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어김없이 검은 외투에 검은 목도리, 마스크까지 꼼꼼히 걸쳤다. 세상의 어떤 전염병도 허용하지 않겠다는 각오를 다지며 얇은 장갑도 끼고 잔뜩 웅크린 어깨를 하고 집을 나선 순간 어라, 불어야 할 찬 바람이 불지 않는다. 파란 하늘과 따듯한 공기가, 힘든 시기를 견디어 내는 우리의 차림새와 너무도 대조되어 초현실적으로 느껴진다.

그러고 보니 초목이 싹트고, 겨울잠을 자던 동물들도 땅 위로 나오려고 꿈틀 한다는 경칩이 지났다. 인간이 야기한 각종 문제들에도 불구하고 자연은 이렇게 색을 바꾸고 다양한 모습을 보여주며 그들의 역할을 다 한다는 사실이 새삼 신기하고 고맙다. 슬쩍 본 길가에 난 이름 모를 꽃도 탐스러운 봉오리를 맺었다. 살짝 긴장감이 풀려 움츠린 어깨를 펴니 마스크에 가려진 입가에 절로 미소가 지어진다.

이럴 땐 무조건 떠나고 싶어 진다. 차를 타고 가야 하는 거창한 여행지가 아니더라도 자연의 변화를 즐길 수 있는 가까운 산이나 집 근처 공원, 하다 못해 아파트 내 화단에 신문지라도 깔고 앉아 멍하니 하늘을 보며 새 소리, 바람에 흔들려 살랑이는 나뭇가지 소리를 듣는 것도 좋겠다.

유럽인들이 늘 그렇지만 프랑스인들은 실내보다 실외를 선호한다. 무더위에도 추위에도 굳이 야외 테라스에 자리 잡고 밥을 먹어야 하는 사람들이니 화창한 날은 오죽 하겠는가. 그래서 모처럼 따뜻한 날이면 공원에는 집을 뛰쳐나온 사람들로 넘쳐난다. 서양인들은 피부가 약하다는데 진드기 걱정도 안드는지 돗자리도 없이 그냥 풀밭에 주저 앉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그러고는 할 수 있는 모든 여가를 다 즐기는 것이다. 와인을 곁들여 간단한 음식을 먹으며 수다를 떨거나 책을 보거나 아니면 짐승 만한 개와 함께 공놀이를 하거나 음악을 크게 틀고 춤을 추거나. 그것도 지치면 쿨쿨 낮잠을 잔다.

나도 종종 내가 살던 곳 근처의 보르들레 공원(Parc Bordelais)에 ‘피크닉’을 가곤 했다. 주로 치즈나 비스켓 같은 가벼운 음식과 와인 한 병, 야외용 플라스틱 와인잔을 들고 갔지만, 특별히 배가 고픈 날에는 샌드위치나 주먹밥을 싸 가기도 했다. 한번은 ‘윤식당’에 나온 불고기 샌드위치를 만들어 간 적이 있는데 역시 샌드위치도 한국식이 맛있구나 하며 감탄하며 먹었던 기억이 난다.

공원에서 마실 와인으로 무엇이 적당하냐는 사람의 취향에 따라, 그 날의 기분과 날씨에 따라 다르겠지만, 만물이 생성한다는 들뜬 봄날에 눈과 입을 즐겁게 채워 주기에는 역시 로제 와인이 제격인 것 같다. 화창한 주말, 점심을 먹은 후 내키는 대로 무작정 공원 한 바퀴를 돌 때 나는 종종 마트에 들러 르와르(Loire) 지방의 스위트 로제 와인, ‘카베르네 당주(Cabernet d’Ange)’를 한 병 사서 여럿이 나눠 먹곤 했다. 카베르네 프랑과 카베르네 소비뇽이 블렌딩 되어 잘 익은 딸기, 석류 등의 붉은 과실을 연상시키는 달콤한 향과 깨끗한 끝맺음이 곁들여 먹는 디저트 없이도 그 자체로 완벽한 디저트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 로제 와인이 봄날의 나들이를 한층 즐겁게 만든다. <그림=송정하>

그런데 로제 와인은 도대체 무엇이 문제일까 ?

레드 와인과 화이트 와인을 반쯤 섞어 놓은 듯한 어쩐지 신뢰할 수 없는 비주얼, 혹은 소녀들이나 좋아할 것 같은 핑크색이 주는 부담스러움, 그리고 그 색에서 연상되는 마냥 달콤하기만 할 것 같은 느낌 등 색깔 자체에서 오는 선입견이 로제 와인을 선택하기 망설이게 하는 것 같다.

사실 프랑스에서 레드 와인과 화이트 와인을 섞어서 로제 와인을 만드는 것은, 샴페인을 제외하고는 금지되어 있다. 즉 로제 와인 그 자체를 위해 독자적으로 생산되고 있으며 생산자와 제품의 스타일에 따라 적포도의 껍질이 과즙에 물드는 시간을 조절해서 연한 살구색부터 루비색에 가까운 진한 색을 띤 로제까지 다양한 색의 농도를 보여준다.

대체로 로제 와인은 색이 진해지면 맛도 진해지는 경향이 있다. 옅은 핑크색의 로제는 가볍고 상쾌한 느낌을 주는데 주로 피노 누아나 카베르네 프랑 등으로 만드는 반면, 루비색에 가까운 진한 색을 띤 로제 와인은 그르나슈나 템프라니요 등의 품종으로 만드는데 적당한 무게감과 함께 약간의 떫은 맛이 매력이다.

로제 와인의 가장 큰 장점은 뭐니뭐니 해도 음식과 함께 할 때다. 드라이한 타입의 로제 와인은, 화이트 와인의 청량감과 레드 와인의 붉은 과실에서 느껴지는 맛의 풍부함을 동시에 느낄 수 있어 어떤 요리와도 잘 어울리기 때문이다. 햇살이 조금 뜨겁다 싶을 정도로 화창한 날 고기를 구워 먹는 자리에서, 붉은 고기에 화이트 와인은 좀 그렇고 그렇다고 레드 와인을 마시기엔 목넘김이 시원한 상쾌함이 간절할 때 로제 와인은 가장 완벽한 선택이 될 것이다.

이렇게 똑똑한 구실을 하는 로제는 사실 혼자 마시기에는 어울리지 않는 와인이다. 로제 와인은 ‘함께 나눔, 햇살, 친목, 축제’를 상징하는 와인이기 때문이다. 프랑스에서는 로제 와인을 위한 마케팅 구호 중 ‘소셜 네트워크는 그만, 로제 와인을 나누며 사람을 만나요’라는 표현을 쓸 정도이니, 로제 와인이 사람들에게 어떤 의미인지 쉽게 알 수 있다.

사회적 거리 두기를 위한 ‘잠시 멈춤’ 캠페인이 한창이다. 타인과의 만남을 자제하고, 지인과는 인터넷, SNS 등으로 소통하기를 권장하는 시국에 모처럼의 따뜻한 봄 공기를 들이마시니 생각이 로제 와인과 소풍에까지 뻗친다. 하지 말라는 짓은 더 하고 싶은 법이라고 당장이라도 사람들과 함께 나들이를 떠나고 싶은 기분이 든다. 사람과 부대끼며 누리는 일상의 소중함이 그 어느때보다도 절실하게 가슴에 와 닿는 하루하루다. 무르익은 봄 날, 보고 싶은 얼굴들과 로제 와인을 나누며 왁자지껄 떠드는 상상을 하며 오늘 하루를 또 견디어 본다.

▲ 송 정 하

법대를 나왔지만 와인이 들려주는 이야기가 좋아 프랑스 보르도로 떠났다. 보르도 CAFA에서 CES(Conseiller en sommellerie:소믈리에컨설턴트 국가공인자격증), 파리 Le COAM에서 WSET Level 3를 취득했다. 사람이 주인공인 따뜻한 와인이야기를 쓰고 싶다.

소믈리에타임즈 칼럼니스트 송정하 noellesong0520@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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