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인과 커피, 삶을 디자인하다] <3> 잊을 수 없는 사람

"희망이 적건, 고통스럽건, 가능성이 제로가 아닌 한 포기해선 안 돼"
승인2018.12.18 11:08:15

오늘은 크리스마스 시즌을 축하하면서 봄을 기다리는 성급한 마음으로 '라 브란까이아 일 블루 2005년'을 셀러에서 꺼내듭니다.

▲ ⓒbrancaia.com

LA BRANCAIA IL BLU 2005
산지오베제 55%, 메를로 40%, 까베르네소비뇽 5%

이 와인의 에티켓은 단순하고 독특한데 지중해를 닮은 컬러의 다크 블루가 깊이를 알 수 없는 바다처럼 매우 인상적입니다.

이탈리아에서 가장 유명한 와인인 '사시까이아'처럼 이 와인도 이탈리아 접미사 '~aia'로 끝나는 와인입니다. 사실 이 접미사가 붙은 와인은 다 훌륭한 와인임이 분명합니다.

오르넬라이아, 솔라이아, 루피까이아, 올마이아, 펠차이아 등이 모두 슈퍼 투스칸 20위 안에 드는 명품 와인입니다. 물론 그중에서 최고의 와인은 1968년 처음 세상에 나온 '돌이 많은'이라는 뜻을 지닌 사시까이아입니다. 사시까이아의 상업적 모험은 그 후 슈퍼 투스칸 현상이라는 물결을 주도했습니다.

슈퍼 투스칸 와인은 그때까지 촌스러움에 머물러있던 이탈리아 로컬와인을 잠에서 깨어나게 하여 국제적인 스타일을 갖춘 이탈리아 최고의 와인으로 세계 속에 그 이름을 알렸습니다.

오늘 맛보는 토스카나 와인 '일 블루'도 슈퍼 투스칸답게 달콤하고 매콤한 터치로 미각을 황홀하게 녹여냅니다.

하지만 이 와인의 부드러움은 여성적인 부드러움이 아니라 직선을 추구하는 남성적인 골격을 지니고 있습니다. 쵸콜릿 근육을 자랑하지만 근육질을 전면에 드러내지 않으면서 긴장된 섬세함은 보일 듯 보이지 않고 곧바로 그 섬세함이 우아하게 입 속에서 퍼져나가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이탈리아 조각품 다비드상과 같은 남성미가 보여주는 매끈하고 정교한 아름다운 구조를 갖춘 와인이라고나 할까요.

블랙베리와 블랙체리의 과일향이 허브, 제비꽃, 커피 향과 어우러져 스모키하게 흩어지는 풀 바디한 긴 여운은 지중해 바닷가로 나를 데려가서 추억에 발묶인 사람처럼 서성이게 합니다.

오래전에 읽었던 <냉정과 열정 사이>라는 소설이 떠오릅니다.

이 소설은 남성, 여성 두 소설가가 같은 제목으로 각각 한 권으로 써서 구성해낸 재미있는 플롯을 보여준 작품이었습니다. 에쿠니 가오리는 여자 주인공 아오이(ROSSO)의 입장에서 이야기를 전개해 가고 츠지 히토나리는 남자 주인공 준세이 (BLU)를 멋지게 그려냈습니다. 그리고 이 두 소설 주인공의 운명은 냉정과 열정 사이를 오가며 이야기가 서로 교차됩니다.

한모금의 와인을 집중하여 마셔봅니다.

일 블루의 바이올렛향이 불현듯 이 소설의 주인공 아오이와 준세이를 불러옵니다. 

아오이는 마치 내가 현실에서 사랑했던 여인처럼 느껴집니다. '아니 진짜 사랑한 건 아니었을까?'

와인잔에서 풍겨오는 바이올렛 향(제비꽃 향)은 그녀가 남겨놓고 사라진 자취의 잔향인 양 아련한 사랑을 갈망케합니다.

자신의 옆에 있는 사람을 사랑하지 못하고 마음 속의 과거의 연인에게 얽매여 있는 두 사람. 서른 살 생일날. 피렌체의 두오모에서 만나기로 한 농담같은, 약속 아닌 약속에 발이 묶여버린 준세이의 독백이 들려오는 듯합니다.

"희망이 적건, 고통스럽건, 가능성이 제로가 아닌 한 포기해선 안 돼"

그리고 피렌체의 기적같은 만남이 이루어집니다.

"만날 것을 믿고 있으면, 언젠가는 만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런 생각이 문득, 과거의 약속을 생생한 현실로 만들어버렸던 것이다"

▲ 영화 '냉정과 열정 사이' 스틸컷 <사진=네이버영화>

이 소설이 동명의 영화로 만들어져 관객을 꽤 동원했었지요. 영화 속에는 와인을 마시는 장면이 몇차례 나옵니다만 이 와인만큼 BLU로 표상된 남자 주인공 준세이를 드러내지는 못하는 듯합니다.

영화에서 이 와인이 등장했다면 그야말로 금상첨화가 아니었을까요.

내가 이탈리아 와인을 마셔온 햇수는 좀 오래되었는데 마셔본 와인 중에서 소설의 주인공 준세이를 가장 잘 은유해주는 와인이 바로 오늘 마신 이 '라 브란까이아 일 블루'라는 확신이 듭니다.

'너에게도 정말 잊을 수 없는 사람이 있냐?'고 와인잔을 든 채로 준세이가 나에게 묻는다면 '그래, 나도 아오이를 사랑한다'라는 언술을 와인의 향미와 취기 때문에 드러내고 싶어지는 점점 깊어가는 겨울밤입니다.

마숙현 대표는 헤이리 예술마을 건설의 싱크탱크 핵심 멤버로 참여했으며, 지금도 헤이리 마을을 지키면서 `식물감각`을 운영하고 있다. 와인, 커피, 그림, 식물, 오래 달리기는 그의 인문학이 되어 세계와 소통하기를 꿈꾼다.

소믈리에타임즈 칼럼니스트 마숙현 meehania@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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