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준철의 와인이야기] 바티칸 와인
바티칸은 세계에서 가장 작은 나라지만, 1인당 연간 와인 소비량은 약 100병(74ℓ)으로 프랑스나 이탈리아의 거의 두 배 수준이다. 이 통계는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데, 1인당 소비량이 많은 이유는 교황청 멤버가 연중 진행하는 수많은 미사, 그리고 순례 형식으로 오는 방문객이 교황청이 관리하는 레스토랑으로 오기 때문이다.
바티칸은 2026년부터 자체적으로 와인을 생산하여 판매할 계획이며, 이 와인은 교황청 직원과 방문객에게 제공될 예정이다. 외국(이 경우는 이탈리아)에서 수입하는 것을 피하기 위해 자체적으로 와인을 생산하기로 한 것이다. 로마에서 동남방으로 28㎞ 떨어져 있는 교황의 별장인 ‘카스텔 간돌포(Castel Gandolfo)’에 2ha의 포도밭이 있다. 이 프로젝트를 이끌고 있는 이탈리아 와인양조협회 회장인 라카르도 코타렐라(Riccardo Cotarella)는 카베르네 소비뇽으로 와인을 만들기로 결정했다. 이 와인은 바티칸에서만 면세로 판매될 예정이며, 교황청의 문장이 명확하게 식별될 수 있도록 라벨에 표시될 예정이다.
와인은 가톨릭교회 내에서 오랫동안 종교적, 문화적 중요성을 지니고 있다. 그리스도의 최후의 만찬을 기념하는 의식인 성찬례의 요소 중 하나인 와인은 깊은 영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따라서 교회 안에서 포도밭을 경작하고 성찬용 와인을 생산하는 것은 고대부터 있었던 일이다. 고고학적 증거에 따르면, 로마시대부터 바티칸 지역에 포도밭이 존재했으며, 교황의 첫 번째 포도밭은 4세기 교황 율리우스 1세에 의해 세워졌으며, 그 뒤를 이은 교황들은 포도밭을 계속 확장하여 포도 생산을 위한 포도를 재배했다. 중세시대에 교황령은 이탈리아 중부의 넓은 지역으로 확장되었고, 와인생산은 교황의 후원 아래 이 지역에서 번창했다. 바티칸의 와인생산은 16세기 중반 교황 바오로 3세(재위 1534-1549) 때 전성기를 구가했다. 그는 와인 전문가를 임명하고 바티칸이 와인을 자급자족할 수 있도록 노력했다. 따라서 바티칸 소유의 로마 포도밭은 티베르 강을 따라 개간하면서 확장되었다. 바오로 3세는 측근들이 사용할 수 있도록 바티칸 지하 저장고에 오래된 고급 와인을 보관하고 있었다.
그러나 19세기 바티칸의 와인 산업은 지정학적 변화와 필록세라 전염병으로 인해 큰 격변을 맞이하게 된다. 1800년대 중반 이탈리아가 통일되면서 로마 외곽의 교황령 영토의 대부분이 몰수되었다. 이로 인해 바티칸이 관리하는 포도밭과 와인생산이 크게 줄어들었다. 이어서 필록세라가 발생하여 유럽 전역의 포도밭이 심각한 손상을 입었다. 이에 대해 교황 레오 13세(재위 1878-1903)는 바티칸의 포도재배를 복원하기 위해 재건 계획을 추진하였다. 프랑스 품종을 필록세라에 저항력이 있는 미국 대목에 접목을 하였고, 바티칸 성벽 안에 새로운 포도밭을 조성하였다.
20세기에는 바티칸 시국 성벽 안에 있는 소규모 포도밭과 와이너리를 중심으로 바티칸 와인생산이 점진적으로 재건되었다. 과학의 발전은 와인의 품질을 개선하고 안정화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전기 조명으로 셀러에서 일할 수 있는 시간이 늘어났으며, 온도 조절 및 위생적인 여과는 와인의 품질을 보존 잘 보존하게 만들었고, 블렌딩과 멸균 주병으로 보다 일관된 제품을 만들 수 있었다. 오늘날 바티칸은 와이너리와 포도밭을 계속 운영하며, 매년 수천 병의 와인을 생산하고 있다. 규모는 작지만 바티칸의 와인은 로마의 심장부에서 신앙과 역사, 농업이 얽혀 있는 영원한 전통을 대표하고 있다.
고려대학교 농화학과, 동 대학원 발효화학전공(농학석사), 캘리포니아 주립대학(Freesno) 와인양조학과를 수료했다. 수석농산 와인메이커이자 현재 김준철와인스쿨 원장, 한국와인협회 회장으로 각종 주류 품평회 심사위원 등 많은 활동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