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역사 유적지구는 대한민국 중.서부에 있는 백제의 왕도와 밀접하게 연관된 유적으로, 주변국들과의 활발한 교류를 통하여 문화적 발전이 절정에 이른 백제 후기를 대표하는 유산이다. 백제역사유적지구는 2015년 7월 8일 독일의 본에서 개최된 제 39차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에서 전 인류의 유산으로 등제되었다.

공산성은 웅진 시기(475~538) 백제의 왕궁이 있었던 산성으로, 금강이라는 자연지형을 최대한 활용하여 지어졌다.  발굴조사 결과 왕궁지, 왕궁부속시설지, 백제시대의 토성 등이 확인 되었다.  

▲ 공산성 금서루

공산성 금서루는 공산성 4개 성문 가운데 서쪽 문루이다. 성안으로 이어지는 도로를 만드는 과정에서 흔적조차 찾기 어려웠지만 1859년 편찬된 '공산지'의 문헌 기록과 지형적 여건 등을 고려하여 1993년 복원하였다.

현재의 문루는 본래 서문이 있던 자리에서 약간 남쪽으로 이동하여 지은 것이다. 금서루는 비록 새롭게 복원된 것이지만 조선시대의 성문 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

금서루 입구에는 공주와 관련된 인물의 행적을 기리기 위하여 세운 비석군이 자리하고 있다. 공주시 곳곳에 흩어져 있던 비석들을 모아 놓은 것으로 송덕비와 제민천교영세비 등 47기가 있다. 

▲ 공산성 왕궁관련 유적

'공북루' 남쪽의 넓은 골짜기에 자리 잡은 백제시대 대규모 왕궁관련 유적이다. 2011년 ~ 2017년까지 연차적인 발굴조사를 통하여 현재의 지표면에서 약 300 ~ 700cm 아래에서 백제가 웅진에서 천도한 475년 이후 만들어진 약 70여 동의 기와 건물지와 도로, 축대, 배수로, 저수시설, 석축 연못, 철기 공방지 등 다양한 시설이 확인되었다.

백제 왕궁관련 건물지가 자리한 곳은 약 3만 평방미터의 넓은 평탄지를 이루고 있지만, 원래의 지형은 사방에서 물길이 모이는 골짜기에 해당한다. 나뭇가지와 흙 등을 켜켜히 쌓아서 다지는 부엽공법과 같은 대규모의 토목 공사를 통하여 대지를 만들고, 그 위에  축대 도로 와 배수로를 만들고 기와 건물을 세웠다. 도로의 양 측면에는 배수로가 설치되어 계획적인 공간배치를 이룬다.

▲ 산성을 걷다보면 보기만 하여도 공산성의 유구한 세월을 느끼게 해주는 고목을 자주 만나게 된다.

건물지는 주춧돌을 사용하지 않고 땅에 구멍을 판후에 기둥을 세워 만든 기와건물로, 일정한 열을 이루어 자리하고 있다. 건물지 주변에서 '대통사' 명 벼루와 사람의 얼굴이 있는 기대, 공작그림이 있는 기와를 비롯하여 많은 양의 벼루가 출토되어 백제시대  최고의 관청이 자리했음을 추론할 수 있다.

이밖에 645년(의자왕 5년)을 가리키는 '정관19년명이 있는 화려한 옷칠 갑옷과 철갑옷, 마갑, 큰 칼, 장식도 등이 출토되어 백제 중앙의 선진적인 공예기술을 살필 수 있게 되었다.

백제 왕성으로서 명확한 역사성을 갖춘 공산성에서 백제 왕실의 생활문화를 살필 수 있는 화려한 유규와 유물이 출토된 왕궁관련 유적이 조사됨으로써, 백제 웅진기 백제문화를 살피는데 좋은 자료가 되었다.

▲ 공산성의 얼음창고

조선시대 공산성에는 석빙고가 있었다. 한겨울 맑은 금강물이 꽁꽁 얼면 그것을 깨어내 왕겨에 싸서 석빙고에 저장해 두었다가 더운 여름에 꺼내 사용했다. 조선시대 공산성 내에 존재했던 석빙고는 냉장고도 없고, 얼음도 귀했던 시절 더위를 이겨내는 중요한 역활을 했다.

그후 일제강점기에 한떄 한약제를 보관하거나 얼음을 저장하는 창고로 다시 사용되기도 했으며, 후에는 누에의 알을 적당한 시기까지 보관해주는 잠종저온 창고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공산성 성벽의 동서남북에 배치한 깃발은 송산리6호분 벽화에 있는 사신도를 재현한 것이다. 사신도는 동서남북의 방이를 나타내고 우주의 질서를 지키는 상징적인 동물로 외부의 나쁜 기운을 막아주는 의미가 있다. 우리나라에서 사신의 개념이나 형상이 표현된 것은 삼국시대에 중국문화의 전래와 함께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는데 송산리6호분 벽화의 사신도는 당시 왕성했던 백제와 중국남조와의 국제교류를 보여준다. 깃발의 바탕색은 황색이다. 이것은 백제의 나라색이며 백제시대 사람들은 황색을 우주의 중심이 되는 색으로 생각하여 중히 여겼다고 한다.

그리고 깃발의 테두리는 사신도의 각 동물이 상징하는 색을 반영한 것이다. 깃발의 배치는 송산리6호분에 그려진 사신도의 위치를 그대로 따라 동쪽에는 청룡, 서쪽에는 백호, 남쪽에는 주작, 북쪽에는 현무를 각각 배치하였다.

▲ 공산성 공북루

공북루는 공산성의 북쪽 문루로 금강의 남쪽과 북쪽을 오가는 남북 통로의 주 출입문이다. 본래 공북로 자리에는 망루가 있었는데 허물어져서 터만 남아 있었다.

충청감영을 충주에서 공주로 이전하면서 1603년(선조 36)에 공산성을 크게 고쳐 쌓고, 이때 공북루와 그 옆에 월파당을 하께 지었고 이후 여러차례 고쳐 지었으나 월파당은 1954년 철거되었다.

공북루 아래쪽은 성으로 통하는 통로로, 위쪽은 마루를 만들어 금강의 아름다움을 즐기는 장소로 이용하였다. 문루 안에는 여러 편의 글과시를 걸어 두었다.

▲ 공산성에서 내려다본 금강철교와 시내 모습

공주가 발전하면서 금강을 건너는 사람들과 물자가 크게 늘어나 그동안 사용하던 나룻배로는 도저히 이들을 다 실어 나를 수 없어 나무로 된 다리를 놓았지만 이것마저도 홍수에 떠내려가서 배다리를 만들게 되었다. 나룻배 20-30척을 잇고 그 위에 널빤지를 깔아 폭 3m 길이 150m로 배다리를 놓았다고 한다.

하지만 배다리도 큰 홍수와 오랜 세월을 견디지 못하던 중에 충남도청이 공주에서 대전으로 옮겨가는 대가로 금강에 금강철교를 만들게 되었으며, 그떄 부터 공주의 관문 역활을 하게되었다. 

찬란했던 백제의 역사가 숨쉬는 현장 공산성, 고요하고 잔잔한 풍경이 건내주는 아름다운 산책로를 벗 삼아 코로나로 지친 마음을 잠시 쉬어가면 어떨까 한다. 

소믈리에타임즈 전은희기자 stpress@sommelier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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