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파의 떼루아에 피어난 보르도, 팔메이어 제이슨 카베르네 소비뇽

2025-07-30     김하늘 기자

나파 밸리 카베르네 소비뇽을 꾸준히 마셔온 지인이 있다. 새로운 와인을 추천하면 단숨에 12병씩 구매하고, 수차례 반복된 주문으로 수입사에서도 그의 이름을 기억할 정도다. 그는 진하고 묵직한 와인을 선호하지만, 매번 똑같은 스타일엔 머무르지 않는다. 단순히 더 강한 와인이 아닌, 기존의 진함을 유지하면서도 새로운 결을 가진 와인을 찾는 것이 그의 다음 선택 기준이 된다.

그에게 추천할 와인은 언제나 신중해야 한다. 지금까지 추천했던 와인을 부정하거나 결을 달리 하지 않으면서도, 이번에는 더 새롭고 흥미로워야 한다. 그런 와인을 찾는 일이 어느새 나에겐 하나의 미션이 되었고, 최근 그 미션에 완벽히 부합하는 와인을 만났다. 바로 팔메이어 제이슨 카베르네 소비뇽(Pahlmeyer Jayson Cabernet Sauvignon)이다.

팔메이어 제이슨은 나파 밸리의 진한 캐릭터는 놓치지 않으면서도, 진함의 결을 조금 달리한다. 진한 퍼플 색에 첫 향부터 묵직하게 올라오는 건포도, 검은 후추 등 진한 향 뒤로 블랙베리, 체리 같은 검붉은 과실향이 받쳐 주고, 또 다시 에스프레소에 가까운 진한 커피 향이 겹겹이 쌓인다. 훌륭한 바디와 섬세한 탄닌이 입안에서 부드럽게 퍼지고, 우아한 밸런스로 마무리된다. 단독으로 마셔도 좋지만, 오리 가슴살부터 폭립, 채끝 등심 스테이크나 양갈비 요리, 크리미한 버섯 파스타나 리조또와의 매칭도 폭넓게 생각난다. 나파 밸리 와인을 마시면서도 보르도 와인을 떠올리게 한다.

팔메이어 와이너리 전경 @동원와인플러스

이 와인에서 보르도 떠올린 특별한 이유는 와이너리 설립 배경에 있다. 팔메이어의 창립자 제이슨 팔메이어(Jayson Pahlmeyer)는 원래 변호사였지만, 그의 이상향은 보르도에 있었다. 그는 ‘미국의 샤토 무통 로칠드’를 만들겠다는 야심을 품었고, 이를 위해 보르도 대학에 나파 밸리 토양 분석을 의뢰했고 확신의 회신을 들었다. 이후 프랑스에서 보르도 클론 5종을 밀반입해 나파 밸리에 식재하고, 와이너리의 기초를 다졌다. 

그의 철학은 첫 번째 와인부터 증명되었다. 당대 최고의 와인메이커였던 랜디 던(Randy Dunn)의 참여 아래 1986년 첫 빈티지를 출시했고, 이 와인은 곧바로 Robert Parker의 Wine Advocate에서 94점을 받으며 화려하게 데뷔했다. 이후 할란 에스테이트의 밥 레비, 스크리밍 이글의 헬렌 털리 등 전설적인 와인메이커들이 팔메이어를 거쳐 갔다. 그렇게 팔메이어는 진함과 섬세함, 힘과 균형을 동시에 추구하는 나파밸리의 프레스티지 와인으로 자리잡았다.

왼쪽 상단부터 시계 방향 대로 랜디 던, 밥 레비, 케이티 보그, 헬렌 털리 @동원와인플러스

1992년 그는 자신의 이름을 내건 세컨드 레이블 ‘팔메이어 제이슨’을 출시한다. 이 와인은 단지 가격을 낮춘 버전이 아니라, 팔메이어가 추구하는 철학은 그대로 유지하면서도 보다 넓은 애호가층과의 접점을 만들고자 한 시도였다. 2019년에는 E&J 갤로가 투자자로 합류하며 브랜드는 새로운 전환점을 맞는다. 이와 함께 현존 미국 최고의 여성 와인메이커 중 한 명으로 손꼽히는 케이티 보그(Katie Vogt)가 와인메이킹을 맡으며, 현재의 팔메이어 제이슨 스타일이 완성되었다.

팔메이어 수석 와인 메이커 케이티 보그 @동원와인플러스

지난 7월 14일 동원와인플러스에서 주최한 팔메이어 와인 비교 시음회를 통해 올해 한국의 수입 할당량과 마케팅 예산이 확대됐다고 전했다. 올해를 기점으로, 팔메이어 제이슨이 한국 시장에 본격적으로 소개될 예정이다.

팔메이어 제이슨 카베르네 소비뇽은 ‘나파밸리의 힘’을 갖고 있으면서도, ‘보르도의 섬세함’을 꿈꿨던 창립자의 철학이 깃든 와인이다. 단순히 강하고 진한 나파 와인을 넘어, 정돈된 구조와 음식과의 페어링까지 고려하는 와인을 찾는 이들에게 이 와인은 특별한 의미가 있다. 늘 마시던 진한 나파가 지루해졌다면, 팔메이어 제이슨은 진함 안의 섬세함이라는 새로운 문을 열어줄 것이다. 그리고 그 문을 연 순간, 당신의 셀러에는 또 한 번 12병이 추가될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