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스카나의 주도 피렌체에서 목적지를 몬탈치노로 설정하면 내비게이션이 안내하는 경로는 대충 이렇다. 먼저 내비게이션 화면의 화살표는 피렌체-시에나를 연결하는 끼안티 클라시코 지방도로를 보여주다가 시에나 외곽 순환 도로를 가리킨다. 이어 몬탈치노-시에나 갈림길을 만난 화살표는 몬탈치노 방향으로 좌회전 커브를 그린 뒤 부온콘벤토 중세 마을 까지 한 시간 정도 더 달린다.

부온콘벤토를 통과한 길은 완만한 곡선과 급한 커브 길을 만나 길 반복하다가 부르넬로 지방도로(Strada Provincia del Brunello)에 이른다. 여기서부터 부르넬로 디 몬탈치노의 수도인 몬탈치노까지 9.5km 구간이 시작된다. 이 길은 와인명을 도로명에 채택한 첫 사례 중 하나로 손꼽힌다. 이탈리아어를 모르는 사람이라도 길 설계자의 의도를 금방 알아차릴 만큼 도로명이 직관적이다.

비냐 디 라고에서 바라본 발 디 수가 와이너리 경내
비냐 디 라고에서 바라본 발 디 수가 와이너리 경내

발 디 수가 와이너리는 부르넬로 지방 도로의 첫 구간인 발디 카바에 위치한다. 북서부 몬탈치노의 올리브 숲, 사이프러스 가로수, 포도밭이 연출하는 자연무늬가 고운 곳이다. 양조와 셀러시설로 빼곡한 와이너리 건물과 작은 호수가 도로를 사이에 두고 마주 보고 있다. 호수 가장자리는 포도밭이 차지하고 있는데 그 형태가 중앙 무대를 객석이 빙 두르고 있는 원형극장과 흡사하다. 호숫가 포도밭이라 해서 이름을 비냐(포도밭) 디 라고(호수)라 지었다고 하며 발 디 수가 최초의 부르넬로를 배출했고 30년 넘게 판매1위를 고수하고 있어 시그니처 위상을 누리고 있다.

비냐 델 라고 외에도 몬탈치노 남동부, 남서부에 밭이 있으나 수확한 산조베제는 모두 이곳 시설로 보내진다. 여기서 부르넬로 디 몬탈치노 승인을 얻는데 필요한 일련의 공정을 밟는다. 하지만 건물 어디를 뜯어봐도 52헥타르의 밭과 연생산 30만 병이란 덩치에 걸맞은 시설은 눈에 띄지 않는다. 건물 곳곳에서 농장에서 개조, 확장, 신축을 거쳐 현대적 모습을 갖추게 된 와인 패밀리가 세월과 적응하고 타협한 체취가 느껴진다. 발 디 수가를 창립한 오너 가족은 몬탈치노 정착에 이어 제대로 만든 부르넬로를 출시하기까지 20년이나 걸렸다. 이어 3종류로 구성된 부르넬로 싱글빈야드 라인이 정착되기 까지 제2의 20년이 소요됐다.

농장에서 슬로프 프로젝트까지

이탈리아 2호 마스터 오브 와인, 안드레아 로나르디 최고 운영 책임자
이탈리아 2호 마스터 오브 와인, 안드레아 로나르디 최고 운영 책임자

1960년대 몬탈치노는 현재와 사뭇 달랐다. 이제 막 부르넬로 와인은 Doc등급에 선정되었고 대다수의 부르넬로 와인은 몬탈치노 출신의 농장주가 운영하는 시설에서 만들어졌다. 농노에서 해방된 농부들은 독립 와이너리 창업을 서둘렀다. 20년 후면 몬탈치노 지역이 이탈리아 프리미엄 와인 부르넬로 디 몬탈치노로 부상할 잠재성은 일부 몽상가나 모험가에만 비치던 시절이었다.

발 디 수가는 원래 농장으로 지어져 모든 땅과 시설은 농산물 재배나 가축 사료용 목초지로 활용되고 있었다. 새 농장주가 1969년 매입했을 때 아무도 이곳이 포도밭으로 탈바꿈할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가족은 농토의 한 모퉁이를 포도밭으로 개간하기 시작했고 조금씩 늘어난 밭은 1982년에 이르자 와인용 포도를 재배할 정도로 늘어났다. 이어 농가를 부르넬로 규정을 만족하는 시설로 개조했고 건물과 마주하는 드넓은 목초지 중앙에 들어서 있는 호수를 사들였다. 목초지가 산조배제 적합지임을 알아차린 가족은 포도밭으로 개간했고 1988년 첫 수확한 포도로 비냐 델 라고 부르넬로를 생산했다. 와인 라벨은 호수 사진을 채택했는데 이는 부르넬로의 포도출처를 분명히 하겠다는 복선이 깔려있다. 이어 몬탈치노의 다양한 기후와 토양의 집중적인 조사가 이루어졌다. 남서 몬탈치노에 토양층이 형성된 시기가 3천만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15헥타르의 비냐 스푼타리 밭을 인수했다. 이어 몬탈치노 남동부 산탄티모 대수도원 인근에 위치한 18.5헥타르 의 비네토 포조 알 그란키오(Vigneto Poggio Al Granchio) 밭을 매입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특징이 확연히 구별되는 밭을 소유했으나 와인스타일은 당시 관행에 따라 다채로운 땅을 조화롭게 블랜딩한 전통 부르넬로를 추구했다. 그러다 1994년 안젤리니 그룹 계열사인 안젤리니 와인즈 & 에스테이츠에 편입되면서 모멘텀을 얻는다. 그룹의 에토레 니콜레토 CEO 가 제안한 새 부르넬로 생산 모토를 말하는데 요약하면 포도밭 세분화를 기반으로 한 전통적이며 신선한 풍미 재현에 집중하는 거다.

니콜레토가 제안한 생산모토는 2009년 안드레아 로나르디에 의해 구체화된다. 안젤리니 그룹에 입사한 이래 다채로운 와인 원산지에서 경험을 쌓은 로나르디 최고 운영 책임자(Chief Operating Officer, COO)는 슬로프 프로젝트(Slope Project)를 발표한다. 즉 기존에 블랜딩 하던 세 군데 싱글빈야드를 따로 분리해서 각 포도밭에 맞는 숙성 룰로 엮는 거다. 포도밭마다 개성이 제 각각인 열매가 열리듯 밭 별 차이는 사람이 금방 인식할 정도로 명쾌하고 직관적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오크를 바리크에서 25~50 헥터리터 보테로 교체했다. 유기농 비료만 주고 토양유실을 막기 위해 바이오다이내믹 농법을 접목해 피복작물을 심었다. 기후변화로 인한 물 부족을 경감하려고 관개시설 또한 확충했다. 포도송이의 품질 감지율을 높이기 위해 광학센서를 설치했다. 1차 아로마 파손율 최소화 추세에 맞추어 침용시 주스와 껍질을 부드럽게 혼합하고 기간도 연장했다. 또한 규정이 의무하는 오크 숙성기간만 지키고 대신 병숙성 기간을 늘렸다.

여기서 잠시 그룹의 최고 운영 책임자인 안드레아 로나르디를 소개하지 않을 수 없을 것 같다. 로나르디는 지난 9월 마스터 오브 와인에 합격해 이탈리아 제2호 마스터오브 와인으로 등극했다. 로나르디는 아마로네의 본산지인 발폴리첼라 네그라 출생이다. 볼로냐대학에서 영농학을 전공했고 프랑스 몽펠리에 대학교의 석사과정을 마친 다음 워싱턴주대학교에서 인턴과정을 이수했다. 2012년에 안젤리니 와인즈 &에스테이츠(Angelini Wines & Estates)의 전신인 베르타니 도메인의 최고 운영 책임자로 승진했다.

지난 11월 18일 발 디 수가 와이너리에서 슬로프 프로젝트 도입 10주년 기념 시음회가 열렸다. 특히 몬탈치노 최초로 싱글빈야드 부르넬로를 출시한 생산자 리스트에 발 디 수가를 올린 당사자인 안드레아 로나르디가 이끄는 행사여서 뜻깊었다. 시음은 3군데 싱글 빈야드와 각 싱글 빈야드 별로 네 개의 빈티지로 구성되었다. 첫 도입해인 2009년부터 , 2010년, 2016년, 최근 빈티지인 2019년으로 구성되었다. 2009년의 빈티지가 별 4개를 받은 것을 제외하고 모두 별 5개를 획득한 예외적인 해(Outstanding Vintage)로 칭송받고 있어 최상의 모습을 보여줄 것이라는 기대를 모았다.

발 디 수가의 아이콘- 부르넬로 디 몬탈치노 비냐 델 라고 Vigna del Lago

발 디 수가의 첫 부르넬로이자 30년째 꾸준히 판매 1위를 고수하고 있는 플레그쉽 부르넬로다. 호수변을 따라 열 지어 있는 사이프러스 가로수가 상징이며 5헥타르 밭에서만 자란 산조베제로 만든다. 해발 280미터 언덕은 점토가 풍부한 토양층을 지니며 혹독한 겨울과 더운 여름, 일교차가 큰 대륙성 기후를 보인다.

옅고 투명한 루비색이 돌며 우아하며 산도가 두드러지는 개성을 지녀 바롤로 스타일 부르넬로란 별명을 얻었다. 비냐 델 라고에서 자란 산조베제 향기는 섬세하고 산화에 취약해 슬라보니아산 30헥터 리터 오크통에 숙성한다. 슬라보니아산 오크는 기공 크기가 여타의 프랑스 오크보다 좁은 이유로 산소를 통과시키는 양을 제한해 산화가 잘 일어나지 않는다. 이런 이유로 북부 몬탈치노 생산자들은 산소에 예민한 아로마 숙성은 슬라보니아 보테를 사용해 보존한다.

2019년산 비냐 델 라고는 바이올렛, 육향, 스파이시, 찻 잎, 타임, 불러드 오렌지의 신선한 향이 감돈다. 침샘을 자극하는 산미와 어린 타닌은 미각에 생동감을 준다. 2016년 빈티지는 잔잔한 아로마가 일다가 차츰 체리, 라즈베리, 크랜베리, 바이올렛 향이 또렷해진다. 타닌이 좀 더 숙성한 개성을 지니며 집중감보다는 밸런스에 치중하고 있다. 이어 2010년 산은 베리, 체리, 장미의 화사한 느낌과 카시스, 타바코가 아로마를 주도한다. 경쾌한 산도와 깔끔한 미네랄이 밸런스를 이루며 무엇보다 치밀한 조직이 인상적이다. 2009년은 타바코 잎, 눅눅한 숲 내음, 오크향, 오렌지 머멜레이드, 감초, 키나 같은 겹겹의 향기층을 펼쳐 보인다. 성숙기에 이른 타닌은 섬세한 결과 꽉 채우는 듯한 밀도감으로 미각에 충만감을 준다.

보르도 스타일- 부르넬로 디 몬탈치노 포조 알 그란키오Poggio al Granchio

몬탈치노 남동쪽의 산탄티모 대성당과 인접한 18.5헥타르 크뤼다. 와인 라벨은 포조 알 그란키오 포도밭과 이를 둘러싼 배경을 상세히 묘사하고 있다. 라벨의 반은 밭 아래의 지하세계를 보여주는데 점토, 미세한 침전물, 사암, 석회석, 석영 등 신생대 제4기 플라이스토세에 기원하는 퇴적층이다. 이를 갈레스트로 토양이라 하는데 배수력과 보습력이 뛰어나며 구조와 산미도 출중해 토스카나의 명품와인 산지는 이 토양에 집중돼 있다.

검은 실루엣으로 처리한 부분은 몬탈치노의 명산 아미아타산(1750미터)을 표현했다. 포조 알 그란키오 밭은 해발 320~380미터의 아미아타 산자락에 놓여있고 서늘한 대기와 심한 일교차가 특징이다. 로나르디 MW에 따르면 이곳 산조베제는 타닌 함량이 높고 선이 굵고 날카롭기 때문에 보르도식으로 프랑스산 바리크에 숙성하는 게 바람직하다. 프랑스산 오크는 기공 수가 많고 직경도 커 산소를 많이 통과시키므로 단기간에 날이 선 타닌을 부드러운 결로 다듬어준다.

2019년 산 부르넬로는 체리, 장미, 딸기의 달큰한 냄새와 허브, 구운 야채, 낙엽, 바이올렛이 어우러진다. 여운은 블러드 오렌지와 오크의 그윽한 풍미가 채운다. 타닌은 잘 다듬어진 결과 이를 감싸고 있는 질감이 벨벳을 연상시킨다. 2016년은 블러드 오렌지, 라즈베리, 체리, 블랙티, 감초, 유칼립투스 향을 다채롭게 피운다. 타닌 자체도 구조가 잘 잡혔고 은은한 산미와 결합해 오묘한 맛을 낸다. 2010은 체리, 장미, 제라늄의 발랄함과 염분 내음이 절묘하게 어우러진다. 시트론 향이 배인 산미, 오랜 숙성력이 주는 다듬어진 타닌 결과 조밀한 구조가 힘을 발산한다. 2009년 빈티지는 낙엽, 숲의 눅눅한 향기, 초콜릿, 시럽에 졸인 체리, 자두, 블랙베리의 농후함이 매혹적이다. 실키한 타닌이 선사하는 유연함, 여기에 어우러진 경쾌한 산미와 미네랄이 탄탄한 구성력을 자랑한다.

부르고뉴 스타일- 부르넬로 디 몬탈치노 비냐 스푼타리 Vigna Spuntali

1988년 남서쪽 몬탈치노의 잠재성을 예측한 옛 오너가 전략적으로 투자한 곳이다. 15헥타르에 30년 수령의 부르넬로 에너지가 꿈틀거린다. 몬탈치노 남서부는 지중해 꽃으로 알려진 금작화(broom브룸이라고도 함), 지중해 숲, 수 백 살의 올리브가 장관을 이루어 가장 지중해적인 부르넬로란 별명을 듣고 있다.

티레노 해안이 불과 40km로 가깝고 기후도 온화해서 볼룸 감 있는 부르넬로를 낳는다. 기후가 맑으면 엘바섬이 보이고 여름철 석양 무렵이면 따뜻한 기후와 인근의 숲은 독특한 미세기후를 형성해서 부르넬로지역 중 포도가 가장 먼저 완숙한다. 거기다 몬탈치노 중 가장 오래된 토양층 (신생대 3대 올리고세)에 속한다. 캐노피 관리(나무 식재 수와 가지, 줄기, 잎의 수를 종합적으로 관리), 유기농 비료를 사용하며, 가뭄이 극도로 심할 때는 물을 공급하는 등 맞춤식 밭 관리를 도입했다.

향기가 짙으며 타닌이 구조를 지탱해 주는 힘이 부족해 다소 집중감이 떨어진다. 그래서 부르고뉴의 피노누아 발효 방식을 도입해 송이를 통째로 침용한다. 침용 시간을 늘리면서 타닌을 보강하는 동시에 펌핑오버 횟수와 속도를 감속시켜 아로마 파괴를 극소화한다. 산소 투과량을 제한하는 슬라보니아산 보테를 사용해 타닌의 산화를 최소화 한다.

2019년은 병입 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았는데도 허브, 제라늄, 블러드 오렌지향을 조화롭게 피웠다. 짙은 루비색이 돌며 산미와 타닌이 튀는 감이 없지 않아 있다. 2016년 빈티지는 바다 짠 냄새, 낙엽, 감초, 흑자두, 유칼립투스를 거침없이 쏟아낸다. 알코올과 결합한 산도는 한층 부드러워졌다. 타닌은 고품질 포도의 껍질에서 우려낸 조화롭고 순한 맛을 낸다. 2010은 타바코, 농밀한 체리, 산딸기, 라즈베리, 해조류, 스파이시, 타르, 캄파리의 쌉쌀한 향기가 풍성하다. 매끄러운 타닌은 중후한 질감을 지니며 입안에 깊은 울림을 남긴다. 2009년은 색깔에 검붉은 색이 돌며, 버섯, 타바코, 숲 향기, 대추 등 농밀한 과일과 페퍼, 정향, 말린 꽃, 레드 오렌지의 복합적인 개성이 만발하다. 산미의 경쾌함과 타닌의 매끄러운 결이 기품을 지니며 강렬한 집중감도 겸비한 풀바디한 부르넬로를 감상하기에 그만이다.


백난영 
이탈리아 소믈리에 협회(Associazione Italiana Sommelier) 공인 소믈리에
국제 와인 품평회 심사원
이탈리아 와이너리 투어 운영
이탈리아 치즈 테이스터 협회(Organizzazione Nazionale Assaggiatori Formaggi) 1 레벨 와인 치즈 테이스터
랑게 와인 앰버서더
로에로 와인 저널리스트 협회가 주최하는 2022년 국제 와인 저널리스트에 선정

Certified Sommelier by Associazione Italiana Sommelier
Columnist of Korean Wine Magazines
Wine Judge from International Wine Awards
Awarded as Best Foreign Journalist for Roero Wine Region
Langhe Wines AmbassadorOrganizer of Winery Tour in Main Italian Wine RegionFirst Level Certified Cheese Taster by Organizzazione Nazionale Assaggiatori Formagg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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