턴트 국가공인자격증), 파리 Le COAM에서 WSET Level 3를 취득했다. 책 <오늘은 와인이 필요해>를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