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징그러운 벌레가 보이시나요?

▲ Phylloxera vastrix <사진=wikimedia public domain>

1mm에 불과한 이 벌레는 Phylloxera vastrix라고 불리는 포도나무뿌리에

기생하는 놈입니다.

Vastrix,
말 그대로 파괴자라는 이 녀석이 전 세계의 와인 역사를 바꾸어 놓았습니다.

1863년 미국산 포도나무 묘목이 영국으로 수입되었습니다.

요즘처럼 검역이 철저하지 않았을 때라 이 녀석은 당당하게 무혈 입성합니다. 그 후로 30년 만에 유럽의 포도밭들을 초토화 시켜버립니다.

비티스 비니페라 (Vitis vinifera) 계열의 유럽산 포도나무에 기생하여 포도나무들을 고사시켜버립니다. 통계상 수치만 보더라도 프랑스의 포도 재배면적은 1870년부터 1900년 사이에 64% 나 감소했습니다. 다른 유럽 국가에서도 사정은 비슷합니다.

유럽 각국에서는 이놈을 퇴치하기 위해 현상금을 내 걸었고, 농약살포, 침수, 훈증법등 무려 7000여 가지의 박멸 아이디어가 나왔지만, 이 녀석은 요지부동이었습니다.
 

▲ Burning Vine Canes <사진=wikimedia ⓒSGBooth>

이 와중에 프랑스 보르도 쪽 포도원은 주로 스페인으로 이주를 하게 됩니다.
스페인 와인들이 보르도의 영향을 받게 된 원인입니다.

유럽의 포도원들이 주로 신세계 쪽 국가로 이주를 하면서 신세계의 와인 발전에 기여를 하게 됩니다. 남아공에서 성공적으로 와이너리를 재건한 한 네덜란드 사람의 와이너리 이름은 "Alles verloren“ 입니다.

모두 잃어버렸다는 뜻인데 좀 의역하면 "패가 망신" 입니다.

와신상담의 심정이었겠지요.

당연히 와인 생산량은 떨어지고,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로 사기꾼들이 생겨나고 짝퉁 와인이 범람하기 시작했습니다. 19세기 말 와인과 관련한 사기행위가 극심해지자 샹파뉴 지방을 중심으로 폭동이 일어났습니다. 정권이 위태로울 정도였습니다.

놀란 프랑스 정부에서는 대책을 강구했고 최초로 샹파뉴의 법적 생산지역을 규정하였습니다.

샹파뉴 지역에서 생산된 스파클링 와인만 샴페인이라는 명칭을 라벨에 표기할 수 있도록 한 것입니다. 현대적인 의미의 원산지 통제 명칭의 시작입니다.

이후 부랴부랴 법을 정비하고 1935년 지금은 전 세계 와인 법의 표준이 된 A.O.C(원산지통제명칭, 지금은 A.O.P) 가 시행되었습니다.

인생만사가 새옹지마입니다.

해가 지지 않는 나라 대영제국이 프랑스 와인을 외면하면서 코냑이나 아르마낙에 밀리던 스카치위스키가 쨍하고 해 뜬 날이 도래했습니다.
 

▲ Vine grafting <사진=mjnvs.com 영상 캡쳐>

영국은 와인 생산국은 아니지만 현재도 와인 무역이나 마케팅에 막강한 영향력을 가진 나라입니다.

안달이 난 프랑스(유럽 국가들)는 해결책을 찾기 시작했고 미국산 대목에다 유럽산 포도나무를 접붙이는 방법으로 이 난제를 해결했습니다.

거의 대부분의 프랑스(유럽) 포도나무들은 이 방법으로 새로 식재되었습니다.
이 방법은 오늘날까지도 필록세라의 피해를 막는 거의 유일한 해결책입니다.

우리가 감기에 한번 걸리면, 면역이 생기듯이 필록세라의 근원지인 미국산 포도나무에는 면역이 생겨 있었던 것이지요.

필록세라 이전에 포도나무 묘목을 수입해온 칠레에는 신기하게도 필록세라가 발병하지 않았습니다. 높고 긴 안데스산맥, 모래로 이루어진 토양 등이 원인이라고 생각됩니다.

필록세라 이전에 프랑스 포도나무를 유지하고 있는 거의 유일한 나라가 칠레입니다.

우리 앞에 놓인 와인 한 잔은 필록세라, 제1차 세계대전, 미국의 금주법, 세계 대공황, 제2차 세계대전 등의 고난을 견디면서 생명을 이어 왔습니다.
 

▲ 한 잔의 와인이 만들어지기까지 <사진=pixabay>

우리가 와인을 마실 때는
한 번쯤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 한 잔의 와인이 만들어지기까지
얼마나 많은 소쩍새가 봄부터 울어댔었는지를..
 

▲ 권기훈 교수

[칼럼니스트 소개] 권기훈은 오스트리아 빈 국립의대를 다녔고, 와인의 매력에 빠져 오스트리아 국가공인 Dip.Sommelier자격을 취득하였다. 이후 영국 WSET, 프랑스 보르도 CAFA등 에서 공부하고 귀국. 마산대학교 교수, 국가인재원객원교수, 국제음료학회이사를 지냈으며, 청와대, 국립외교원, 기업, 방송 등에서 와인강좌를 진행하였다.

소믈리에타임즈 칼럼 권기훈 a9004979@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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