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들의 부러움을 사던 유럽 생활도 적응하지 못하던 시절이 있었다. 생각해 보면 인천 공항을 떠나 비행기에 오르는 순간부터였던 것 같다. 

유학 계획표까지 작성하며 부모님을 안심시킨 나는 분명 새로운 도전 앞에서 가득 설렘을 안고 당당히 걸어갔어야 했다. 하지만 배웅을 나온 부모님을 향해 손이 떨어져 나가도록 바이바이를 하는 동안의 내 발걸음은 마치 가위에 눌려 꼼짝할 수 없는 다리만큼이나 쉽게 움직여지지 않았다.

경유지인 베트남 호찌민의 공항 로비에 앉아 프랑스 샤를 드골 공항을 향하는 비행기를 기다리는 긴 시간 동안 나는, 그제서야 내가 얼마나 딱한 인간인가를 실감했다. ‘내가 지금 여기에 왜 있는 거지?’ ‘어디로 가고 있는 거지?’ 한참을 기다린 후 파리로 향하는 비행기를 타기 위해 줄을 선 엄청난 무리의 키 큰 프랑스인들의 대열에 합류했을 때에는 그 이질감에 공포감마저 느꼈다.

오후 2시가 넘어 보르도 생 장(Saint Jean) 역에 도착했을 때의 그 뜨거운 햇살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이미 9월 말임에도 불구하고 기온은 30도를 웃돌았다. 밝기를 최대로 한 듯한 그 햇살은 엽서에서나 볼 법한 이국적인 건물과 원색의 간판 그리고 노천카페의 테이블들을 더욱더 선명하게 비추고 있었다. 마치 흑백의 세상에 있던 사람이 총 천연 색의 세상에 덩그러니 떨어진 것만큼이나 그 햇살은 어디서도 경험해보지 못한 것이었다.

숙소로 가기 위해 낯선 주소를 들고 탄 트램에서는 역시 지금껏 맡아보지 못했던 달큼한 향수 냄새가 코를 찔렀다. 허기를 달래기 위해 프랑스에서의 첫 저녁 식사로, 숙소 앞 피자 가게에서 뭣도 모르고 주문 한, 염소치즈가 들어간 피자는 거의 이틀에 걸친 낯선 여정을 마무리해 주는 마지막 충격이었다. 염소치즈 특유의 시큼한 냄새와 입안을 가득 채우는 거친 질감의 치즈를 우물거리며 나는 생각했다. ‘아, 여기에 한국과 비슷한 것은 아무것도 없구나!’ 그 후 많은 좋은 것들을 발견하고 받아들이게 됐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아직도 보르도 기차역의 뜨거운 햇살과 달착지근한 향수 냄새 그리고 염소치즈를 떠올리면 머리가 어질 해지는 이질감 그리고 알 수 없는 외로움이 느껴진다.

▲ 보르도 생 장(Saint Jean) 역 <사진=송정하>

계속 낯설고 이질적이었던 것만은 아니다. 당연하지 않은가. 그곳도 사람 사는 곳이니 말이다. 도착한 후 얼마 지나지 않은 주말의 어느 날, 숙소 아랫집에서 들려오는 비틀즈의 친숙한 ‘Let it be’ 에 마음이 한없이 따듯했던 적이 있다. 프랑스 사람들은 웅얼거리는 샹송만 들을 것 같았는데, 비틀즈의 그 노래는 마치 나를 환영하고 위로하기 위해 특별히 틀어 놓은 음악 같았다. 이럴 때 세계화란 얼마나 좋은 것인가! 아래층의 더벅머리 아저씨는, 음악 소리가 너무 크지는 않냐며 나에게 조심스레 물었지만 그 노래가, 안쓰러울 정도로 겁먹은 한 어른 인간을 얼마나 위로했는지 그는 모를 것이다.

또 한 번은 버스를 타고 가는데, 길을 잘 몰라 내리는 곳의 정류장 위치를 앞에 앉은 젊은 여성에게 물은 적이 있다. 그녀의 자세한 설명에도 프랑스어를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던 나는 대충의 감으로 내릴 정류장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도 이런 나를 눈치챘는지 나를 힐끔힐끔 보며 어딘지 불안한 내색이었다. 그러다가 가방에서 종이를 꺼내 무언가를 적더니 큼지막하고 동글동글한 글씨로 지도를 그려 건네주는 것이 아닌가. 너무도 고마운 마음에 나는 연신 메르시를 연발했지만 그녀는 여느 프랑스인 답지 않게 눈도 마주치기를 피하며 오히려 부끄러워하고 있었다. 얼굴만큼이나 마음도 예쁜 그녀가 준 그 쪽지를 나는 지금도 가지고 있다.

외국(인)에 대한 스테레오타입 즉 고정관념이란 것은 내가 아닌 다른 사람들을 싸잡아 유별난 사람 취급을 하기 위해 만들어진 과도한 착각에 불과 한 걸까, 아니면 정말 그럴 만한 근거가 있는 걸까? 항상 모든 최악의 순간을 비켜가는 감사한 운명을 타고났지만, 프랑스와 프랑스인에 대해 말로만 듣던 소소한 것들을 나도 종종 겪곤 했다. 그리고 겁이 많은 나에게 그 영향은 언제나처럼 크고도 깊었다.

그날은 체류증을 연장하기 위해 더 이상 완벽할 수 없는 수많은 서류를 들고 관공서를 찾았었다. 하지만 마린 르펜(Marine Le Pen)을 닮은 금발의 그 직원은 내 서류가 영 못마땅했나 보다. 와인학교의 최종 시험 성적표가 왜 없냐는 것이다. 나는, 학교 방침상 시험은 내년에 있으며, 지금으로서는 출석과 중간 성적표 밖에 줄 수 있는 것이 없다고 해명했지만, 그녀는 그걸로는 설명이 부족하다며 새로운 체류증 발급을 유보하겠다는 말을 했다. 그러고는 나를 위아래로 훑으며 난데없이 가족 관계가 어떻게 되는지, 프랑스에 또 올 한국의 가족들이 있는지 묻기 시작했다. 나는 발끝에서부터 머리끝까지 뜨거운 열기가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내가 프랑스에서 쓰는 돈이 얼마인 줄 아느냐, 한국의 경제력이 얼마나 되는지 아느냐, 나는 프랑스에서 보고 배운 것을 한국에 전할 사람이다, 너희가 나를 이렇게 취급하면 안 된다’라고 말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마는, 나는 갑자기 모든 것이 서글퍼져, 학교에 자세한 사유를 설명하는 편지를 요구해 다시 오겠다는 바보 같은 말을 하고 그 자리를 피하고 말았다.

당시 프랑스는 잡지 샤를리 에브도(Charlie Hebdo)의 만평, 파리 축구장과 극장 등을 향한 연쇄적인 테러로 인해 프랑스 전역에 테러에 대비한 감시와 경계를 강화하던 시기였다. 어릴 적 동생이 가지고 놀던 장난감, 지아이 유격대를 연상시키는 군인들이, 장전한 소총을 옆구리에 끼고 아무렇지 않게 인파에 섞여 돌아다니곤 했다. 한 번은 보르도 생 장역에서 근교로 가는 열차 티켓을 교환하기 위해 역 안을 서성이고 있었다. 그 순간 역 안을 순찰하던 ‘장다르므(Gendrame)’라 불리는 치안 헌병 두 명이 내게 접근하더니 신분증을 요구하는 것이었다. 

그 당시 나는 정식 체류증을 기다리며 종이로 된 임시 체류증을 받은 상태였는데 하필 지갑에 넣고 다니기에 번거롭다는 이유로 집에 두고 온 채였다. 다행히 휴대폰으로 사진을 찍어 놓은 게 있어서 그걸 대신 보여줬지만 헌병 한 명으로부터 다음부터는 체류증을 꼭 지참하라는 경고를 들어야만 했다. 그동안 차곡차곡 쌓아 둔 감정을 주체할 수 없었는지 나는 목소리를 높이며 따지기 시작했다. ‘옆에 지나가는 머리에 두건을 쓴 사람은 가만두고 왜 나에게만 신분증을 요구하는가, 동아시아인 테러리스트를 당신은 본 적이 있는가, 나는 많은 돈을 들여 공부하기 위해 학생 비자를 가지고 온 한국 사람이다’ 하고 말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총을 든 경찰에게 무슨 용기가 나서 그런 말을 쏟아부었는지 모르겠다. 당황한 그 헌병은 ‘나는 내 일을 하는 것뿐이다’라는 말을 하고 사라졌다.

여러 일이 겹치니 나는 굉장히 쇠약 해져 있었다. 이용하던 은행에서는 자꾸만 어이없는 실수를 하고, ‘실례합니다(Pardon)’라는 말을 습관처럼 하는 그들에게서,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는 ‘미안합니다’라는 말은 의외로 듣기 힘들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가끔씩 사 먹는 샌드위치는 늘 차가웠고, 역시 차가운 접시에 담긴 다 식은 스테이크 옆에는 어느 음식에나 어김없이 따라오는 감자튀김이 있을 뿐이었다. 그마저도 학생에겐 비싼 외식이었다. 나는 속까지 뜨끈해지는 따뜻한 음식이 먹고 싶었다. 그리고 전차를 두 번이나 갈아타야 하는 아시아 마트에 들러 한국 식재료를 사 갖고 집으로 돌아가는 트램 전철역에서 나를 향해 가운뎃손가락을 보이며 킬킬거리며 웃는 남학생 두 명을 마주한 순간, 나는 생각했다.

‘아, 떠나야겠다. 포르투갈로. 단 며칠이라도.‘

왜 포르투갈이었을까. ‘유럽의 끝에서 과거의 영광을 조용히 품고 그들만의 리듬에 맞추어 살고 있는 그들 속으로 들어가 보고 싶었다’라고 말하면, 포르투갈이 조금 기분 나빠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와인 교과서 한 귀퉁이에서 보았던 따듯한 채소 수프, 칼도 베르드(Caldo Verde)라는 것을 상큼하고 짭짤한 화이트 와인, 비뉴 베르드(Vinho Verde)와 먹어보고 싶었다. 여러 곳을 효율적이고 재빠르게 돌아다니는 데에 재능이 없는 나는, 포르투갈의 북서부 포르투(Porto) 한곳으로 정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달콤하고 진한 포트와인을 마실 것이다. 물론 보르도에서 포르투로 가는 저렴한 항공편이 있다는 실용적인 이유를 빼놓을 수 없다. 비행기 표를 예약한 후, 학교에서는 프랑스를 제외한 와인 생산국에 대한 논문과 발표를 위해 제비 뽑기를 했었는데, 나는 포르투갈을 뽑았다. 그러고는, 이건 운명이 아니냐며 혼자 감탄하고 즐거워하기도 했다. 하지만, ‘나처럼 머리가 검고, 진한 밤색 눈동자를 가지고 있으며 나와 키 차이가 많이 나지 않는 사람들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가고 싶었다’라는 것이 가장 솔직한 심정이었다.

프랑스에 도착한 지 1년이 조금 지난겨울, 그렇게 나는 포르투로 향했다.

▲ 송 정 하

법대를 나왔지만 와인이 들려주는 이야기가 좋아 프랑스 보르도로 떠났다. 보르도 CAFA에서 CES(Conseiller en sommellerie:소믈리에컨설턴트 국가공인자격증), 파리 Le COAM에서 WSET Level 3를 취득했다. 사람이 주인공인 따뜻한 와인이야기를 쓰고 싶다.

소믈리에타임즈 칼럼니스트 송정하 noellesong0520@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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