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급쟁이로 사는 것이 얼마나 고된 일인지, 누군가에게 급료를 꼬박꼬박 주거나 매달 임대료를 내야 하는 것이 얼마나 어깨를 짓누르는 일인지, 겪어본 자는 알 것이다. 하는 일마다 대박을 터뜨리거나 누군가에게 아쉬운 소리 한 번 할 일 없는 부러운 인생을 사는 사람들도 어딘가 있겠지만 그들은 정말 ‘어딘가에’ 있을 것이고, 나는 잘 모르는 삶이다.

그 중 누군가의 ‘지갑을 열게’ 하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경제 활동이란 것이 결국은 모두 이 범주에 들어가겠지만 특히 무언가를 파는 일 즉 영업과 판매를 직접적으로 하는 사람들, 그들은 안다. 상품을 설명하는 입이 얼마나 아프고 그래서 때로는 더럽고 치사 하다가도, 어느 날 마음 졸였던 계약이 성사되거나 ‘완판’을 이루는 등 목표를 달성한 날은, 언제 그랬냐는 듯 행운의 여신은 나를 위해 존재하는 것만 같다.

집으로 가는 길목에 있는 재래시장의 한 과일가게 아저씨는 이미 문을 닫은 다른 가게와 달리 밤 10시가 다 되도록 물건을 정리할 생각이 없는 것 같다. 이미 가격이 떨어질 때까지 떨어졌다는, 남은 샤인 머스캣 여섯 송이를 팔기 위해 남녀노소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사람처럼 생긴 무언가가 가게 앞을 지나갈 때마다 외쳐 댄다. 그 곳에서 자주 과일을 사는 나에게는 더욱 열정적이다.

‘언니, 이거 한번 잡숴봐. 아주 달아!’

와인 학교를 졸업하고 한국에 들어온 지 얼마되지 않은 때였다. 어느 와인 숍에서 행사하는 ‘와인 장터’ 의 부족한 일손을 보충하기 위해 ‘일일 판매직원’ 역할을 할 기회가 있었다. 긴장한 어깨를 쭉 펴고 밀려오는 고객들을 맞이할 준비를 했지만, 사실 나는 별로 필요가 없는 사람이었다. 사람들은 진열된 와인을 휴대폰으로 검색해서 해당 와인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찾고 가격까지 비교하며 이미 너무도 똑똑한 소비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편, 비교적 오랜 숙성과 좀 더 선별한 포도로 공들여 만들어 많지 않은 생산량을 기록하는 ‘쉬페리외르(Supérieur)’ 등급의 보르도 와인은 다른 일반 보르도 등급(AOP Bordeaux)의 와인들과 함께 나무 상자에 담겨 와인 숍의 한 귀퉁이를 차지하고 있었다. 저래서는 사람들의 눈에 잘 띄지도 않을텐데 걱정하던 차에 알고 보니 어차피 인기가 없기 때문이었다. 그 즈음 한 유명한 와인 유튜버가 ‘보르도’라고만 적힌 와인은 ‘믿고 거르라’ 라는 조언을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는데, 그런 영향도 작용을 했는지 아니면 우리나라에 그런 인식이 이미 퍼져 있기 때문에 그가 그런 말을 한건지 는 잘 모르겠다.

그리고 몇 년이 흘렀지만 내가 ‘와인 전문가’ 인가 하는 스스로의 질문에 쉽게 대답할 수는 없을 것 같다. 그 정도로 많은 시간을 보낸 것도 아니고 무엇보다 여전히 모르는 것 투성 이기 때문이다. 나를 작가님이니, 강사님이니 하고 불러주는 사람들에게는 그저 고맙고 죄송할 뿐이다. 어쨌든 책을 출판했고 강의를 하기 때문에 편의상 그렇게 부르는 것 또한 알고 있다.

최근에는 한 와인 커뮤니티에서 국내에 잘 알려지지 않거나, 유명한 타이틀을 가지고 있지 않은 것 중 ‘접근할 만한’ 가격을 가진 와인들을 상대로 ‘시음기'를 올리고 있다. ‘이 와인, 내가 먼저 마셔봤습니다’ 하는 취지인데, 그 중에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마셔보고 좋게 평가한 와인들도 많아서 내가 뒷북을 쳤구나 하는 생각을 할 때가 있다. 그래서 더욱 ‘나는 아직 멀었구나’ 한다.

한번은 남부 프랑스의 와인으로 그로 망상(Gros Manseng) 이란 품종의 화이트 와인을 시음한 적이 있다. 그로 망상 품종 와인을 한국에서 마시는 것은 처음이었는데, 달콤하고 스파이시 하며 상쾌한 레몬 풍미를 지녀, 지루한 오후에 에너지를 주고 단번에 기분을 좋게 하는 매력이 있었다. 그러나 이 와인의 매력은 무엇보다 2-3만원대라는 저렴한 가격이었다. 가격이란 소비자에게 ‘만족감’을 주는 또다른 중요한 기준일 것이다. 마음에 드는 물건을 싸게 구입한 후 ‘이거 얼마 주고 샀게?’ 하고 자랑하고 싶게 만들기 때문이다.

지난 가을 프랑스의 공영 라디오 방송 그룹인 <프랑스 블루(France Bleu)>는, 관광객들의 와인 소비가 늘어났음에도 정작 보르도 현지인들은 자기네 보르도 와인을 덜 찾는다는 기사를 낸 적이 있다. ‘당장’ 마실 수 있고, 좀 더 저렴한 와인, 다시 말 해 ‘가성비’ 있는 와인을 찾아서, 쥐라(Jura)나 루아르(Loire) 지방의 와인으로 눈을 돌린다는 것이다. 보르도 와인은 무슨 특별한 가족 행사가 있을 때 ‘저금통을 깨야만’ 마실 수 있는 와인이라 말 하는, 로베르 라는 사람의 인터뷰도 덧붙였는데, 이건 좀 오버이지 않나 싶기는 하다.

그러나 전통적으로 ‘풍요의 땅’ 이라는 보르도에서 소위 명품가방을 들고 지나가는 사람을 손에 꼽을 정도로 목격하고, 같은 아파트에 살던 백발의 주치의 선생님이 몰던, 먼지 가득한 소형차를 떠올리면 그들의 엄살이 완전히 거짓은 아닐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내가 보아온 그들은 매우 검소하다. 단지 그들의 소중한 바캉스를 위해 긴 시간과 약간의 돈을 떼어 두는 데에 진심일 뿐이다.

영화배우 러셀 크로가 내레이션을 맡은 ‘레드 옵세션(Red Obsession)’은 와인산업 특히 프랑스 와인을 둘러싼 와인 메이커와 와인 애호가, 소비자들의 솔직한 인터뷰를 보여준 다큐멘터리다. 그 중 한 중국인 와인 애호가(?)의 인터뷰가 굉장히 인상에 남는다. 그는 성인용품을 만들어 부를 축적한 사람인데, 그의 관심은 오로지 보르도의 최고급 샤또 일 뿐 이다. 그 중 ‘라피트(Lafite)’에 대한 그의 사랑(옵세션!)은 엄청나다. 그래서 맛도 모른 채 그저 와인들을 모으고 모은다고 자랑스럽게 말하는 그는, 애호가 보다는 ‘콜렉터’ 로서의 인생을 살고 있는 듯하다.

맛있고 아름다운 와인을 생각하며 소비하는 것이 가능한가? (사진:송정하)
맛있고 아름다운 와인을 생각하며 소비하는 것이 가능한가? (사진:송정하)

그런 그에게 ‘가성비’ 나 ‘현명한 소비자’ 따위의 단어는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덕분에 그를 상대하는 판매자들도, 오 천원짜리 샤인 머스캣 한송이를 팔기 위해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 야만 하는 수고를 안 해도 될 것이다. 그리고 앞서 말한 바와 같이 나는 그런 삶에 대해 알지 못한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가성비를 찾는 현명한 사람이 되기 위해 정보를 찾고 머리를 굴리며 ‘생각’ 이란 것을 해야 한다. 프랑스의 폴 부르제(Paul Bourget) 라는 작가는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Il faut vivre comme l’on pense, autrement l’on finit par penser comme l’on vit.”

이 말을 누군가가, “생각하는 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 라고 간명하게 번역했는데, 멋진 번역이라고 생각한다. 정해주는 대로 마시지 않고 내가 생각하고 원하는 대로 마시는 것도, 생각하며 사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일 같다.


"사람이 주인공인 따뜻한 와인 이야기를 쓰고 싶다"

송정하 소믈리에는 법대를 나왔지만 와인이 들려주는 이야기가 좋아 프랑스 보르도로 떠났다. 보르도 CAFA에서 CES(Conseiller en sommellerie:소믈리에컨설턴트 국가공인자격증), 파리 Le COAM에서 WSET Level 3를 취득했다. 책 <오늘은 와인이 필요해>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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