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먹는다는 건 진지한 일이다.
진지한 동시에
꿈을 꾸는 일이다.
그것을 볼 수 있어
참으로 행복했다."

크리스티앙 보뱅이 초원에서 풀을 뜯는 말을 보면서 묘사한 구절입니다. 그의 문장은 서정적인 유려한 사고와 미묘한 뉘앙스로 세련된 스타일을 지녔습니다. 사물을 응시하는 경이로움에 대한 감각이 담겨 있는 그의 책을 읽고 나면 삶이 깊어지고 아름다워지면서 누군가를 사랑하고 싶어집니다. 먹고 마시는 대상이 초원의 말이든 하늘을 나는 새든 아니면 감옥에서 이제 막 나온 장 발장이든 허기 뒤에 맞이하는 식사는 보는 이들에게 안도와 아름다움과 만족감을 선사합니다. 오늘은 삶이 억제되고 상처입은 절실한 허기와 궁핍으로 손상된 식단이 내포한 의미찾기를 접어두고 보다 화려하고 풍요로운 식탁으로 여러분을 초대하려 합니다.

헤이리 이웃 친구인 이정호 회장이 느닷없이 찾아와서 말했습니다.

"다음 주 화요일에 귀한 친구와 함께할 와인을 찾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와인을 준비해 주세요."

세상에나! 그런 와인이라면 부르고뉴의 로마네 꽁띠같은 와인일 텐데 유감스럽게도 나에겐 그런 수준의 와인이 준비되어 있지 않습니다. 차선책이라면 보르도의 명품 페트뤼스도 괜찮지만 이 또한 범접할 수 없는 와인입니다. 다행스럽게도 셀러에는 슈발 블랑 2000년산 두 명이 보관되어 있습니다. 이 슈발 블랑 역시 매우 비싼 와인이긴 합니다.

▲ 슈발 블랑이 놓인 식탁에서... 제이웨이브 이정호 회장과 함께(CHATEAU CHEVAL BLANC 2000)

"이건 어떨까요? 보르도 최고 와인 중 하나입니다. 특히 2000년산 슈발 블랑은 프랑스 와인 역사상 최고의 걸작으로 평가되는 1947년에는 못미치지만 또하나 전설적 빈티지인 1949년에는 필적합니다. 로버트 파커는 이 와인에 기꺼이 100점 만점을 부여했습니다."

"아 그거 좋겠습니다. 그날 이 와인을 서브해 주세요."

보르도 생-테밀리옹 지구에서 가장 유명한 와인이 샤토 슈발 블랑(Chateau Cheval Blanc)입니다. 이 지역은 주로 메를로를 주 품종으로 사용하지만, 슈발 블랑만이 카베르네 프랑이 메인입니다. 카베르네 프랑의 풍미는 카베르네 쇼비뇽보다 더 부드러운 타닌의 달콤한 뉘앙스와 풍만하고 진한 과일의 풍미가 특징입니다. 매우 독특한 멘톨향과 그 향기가 뿜어내는 관능적이고 호화로우며 매끄럽고 풍윤하면서도 이국적인 강렬함이 입 안 전체를 감싸며 부드럽게 자극하기에 와인 마니아들을 열광시킵니다. 그래서 수집가들이 가장 탐내는 와인 중의 하나입니다.

슈발 블랑의 이러한 특성은 철을 다량 함유하고 자갈이 많으며 모래와 점토(아주 미세한 진흙이 자갈돌층 아래, 위로 얇은 띠를 이루고 있는 땅)의 성분을 가지고 있는 슈발 블랑만의 테루아에서 기인합니다. 카베르네 프랑이 이런 토양에서 완벽하게 익으므로, 매우 진하고 농익은 검은 과일의 퇴폐적 성향의 캐릭터를 유감없이 보여줍니다. 그래서 클리브 코츠는 "카베르네 프랑을 주로 사용한 와인 중에서는 세계에서 유일한 위대한 와인"이라고 칭송했습니다. 또한 이 도멘의 독창적 특징을 알렉시스 리쉰은 이렇게 분석했습니다.

"세 가지의 특별한 장점이 슈발 블랑 성공의 요인이다.
첫 번째는 밭이 포므롤 마을에서 인접한 데서 나오는 포므롤적 요소이다.
두 번째는 땅에 자갈이 많은 데서 연유하는 그라브적 요소이고,
세 번째는 생-테밀리옹적 타입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결합이 부드러우면서도 강인한 최상의 와인을 만들어낸 것이다."

한편 샤토 슈발 블랑(하얀 말)이라는 이름은 오랜 옛날 항상 백마를 타고 다녔던 앙리 4세가 이곳에 들른 데서 유래합니다. 이 샤토는 1998년에 루이비통 그룹에 약 1700억 원에 매수되어 모던 스타일로 변모합니다.

1950년부터 2000년까지의 슈발 블랑으로 최고의 와인은 1990년 빈티지와 2000년 빈티지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그레이트 빈티지라 할지라도 잘 숙성되었다고 보장할 수는 없습니다. 22년간 고요히 잠들었던 와인을 개봉하는 일은 마치 숲 속의 미녀를 키스로 깨우는 왕자처럼 가슴 떨리는 순간입니다. 그동안 이 와인이 최적의 환경에서 잘 보관되어 왔는지 아무도 알 수 없기에 소믈리에는 만일의 경우 실패의 쓰라린 아픔도 감수해야 하지만, 수직상승과 급전직하의 요동에도 버틸 수 있는 강심장을 가져야합니다.

소믈리에 나이프를 사용해서 날렵하게 호일 캡을 벗겨보니 믿어지지 않을 만큼 선명하게 2000의 숫자가 새겨져 있는 코르크의 윗면이 드러납니다. 오호, 이 미녀는 최고의 아름다운 자태를 보여주겠구나 라는 확신을 심어줍니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소믈리에 나이프로 코르크를 끌어올렸습니다. 코르크 상태가 어쩜 이렇게 완벽할 수 있을까요. 놀랍습니다. 22년동안 최적의 조건에서 보관된 와인임을 증명하는 코르크의 모습입니다. 리코르킹한 것으로 착각할 만큼 코르크 상태는 최상입니다.

그리고 디켄터에 옮겨진 슈발 블랑은 올드 빈티지이기를 거부하는 듯 가넷빛으로 단장하고 단단한 모습을 보여줍니다. 아직도 10년은 더 숙성시켜야 비로소 자신을 드러내 줄 것같습니다. 디켄터에서 와인이 열리기를 기다리면서 우리는 대화를 이어갑니다. 

초대된 손님이 이 회장에게 물었습니다.

- 회장님의 많은 사업 중에서 연간 매출액이 각각 천억이 넘는 두 회사인 반도체와 물티슈/마스크 회사는 지난번 설명으로 알겠는데 소위 '도시 유전'이라고 일컬어지는 리싸이클링 회사도 최근에 시작하셨지요. 어떤 회사입니까?

- 3년 전에 인수한 새한 리싸이클링이라는 회사입니다. 폐플라스틱을 열가공 분해하여 벙커씨유를 생산합니다. 환경문제는 범사회적이고 전 지구적인 문제이기 때문에 제가 감히 뛰어들었습니다. 환경부에서는 사활을 걸고 친환경 재생 에너지 문제에 골몰하고 있습니다. 제가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까 해서 시도해보는데 이번에 공장을 확장해서 보다 개선된 방식으로 CO2 가스를 배출하지 않는 열분해로 두 기를 설치했습니다. 다음달 7월이면 시험가동하게 될 것입니다. 기름 추출에 성공한다면 국내에서 이 분야의 가장 선진적인 작업장이 될 것입니다. 정부가 추진하는 탄소 제로 정책에 기여하고 싶습니다.

- 회장님의 사업은 놀라움의 연속입니다. 벌리는 사업마다 전부 서로의 연관성을 찾을 수 없습니다. 헤이리예술마을에서 빵과 커피를 파는 사업체도 운영하시지요.

- 저는 그 모든 것이 호기심 때문입니다. 이 호기심이 저를 가만두게하질 않네요. 이번에 또하나 공장을 지었습니다. 바이오 의료제품을 생산하는 공장인데요. 듀오덤이라는 상처부위에 붙이는 패치를 아시나요? 수많은 유사제품이 요즘 쏟아져나오고 있습니다만 영국에 본사가 있는 콘바텍 회사가 개발한 제품인 듀오덤이 원조입니다. 그동안 이 회사의 패치는 전문병원에만 납품해 오던 것을 이번에 일반 약국에서도 판매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제가 운좋게도 이 제품을 생산 판매까지 맡게 되었습니다. 정부의 허가가 떨어지면 곧바로 생산에 들어갑니다. 12월까지는 허가가 날 것으로 예상합니다.

- 어떻게 그런 사업권을 따낼 수 있었나요?

- 사업파트너를 찾는다는 소문을 듣고 콘바텍코리아를 무작정 찾아갔지요. 그리고 말했습니다. 나는 반도체 회사와 국내 생산량 1위 물티슈 회사를 갖고 있습니다. 콘바텍이 추구하는 최고의 제품을 만들 자신이 있습니다. 과제를 던져주시면 그 과제를 풀어오겠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던져준 과제를 브리핑하고 나서 제품을 생산하기로 계약을 체결했습니다. 앞으로 제가 생산하는 콘바텍의 패치제품이 전세계에서 팔릴 것입니다.

사업은 다양한 사람들을 상대하고 각양각색의 현상을 분석하는 능력 없이는 경영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성공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개척자 정신으로 무장하고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을 이 회장을 통해서 배웁니다.

이 회장의 사업 이야기에 흠뻑 빠져있는 동안 와인이 열리기 시작했습니다.

와인은 그림을 그리듯 대상을 재현하는 매체가 아닙니다. 음악을 이해하듯 작곡가와 연주자의 감정을 읽어내면서 해독할 수도 없습니다. 와인이 표현하는 향미는 음악의 악보가 아닙니다. 와인의 시음은 섹스와 같아서 은밀하고 복잡한 매력을 지닌 와인의 심연을 탐색해 가는 상상력이 필요합니다. 이때 와인의 시음은 시음자의 경험과 취향에 의해 미세한 영혼의 떨림으로 아름답게 항해하는 모험이 됩니다. 그렇게 되려면 예리한 감각으로 무장하고 디테일에 세심하게 집중하면서 방향을 찾아야합니다.

"와인이 육체를
수렁으로 빠뜨린 후에
영혼으로 침투하면
생각은 서로 엉키고
감각은 자유로워진다.
그리하여 당신은
승승장구하는 생애,
불후의 예술작품,
세상을 얻는 것,
새로운 작업장을 꿈꾼다." (로저 스크루턴)

- 회장님의 꿈은 무엇입니까?

- 제가 이처럼 돈을 벌어야하는 이유는 하나의 꿈이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음악 듣기를 즐기는데 선진국들이 전통적으로 개최해오고 있는 세계적인 국제 콩쿠르에 주목합니다. 먼저 쇼팽 국제 피아노 콩쿠르가 유명하지요. 또 차이코프스키 국제 콩쿠르도 있습니다. 그리고 퀸 엘리자베스 국제 콩쿠르 또한 그 위상을 자랑합니다. 이 뒤를 이어 이번에 임윤찬 군이 1등 수상한 반 클라이번 콩쿠르와 부조니 콩쿠르도 아주 훌륭합니다.

그들은 콩쿠르를 통해 세계의 젊은이들에게 희망을 선물하고 있습니다. 저도 미약하나마 그런 일을 하고 싶습니다. 가령 스트라디바리우스 바이올린을 다섯 대 정도 구입하여 재능 있는 젊은 음악인에게 무상으로 대여하는 것입니다. 이 꿈을 위해서 돈을 더 벌어야 합니다.

오늘 우리를 감동시킨 슈발 블랑이 그저 단순히 우리의 삶과 사업을 상기시키는 것에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삶을 반영하고 고유한 각자의 꿈과 희망을 획득해야함을 이야기합니다.

오늘 마신 슈발 블랑은 최고의 와인만이 보여줄 수 있는 완벽한 균형미로 시음자를 꿈꾸게 합니다. 나는 내 앞에 놓인 슈발 블랑에게, 그 덧없는 풍부함과 매혹에 대해 어떻게 고마움을 표시할까 고민합니다. 그리고 슈발 블랑을 향해서 가슴을 부여잡는 남자의 고백같은 메시지를 보냅니다.

"너는 아름답기 그지 없구나, 더할나위 없이 풍요로우니 얼마나 오랜 시간 조바심쳐가며 너를 기다려왔던가!"

와인이 투명한 잔 속에서 속삭이는 소리를 듣습니다.

"모든 희망이 이루어질 거야."

마숙현은 헤이리 예술마을 건설의 싱크탱크 핵심멤버로 참여했으며, 지금도 헤이리 마을을 지키면서 이탈리안 레스토랑 와인샵 <식물감각>을 18년째 운영하고 있다. 2021년 '와인너머더깊은' 저서를 출간 했다. 와인, 커피, 그림, 식물, 오래 달리기는 그의 인문학이 되어 세계와 소통하기를 꿈꾼다.

소믈리에타임즈 칼럼니스트 마숙현 meehania@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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