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내에 설치된 거대한 트리와 여기저기서 들리는 크리스마스 캐럴 노래에 '내가 정말 한국에 돌아왔구나'를 실감한다. 이 번잡하고 들뜬 연말의 분위기를 얼마나 그리워했던가. 몇 년 전보다 더욱 심해진 듯 자욱한 미세먼지도 고향에 돌아온 설렘을 막을 순 없다. 지난 5년간 머물렀던 보르도와는 너무도 대조적이다.

다들 집 어딘가로 꼭꼭 숨어 자기들만의 명절을 보내는 건지, 저녁 8시가 넘은 스산한 거리엔 지나가는 사람 하나 없고 성당 앞에 조용히 서 있는 크리스마스트리와 보따리를 들고 집 담벼락을 타고 있는 산타클로스 인형만이 크리스마스 시즌을 알려주는 유일한 것이었다.

나의 귀국과 연말이 겹쳤으니 그동안 각자 바빴던 가족들도 나를 위해 한자리에 모였다. 하나하나 정성을 들여 재료를 준비해 부쳤을 해산물이 들어간 전부침, 프랑스에서는 너무도 귀한 나물무침과 김치, 김, 국을 비롯한 전형적인 한국 음식과 알록달록 채소를 곁들인 유럽식 소세지 볶음, 베이컨을 두른 아스파라거스, 샐러드 등이 푸짐하다. 음식을 만들고 준비하는 사람은 늘 분주하다.

그래서 잘 먹지도 못한다. 정신없이 먹는 와중에도 딸을 위해 부엌을 왔다갔다 하는 엄마를 말없이 쳐다보게 되는 이유다. 음식의 맛이 달라지면 요리를 하는 사람의 건강에 문제가 생긴 거라고들 하던데, 깔끔한 맛을 자랑하는 엄마의 음식 맛이 여전한 걸 보니 안심이 되고 고맙다.

▲ 음식과 와인의 맛을 완성 시키는 것은 함께 하는 사람들, 가족들이다. <그림=송정하>

식사 중반 즈음에 엄마가 와인 한 병을 내어 오신다. 와인병 어깨가 동그랗게 도톰한 전형적인 보르도 와인이다. 며칠 전까지도 매일 접하던 보르도 와인병인데 뒷면의 한국어 설명 띄지를 보니 낯설고 신기하다.

수입사는 이런 곳이구나, 한국어로는 이렇게 맛을 표현했구나, 하며 습관적으로 라벨을 살펴보니 'AOP(Apellation d'Origine Protégée 원산지호칭제도) 보르도'다. "원래 한 병에 10만 원인데 백화점에서 세일해서 만 원에 샀어. 그래서 3병 샀지." 'AOP Bordeaux'면 특정 유명 마을이나 와이너리(샤또)로 한정되고 세분화된 등급이 아닌, 그 아래라고 볼 수있는 보르도 일반등급이라 얼마 전 프랑스에서는 기껏해야 5~6유로 정도면 마실 수 있는 와인인데 한국에서는 10만원이라니 놀라웠다.

그래서 말이 나온 김에 이런 간략한 보르도의 와인 등급체계와 프랑스와 한국과의 가격차이에 대해 설명'하려고' 했다. 하지만 다행히 그러지 않았다. 와인은 따는 순간 신선한 베리류의 과일 향이 향긋하게 퍼져 나왔다. 무겁지 않고 기분 좋은 흙냄새와 더불어 타닌은 부드럽게 녹아 있었다. 보관도 잘 되어 있었던 걸까. 보르도에서 서울까지 이 병 속에 향기를 잘 담고 있었구나.

사실 AOC(혹은 AOP)라는 원산지 호칭을 부여받은 사실 자체가 와인의 품질을 보증하는 것이며 해당 샤또만의 기술과 노하우가 담긴 여러 포도 품종간의 블렌딩이니 맛이 떨어질 리가 없을 것이다. 무엇보다 실제로 만원에 주고 산 맛이다! "니가 와인을 공부 했다고 하니 산거지, 언제 우리가 와인을 마셔보겠니. 근데 정말 향이 그윽하고 좋네. 떫지도 않고... 과일향이, 느끼할 수 있는 소세지와 전을 감싸는 느낌이 좋구나." 발그레진 얼굴로 어느새 테이블 유리에 와인잔을 능숙하게 마찰시키며 향을 발산시키고, 음식에 대한 궁합까지 표현하는 엄마가 대단하다.

늘 소주와 맥주만 찾던 아빠까지 나서서 각자 생각한 향을 하나씩 말해보고 까르르 웃는다. 프랑스 현지에서 늘 시음하던 다양한 와인보다 그 먼 곳에서 많은 유통 경로를 거쳐 온 '평범한(?)' 보르도 와인이 더 맛있게 느껴지는 이유가 이거였나 보다. 불과 몇 년 전까지 와인에 문외한이던 내가 와인을 마셔보기도 전에 알량한 이론과 지식을 늘어놓으려 했으니, 나를 위해 엄마가 준비한 따뜻하고 정겨운 연말의 식사 자리를 재미없게 만들 뻔했다.

오스트리아의 유명한 와인잔 브랜드 리델(Riedel)의 11대 오너인 막시밀리안 리델은 한 인터뷰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와인 시음이 언제였냐는 질문에 이렇게 대답을 한 적이 있다.

"가장 중요한 건 와인도 아니고 와인잔도 아닌 함께 마시는 사람들과 그 순간들이에요. 그 모든 게 어우러질 때 비로소 매직이 일어나는 거죠" 홀로 향에 집중하며 마시는 와인도 그것대로 매력 있지만, 그 와인의 맛을 완성 시키는 것은 역시 순간을 함께 하는 사람들, 가족들이다.
 

▲ 송 정 하

법대를 나왔지만 와인이 들려주는 이야기가 좋아 프랑스 보르도로 떠났다. 보르도 CAFA에서 CES(Conseiller en sommellerie:소믈리에컨설턴트 국가공인자격증), 파리 Le COAM에서 WSET Level 3를 취득했다. 사람이 주인공인 따뜻한 와인이야기를 쓰고 싶다.

소믈리에타임즈 칼럼니스트 송정하 noellesong0520@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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