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에게 기억이란 어떤 것일까요?

기억에 오래 남는 것은 '감각'임을 마르셀 프루스트(Marcel Froust)는 이렇게 묘사합니다.

"따뜻한 차와 바삭거리는 빵가루가 내 입천장에 닿는 순간 갑자기 온몸이 소스라치는 전율을 느꼈고, 나는 그 자리에 얼어붙어 내 몸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이상한 현상을 찬찬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감미로운 전율이 내 전신을 휩쓸고 지나갔는데도 도무지 어디서 연유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이 엄청난 기쁨이 어디서 왔을까? 나는 그것이 홍차와 과자의 맛에 연관된 것임을 알았지만 쾌감은 감각적인 맛을 한없이 초월하고 있었다"

마르셀 프루스트의 ‘기억에 관한 대작’ 첫 머리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마를렌의 맛이 과거의 행복했던 기억을 떠올리는 장면인데, 자주 인용되는 문장입니다. 이것을 ‘프루스트의 효과’라고 하지요.

감각은 파도처럼 부서지기 쉽지만, 감각에 의한 기억은 오래갈 정도로 강한 것이지요. 뇌과학자 D. Sackter는 프루스트의 이런 기억을 무의식적인 기억이라고 말합니다.

풍미, 즉 맛과 향, 그리고 체취에 따른 감각은 인간의 가장 원초적인 것이기에 기억에 오래도록 남습니다. 감각에 의한 향기는 영원히 우리에게로 회귀합니다. 어떤 것의 냄새를 맡을 때 우리 뇌는 그 냄새와 우리가 마주친 시간과 장소를 연결해 주기 때문입니다.

사랑도 눈으로 시작되고 향기로 추억 (追憶) 됩니다.

1982년, 어느 비 오던 봄날, 수업을 땡땡이치고 부산행 새마을 열차표를 끊었습니다.

부산역 앞 긴 계단에서 기다리던 그녀는 우산살이 하나 구부러져진 우산을 들고 흰색에 검은색 점이 박힌 원피스를 입고 서 있었습니다.

광안리 해수욕장을 어색하게 걷다가 'La Vie En Rose’라는 Cafe로 찾아들었습니다. 손님은 아무도 없었고, 가수 하남석처럼 생긴 주인아저씨는 친절하게도 벽난로에 불을 지펴주었습니다. 봄비에 축축해진 원피스에서 피어나는 그녀의 향내에 정신이 혼미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녀의 입술에 입을 갖다 댔습니다.

30년 동안을 와인과 향을 공부를 했는데도 그때의 향내를 표현하는 건 도저히 불가능합니다.

▲ 영화 화양연화 <사진=@Caspy2003>

영화 화양연화는 통속적인 불륜 영화라기보다 절제의 미학으로 가득한 사랑의 엘레지입니다.

1999년 시점에서 바라본 과거 1962년 홍콩에서 두 남녀 간의 3년에 걸쳐 이어진 만남과 사랑의 추억은, 세월이 지나면서 마치 과거 기억이 미화된 것처럼 보입니다. 화양연화의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순간’처럼 말입니다. 35년을 뛰어넘는 오래된 기억은, 시간의 경과에 따른 그리움의 농도에 의해 부풀려지기 마련이지요.

“그는 지나간 날들을 기억한다. 먼지 낀 창틀을 통해 과거를 엿볼 수 있겠지만, 모든 것이 희미하게만 보였다” 기억은 종종 왜곡됩니다. 기억 속에서의 시간은 뒤틀리곤 하지요.

허공 속으로 사라지는 양조위의 담배 연기 속에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면서 자막이 뜹니다.

“그 시절은 지나갔고 이제 거기에 남은 건 아무것도 없다.”

남은 게 아무것도 없는 게 아닙니다. 시간과 기억은 왜곡되지만 향기는 영원합니다.

감각은 파도처럼 부서져 사라지지만 감각에 의한 향기만은 우리 뇌와 몸속에 암세포처럼 박혀있기 있기 때문입니다.

그녀의 향기는 너무나 선연하게 기억하지만, 그때의 감각은 단 한마디도 표현하지 못하는 이유입니다.

권기훈은 오스트리아 빈 국립의대를 다녔고, 와인의 매력에 빠져 오스트리아 국가공인 Dip.Sommelier자격을 취득하였다. 이후 영국 WSET, 프랑스 보르도 CAFA등 에서 공부하고 귀국. 마산대학교 교수, 국가인재원객원교수, 국제음료학회이사를 지냈으며, 청와대, 국립외교원, 기업, 방송 등에서 와인강좌를 진행하였다.

소믈리에타임즈 칼럼니스트 권기훈 a9004979@naver.com

저작권자 © 소믈리에타임즈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