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정하의 와인스케치북] 와인 스트레스

승인2020.10.20 14:49:56

영국의 저명한 와인 전문가 휴 존슨(Hugh Johnson)은 그의 저서 <세상에서 가장 맛있게 와인을 즐기는 방법>의 첫머리에서 이렇게 말했다.

‘’레이블을 보지 마라. 가격도 무시하라. 오직 하나만 생각하라. 바로 지금 잔에 든 이 와인이 얼마나 맛이 있는가 하는 것만 생각하라!’’

지당한 말씀이다. 이보다 더 간단하고 명확하게 와인을 대하는 자세를 설명하진 못 할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딘가 찜찜한 의문은 남는다. 마치 ‘삶이란,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즐기는 것’이라는 인생의 깨달음을 깊이 공감하면서도 구체적으로 어떻게 실천할지를 몰라 우왕좌왕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래서, 삶은 어떻게 즐기는 건데요? 내 앞에 놓인 와인, 이 정도면 맛있게 즐길 만 한가요? 순간을 즐기라는 명제 앞에서 온통 물음표투성이다.

휴 존슨도 이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것은 와인을 가장 맛있게 마시는 방법 중 하나이지만, 이 간단한 방법을 실천에 옮기기는 말처럼 쉽지 않다. ‘지금 이 와인이 얼마나 맛이 있는가?‘하는 것은 대답하기 여간 어려운 질문이 아니기 때문이다.’’

아무리 와인에 대한 취향과 감상은 개인적이고 주관적이라지만 세상 모든 것이 직업의 영역으로 들어올 때 늘 그런 것처럼, 와인을 직업으로 택하려면 어느 정도 객관적이고 전문적인 지식과 훈련이 필요하다. 그 훈련이란 것은 와인의 맛과 향에 대한 감각을 기르고 와인을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기 위한 반복되는 시음이다. 누군가에게는 와인의 수도라 불리는 곳에서 다양하고 질 좋은 와인을 마음껏 마셔볼 수 있어 더없이 행복한 순간들이겠지만 사실 나에게는 꽤 고통스러운 기억으로 남아 있다.

내가 그다지 섬세하거나 예민한 감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은 예전부터 알고 있었다. 미묘하게 다른 립스틱 색상 사이에서 고민하는 친구들을 잘 이해하지 못했으며 매사에 상황 파악이 느리고 상대방의 말귀를 잘 못 알아먹는다는 소리를 많이 들었기 때문이다. 심지어는 상한 김밥을 먹어도 아무 탈이 없다며 자랑스레 떠벌리고 다닐 정도로 모든 게 무딘 편이니 와인을 감상하는 후각과 미각이라고 뭐 다를 게 있겠는가.

와인학교 초반 엉뚱한 테이스팅 노트를 작성하면서도 나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지 않고 나름의 노력을 기울이며 시음을 즐겼다. 도시에서만 자라 자연을 접해 본 일이 별로 없던 나는 막연하게만 알던 각종 꽃의 향기 즉 아카시아, 장미, 바이올렛 등 그윽한 향기의 향연이 작은 와인 잔 안에서 펼쳐지는 것이 즐거웠으며 아몬드 향과 바닐라 향이 내가 알던 향과 다르다는 사실을 발견했을 때에는 그 신기함과 놀라움에 그저 헤헤 웃기만 했다.

향과 맛을 분석하여 어느 정도 말 할 수 있다면 그것들을 바탕으로 와인에 대한 종합적인 평가와 결론을 내릴 줄 알아야 한다. 그래서 이 와인은 무슨 품종으로 만들었는가? 오래된 와인인가 아니면 갓 만든 와인인가? 지금 마시기에 적당한가? 더 나아가 어느 지역에서 만든 와인인가? 등등. 문제는 여기에 있다.

와인을 배워가는 기쁨도 잠시, 학교에 다닌 지 어느새 1년이 지나고 곧 시험이라는 큰 산과 졸업을 앞두고 있을 즈음 슬슬 초조함과 긴장감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 레드 와인 세 잔을 두고 각각의 포도 품종을 알아맞히는 모의 시험이 있었는데 나는 그 세 가지를 모두 틀리고 말았다. 어느 하나만 틀린 것이 아니라 전부 틀려서 선생님은 오른쪽 위에서 왼쪽 아래까지 틀렸다는 표시로 시험지에 주욱 대각선을 그어 버렸다. 수능을 앞둔 고3이 찬 바람 부는 어느 가을날, 처참한 모의고사 성적표를 받았을 때의 기분이 이럴까. 그날, 덜컥 겁이 나면서 나는 성급하게도 이런 생각을 했다.

‘아, 내가 길을 잘못 들었구나. 와인은 내가 할 것이 아니구나.’

길을 잘못 들어섰다고 해서 당장 비싸게 지불한 와인학교를 뛰쳐나와 한국으로 돌아갈 수도 없는 노릇이니 나는 내 나름대로의 방법으로 밀어붙이기로 했다. ‘타고난 감각이 형편없다면 일단 지식으로 무장하리라’는 각오로 포도 품종과 각 지역별 와인의 특징 등 주어진 책의 내용을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암기하고 시음에 임하는 것이 내가 찾은 방법이었다.

그러다 보니 나는 어느새 와인을 내 감각에 맡기기보다는 머릿속에 입력한 지식에 의존해 시음하고 판단하고 있었다. 가볍게 와인에 대한 감상을 말하는 자리에서도 솔직한 나의 느낌을 말하지 않고 슬쩍 본 병의 레이블에 근거해 내가 알고 있는 지식을 늘어놓곤 하는 식 말이다. 이 방법이 항상 들어맞으면 얼마나 좋을까 마는 앞에 놓인 와인은 불행히도 내 지식 목록과 예상에서 벗어나기 일쑤였다. 중고등학교 시절, 늘 처음 마킹한 답이 정답이거늘 쓸데없는 생각에 사로잡혀 답안지를 교체해 망한 경험이 있지 않던가. 하물며 본능적인 감각이 중요한 와인 시음에서 나는 왜 스스로를 믿지 못했을까!

▲ 책상에 앉아 공부하는 것만이 와인의 전부가 아님을 왜 몰랐을까 <사진=송정하>

급기야 나에게는 일종의 시음 공포증이란 것이 생겼다. 식사와 함께 가볍게 마시는 와인 조차도 와인을 분석할 줄 알아야 한다는 생각에 빠져 마음 놓고 즐길 수가 없었다. 자연스레 와인을 멀리하게 된 것이다. 긴장감과 압박감은 악순환이 되어 시음을 더 방해했음은 말할 것도 없고.  책상 앞 벽면에 붙여 놓고 한동안 삶의 모토로 삼았던, « 인생에 있어서 두려워할 것은 없다. 이해할 것뿐이다 » 라는 마리 퀴리(Marie Curie)의 글귀가 무색하게 나는 점점 와인 자체를 두려워하고 있었다. 추운 겨울날, 고장 난 라디에이터 옆에서 책을 한번 보고 와인을 한번 시음하고, 스트레스를 받아 그다음 순서로는 차가운 맥주 캔을 들이켜곤 했던 시간들을 돌이켜 보면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르겠다.

시험이란 것이 늘 그렇듯 내 시음 공포증은 시험이 끝나자 사라져 버렸다. 와인을 공부한 사람으로서 더 제대로 알고 표현하고 싶은 욕심과 부담은 있지만, 다행히 시험을 앞두고 맞닥뜨린 공포에 비할 바는 아니다.

요즘, ‘즐기는 자는 노력하는 자를 따라갈 수 없다’는 말을 많이 하는 것 같다. ‘노력하는 자는 즐기는 자를 이길 수 없다’는 말을 세태에 맞게 바꾸어 노력을 강조했나 보다. 사실 즐기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노력이 필요하고 그러다 보면 비로소 즐기는 경지에 이르기도 할 것이다. 그래도 이왕이면, 처음부터 두려움을 걷어내고 호기심과 미지의 바다에 몸을 맡기는 즐거움, 되돌릴 수 있다면 그런 쪽을 택하고 싶다.

▲ 송 정 하

법대를 나왔지만 와인이 들려주는 이야기가 좋아 프랑스 보르도로 떠났다. 보르도 CAFA에서 CES(Conseiller en sommellerie:소믈리에컨설턴트 국가공인자격증), 파리 Le COAM에서 WSET Level 3를 취득했다. 사람이 주인공인 따뜻한 와인이야기를 쓰고 싶다.

소믈리에타임즈 칼럼니스트 송정하 noellesong0520@gmail.com

<저작권자 © 소믈리에타임즈,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인기기사

여백

여백
여백
여백
여백
여백
회사소개기사제보광고문의불편신고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이메일무단수집거부모바일 버전
서울시 성동구 성수이로 24길 50 희은빌딩 별관4층  |  전화 : 02-499-0110  |  팩스 : 02-461-0110  |  이메일 : stpress@sommeliertimes.com
등록번호 : 서울 아 03477  |  등록일 : 2014년 12월 12일  |  발행인 : 최염규  |  편집인 : 김동열  |  청소년보호 책임자 : 최염규
소믈리에타임즈를 통해 제공되는 모든 콘텐츠(뉴스, 사진, 동영상 등)는 무단 사용, 복사, 배포시 저작권법에 저해되며, 법적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Copyright © 2020 소믈리에타임즈.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