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 1년을 365일로 정해 놨기 때문에 우리는 366일을 살지 않고 다시 1일을 산다. 365일 마다 리셋이다. 그래서 괜히 다 바꾼다. 달력을 바꾸고 시무식을 하기에 앞서, 그 중 제일 먼저 달라 지는 것은 사람의 마음인 것 같다. 지난해가 유난히 힘들었던 사람은 다시 시작되는 한 해가 기대되고, 흐르는 시간이 아쉬운 사람은 유한한 앞날의 소중함을 느끼고 더욱 꼼꼼한 계획을 세운다.

그러면 가끔, 달력의 장단에 놀아나는 느낌이 든다. 운동을 시작하고, 한달에 책을 몇 권을 읽기로 결심하는 것 등은 작년에 다 해 본 일이다. 그게 얼마나 갈 지 이미 알고 있다. 그래서 2월도 다 지나가고 봄을 앞둔 지금, 새해에 했던 결심들이 얼마나 바보 같이 느껴지는 지 모른다. 쉬운 일은 아무것도 없다.

그러나! 생명의 기원도 모르고 우주의 원리도 모르는 마당에, 지구가 태양을 365일 공전하는 것을 우습게 볼 일은 아닌 것 같다. 그래서 거대한 자연의 섭리에 맞게 분주하게 움직이고 새로 마음을 다잡는 인간의 갸륵함이 무조건 바보 같은 일은 아닌 것이다.

드라이 재뉴어리

전 세계의 애주가들이 공통으로 하는 위대한 새해 결심 중 하나는 바로 ‘절주’ 일 것이다. 그들의 결심을 독려하기 위해, 영국은 아예 ‘금주의 달(드라이 재뉴어리, Dry January)’이라는 것을 만들어 버렸다. 이름만 들어도 벌써 목이 마른다. 의사들은 환영하지만, 프랑스의 양조업자들은 이 모토가 짜증나기만 하다.

벌컥벌컥이 아니라 홀짝홀짝 마시는 사람까지 1월을 목 마른 채 보내라고 하다니, 정책의 획일성이라는 것이 얼마나 섬세하지 못한 것인 가를 새삼 느낀다. 나는 대학생 때인지 고시생일 때인지 기억하고 싶지도 않은 어느 날, 고등학교때 친구와 만나 술집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다음날 아침 성북지구대 안의 벤치에서 눈을 뜬 이래로, 정신을 잃을 정도로 만취해 본 적이 없다. 친절한 경찰들 로부터 나를 인계(?) 받고는, 잔소리는커녕 묵묵히 해장국을 끓여 주시던 엄마의 측은한 눈빛이, 적당히 마셨다 싶은 시점이면 늘 떠올라 그 다음은 자연히 술 맛이 떨어진다.

몸의 기능과 관련해, 내 위장과 소장은 또 얼마나 경제적인지! 조금만 마셔도 취하니 알코올 분해능력이 시원치 않은 게 분명하다. 덕분에 적은 양으로 술로 인한 기쁨과 환희를 누릴 수 있어, 한마디로 타고난 가성비를 가진 몸이다. 이게 좋은 일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일단은 술 값을 아낄 수 있어서 편리하고 경제적이다.

안타깝게도 세상엔 나처럼 운 좋은(?) 사람들만 있는 게 아니다. 특별한 사정이 있어 술을 조금도 마시지 못하거나, 술이 자신을 파괴하는 지도 모르고 마셔서 이제는 금주가 절실한 수많은 사람들이 존재한다. 그리고 단 한사람도 놓치지 않고 자신의 소비자로 만들 줄 아는 기업과 산업이란 것 역시 굳건히 존재한다.

이미 전 세계적으로 220억 달러에 달하는 ‘무알콜, 저알콜(No and Low)’ 와인 시장이, 올해에는 약 7% 증가될 것이라는 전망이 있다. 개성 강한 특유의 맥주 맛을 무알콜로 즐기듯, 와인 만의 독보적인 향과 맛을 알코올 프리로 실현시키는 것은 참 진보적인 아이디어 같다.

지난 1월 말, 알코올 0%를 구현한 와인을 마신 적이 있다(그럼 이미 와인이 아니잖소??). 품종은 무려 샤르도네! 거기에 유기농과 비건, 할랄푸드 인증과 저칼로리(20Kcal)까지, 좋은 건 다 갖췄다. 마시면 마실수록 건강해지는 듯한 뿌듯함마저 든다. 병 뒤의 스티커 라벨에도, 식품 유형에 과실주가 아닌 ‘과채음료 ’ 라고 적혀 있다.

첫 향부터 향긋하고 달콤한 과육을 가진 복숭아와 리치 등의 열대 과실 향이 강렬하다. 잔을 흔들어 코를 갖다 대니, 익었지만 동시에 상쾌함을 지니고 있는 사과 향, 노랗고 흰 부드러운 과육, 즉 리치와 코코넛 같은 따뜻한 향 사이로 조금은 화려한 흰 꽃 향기까지, 와인에서 느낄 수 있는 아로마를 제대로 구현한 것 같았다.

입을 개운하게 하는 신선한 산미감. 그리고 작은 알이 귀엽게 모여 있는 노란 빛 청포도와 복숭아, 사과의 감미로움. 특별히 피니쉬라고 할 것은 없는 대신, 완벽한 깔끔함이 있었다.

그래도 역시 어딘가 심심하다. 왜 심심한 지는 모두가 알 것이다. 그리운 것은 바로 ‘알코올’ 이다. 알코올이 주는 밀도나 무게감에서 오는 맛의 풍부함, 정신을 조금 흐트러뜨려 사람을 노곤하게 하는 짓궂음이 없는 이 음료는, 포도 주스계의 그랑크뤼 일지 언정, 와인은 아니었던 것이다. 혹시 와인을 진지하게 ‘공부’ 하는 사람이 있다면, 와인에서 알코올의 중요한 역할을 알기 위해 무알코올 와인을 시음해 보는 것도 좋은 선택이 될 것이라고 감히 말 하고 싶다.

와인과 장미의 나날(그림:송정하)
와인과 장미의 나날(그림:송정하)

상상력의 자유로운 역할

알코올 몇 방울이란 것은 참 알다가 도 모를 일이다. 인간에게 이것이 꼭 필요한 지 그렇지 않은 지, 아직도 잘 모르겠다. 알코올로 인해 즐겁고, 또 고통스럽다. 독일의 철학자 칸트(Immanuel Kant)가 알코올에 대해, ‘상상력의 자유로운 역할(a free play of the immagination)’이라고 말 했듯, 인류 역사상 알코올에 의지해 영감을 받아 불후의 작품을 쏟아 낸 수많은 예술가가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리고 그들의 고통과 자기 파괴의 산물을 오늘날 우리가 맨정신으로 즐기고 감명을 받는 이 모든 것들은 아이러니다.

술과 장미의 나날

그 많은 위대한 예술가들은 이미 죽었다. 그리고 스무 살이 넘은 성인이라면 다 안다. 시간은 계속 흐르고, 세상에 오래가는 것은 별로 없다는 사실을. 벌써 곧 3월이지 않은가! 울음도 웃음도, 와인과 장미의 나날도, 안개 같은 꿈 속에서 길을 잠깐 보이고는 닫히고 만다는 어느 시(詩) 구절처럼, 오래가는 것은 없다. 술과 장미의 길지 않은 나날 속에서 얼마만큼을 어떻게 마셔야 할 지는, 각자가 추구하는 삶의 방식대로 정하면 그만이다.


"사람이 주인공인 따뜻한 와인 이야기를 쓰고 싶다"

송정하 소믈리에는 법대를 나왔지만 와인이 들려주는 이야기가 좋아 프랑스 보르도로 떠났다. 보르도 CAFA에서 CES(Conseiller en sommellerie:소믈리에컨설턴트 국가공인자격증), 파리 Le COAM에서 WSET Level 3를 취득했다. 책 <오늘은 와인이 필요해>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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