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 탈 없이 안녕한 나날들 보내셨습니까? 물난리나 가뭄 혹은 화재로 인한 피해는 없으셨나요? 길 가다 험한 꼴을 당하진 않으셨는지요. 무더위로 많이 지치진 않으셨길 바랍니다… 라는 말들부터 꺼내야 할 것 같은, 정말 지독한 여름이었다. 매 순간 쏟아지는 뉴스들로부터 놀라지 않고 평정심을 찾으려면, ‘로그 아웃’을 꼭 해야만 한다. 그리고 일년 내내 마셔도 좋지만 여름에 특히 생각나는 소비뇽 블랑을 제대로 즐기려면 반드시 에어컨도 켜야 한다. 그러나 소비뇽 블랑의 파릇한 풀 향기에 집중하는 호사 속에서도 마음 한 구석이 불편하다. 모두들 정말 괜찮으신가요?

절대로 친해질 수 없을 것 같은 것이 나에겐 여름이다. 핑크 빛 봄이 저 멀리 도망가고 여름이 스멀스멀 다가올 때는 단단히 싸워 이길 각오를 하는 반면, 어느새 귀뚜라미 우는 소리가 들린다면 그 소리는 그 어떤 멜로디보다 달콤하다. 올 여름도 잘 버텼구나, 곧 가을이 오겠구나 한다.

이런 내게도 ‘여름 낭만’은 있다. 지난 일은 다 추억이고 낭만이 되니까. 지나간 여름 낭만은 우선 ‘사진’ 에서 느낄 수 있다. 파란 하늘과 그보다 더 새파란 바다, 눈을 시원하게 하는 진초록의 숲과 나무들. 땀으로 범벅 된 얼굴은 햇볕에 반사된 사진 속에서 더욱 혈기 있고 건강해 보인다. 한여름에도 어디선가 불기는 불었을 뜨뜨미지근한 바람과 그로 인해 흩날리는 머리칼. 사진 속 여름은 그야말로 청량하다.

오감 중 사람의 기억에 가장 각인되는 것은 후각인 것 같다. 이제는 더 맡을 수 없는 할머니 품 속의 포근한 분홍색 냄새를 다시 한번 맡게 된다면, 램프 속 지니 처럼 할머니가 두둥실 튀어나올 것만 같다. 그렇다면 여름 냄새에는 뭐가 있을까 생각해 본다. 계절의 냄새는 당연하게도 자연에서 찾을 수 있다.

햇살을 잔뜩 머금어 탐스러운 자태로 성장한 신선한 과일 향기. 더운 습기 속에서도 느껴지는 풀잎 냄새와 달콤한 아카시아 꽃 향기. 그리고 바다가 가까이 있다면 훅 들어오는 짠 바닷물 냄새의 강렬함이 먼저 다가오지만 해변가 바닥에 얼굴을 가만히 대면 따뜻한 모래의 은은한 향기도 느낄 수 있다.

잊을 수 없는 여름의 기억이 저마다 다르듯, 내 지난 여름의 시간과 장소는 중학교 3학년의 우리 집 베란다다. 그 곳에서 나는 집 근처 도서관에서 빌린 삼국지 열 권을, 동이 트고 아침 7시가 다 되도록 읽었다. 차려주는 아침을 먹은 후 기온이 올라가면 못 잔 잠을 잔다. 점심인지 저녁인지 알 수 없는 밥을 먹은 후 조금 선선하다 싶으면 다시 책을 읽는다. 그렇게 중 3의 8월을 보냈다. 왜 하필 삼국지였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 당시 삼국지를 읽는 것이 꽤 유행이긴 했다. 그리고 우르르 등장하는 무리들의 혈기와 의리, 책략과 난폭함이, 요동 쳐 끓어오르는 사춘기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것 같다.

이미 여러 사람의 손이 거쳤을 그 책은 이미 잉크 냄새보다 오래된 책에서나 날 법한 약간의 곰팡이 냄새가 났다. 조금 쾨쾨한 창고의 공기, 한마디로 ‘도서관 냄새’ 다. 여름의 습기는 그 책의 냄새를 더욱 시큰하게 만들었다. 지금 기억해 보면 모두, 떠올리기만 해도 행복 해 지는 ‘좋은 냄새’ 였다.

요즘 도시의 여름에서는 어떤 냄새를 맡을 수 있을까. 비슷하지만, 오래된 책과는 많이 다른 종류의 에어컨 냄새가 우선 떠오른다. 무더위 속 분주한 사람들의 땀 냄새, 잔인한 폭우가 온 뒤의 비릿한 물 냄새, 더운 습기와 뒤범벅된 자동차의 연기 냄새.. 너무 더워 한 손에 꼭 들고 있어야 할 아이스 아메리카노 속의 볶은 커피 향 만이 내가 선택할 수 있는 냄새다. 여름의 향긋한 과일과 식물 냄새, 햇살에 반짝이는 매끄러운 조약돌 냄새는 잘 만든 향수나 와인에서나 맡을 수 있는 걸까.

신선하고 아름다운 향기를 맡고 싶다 (그림: 송정하)
신선하고 아름다운 향기를 맡고 싶다 (그림: 송정하)

매 해 여름이 되면 다양한 종류의 질환을 겪는 나는, 올 여름 계속해서 담배연기 냄새를 맡아야 했다. 주변에 누가 담배를 피우지 않는데도 계속 담배 연기가 느껴졌다. 한달이 넘게 이어지는 담배 냄새로 인해 급기야 이비인후과에서 엑스레이도 찍고 후각 검사 란 것도 받았는데, 이 후각 검사 란 것은 검사를 진행하는 사람이나, 받는 사람 양쪽 모두에게 인내심을 필요로 하는 것이었다. 수십가지 아로마 키트의 향을 맡고 그 냄새를 알아맞춘 다음, 냄새의 강도까지 판별하는 능력을 검사하는 것이다.

나는 곧 와인 시음기를 연재할 예정이었기 때문에 혹시 나에게 문제가 있다면, 과감히 그 연재를 포기할 각오를 하고 있었다. 지어서 쓸 수는 없기 때문이다. 아무튼 후각 검사 후 긴장한 상태로 결과를 물어보는데 의사가 말하길,

“후각이 완전 좋으신데요? 남들은 이거 반도 못 맞춰요!”.

예스! 내가 해냈구나! 나는 환자의 신분도 잊은 채, 예전 와인학교에서 테이스팅 시험을 보던 때로 돌아간 듯한 착각이 들었다. 매일 놀림 받던 둔한 감각도 노력하면 바뀔 수 있다는 걸 내가 증명한 것이다. 하긴 와인을 직업으로 삼고부터 후각을 비롯한 신경이 더위와 만나 예민해졌나 보다. 병원에 찾아간 애초의 의도와는 다르지만 예상 밖의 ‘참 잘했어요’ 도장을 받은 나는, 차츰 들리는 귀뚜라미 소리와 함께 매우 기분이 좋아졌다. 그 후 내 주위를 맴돌던 담배연기도 차차 옅어 졌다. 어디선가 들은 ‘일체유심조(一(한 일) 切(온통 체) 唯(오직 유) 心(마음 심) 造(지을 조))’라는 말을 이런 때 써도 되는 것인지 갑자기 궁금 해 진다.

그런데 이 연기 냄새 란 것은 와인에서도 심각한 문제가 되고 있다. 바로 수시로 발생하는 화재 때문이다. 호주나 미국 캘리포니아, 남아프리카 공화국 등지 에서만 문제가 되던 것이, 이제는 프랑스 보르도에서도 주된 걱정거리가 되었다. 나무가 연소되면 공기중으로 날아간 페놀이 포도 껍질에 들러붙는데 이 기간이 하루, 이틀만 되어도 문제는 커진다. 이 화합물은 포도의 껍질과 과육의 단맛과 결합하고, 와인 양조의 전 과정에 걸쳐 작용하여 와인 고유의 향인 과일, 꽃 향기 등을 가린다. 결국 와인의 연기 냄새 즉 탄 냄새의 주범이 되는 것이다.

우스개소리로 나는 사람들에게 이런 말을 한다.

신선하고 상큼한 샤르도네, 피노누아 와인이에요, 있을 때 드세요. 다음엔 없을지도 몰라요.

노력형 후각 마스터(?), 노력형 긍정주의자인 나는 지금 닥친 기후 위기 앞에서 뭘 할 수 있을까? 뭘 하겠는가! 더 이상 연기냄새를 맡지 않게 해 달라고, 여름 냄새를 돌려 달라고, 기도나 해야 겠다.


"사람이 주인공인 따뜻한 와인 이야기를 쓰고 싶다"

송정하 소믈리에는 법대를 나왔지만 와인이 들려주는 이야기가 좋아 프랑스 보르도로 떠났다. 보르도 CAFA에서 CES(Conseiller en sommellerie:소믈리에컨설턴트 국가공인자격증), 파리 Le COAM에서 WSET Level 3를 취득했다. 책 <오늘은 와인이 필요해>를 썼다. 

저작권자 © 소믈리에타임즈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관련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