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m Pérignon 2012, Champagn
Dom Pérignon 2012, Champagn

실제 그의 이름은 피에르 페리뇽 Pierre Perignon이었는데, 47년간 베네딕트 수도승으로, 오빌레르 수도원에서 셀러 마스터로 헌신했던 공로를 인정하여 그가 죽었을 때 도미누스(Dominus: 수도원장)라는 호칭이 추서된 것이다. (일종의 마이가리인 셈이다)

Dominus를 줄인 말이 Dom으로, 그의 이름 앞에 붙게 된 것이다. 우연의 일치지만, 페리뇽이 태어난 해와 죽은 해는 태양왕으로 유명한 프랑스의 루이 14세의 생몰연대와 동일한데, 둘 다 1638년에 태어나 1715년에 사망했다.

한 사람은 태양처럼 빛나며 호화로운 베르사유 궁전에서 사치와 향락의 끝판 왕으로 살았고, 다른 한 사람은 음습한 지하 셀러에서 터져버린 와인 병을 보며 궁시렁대다 한평생을 보냈으니, 인생이란 불공평하기 짝이 없다.

피에르 페리뇽(Pierre Perignon)은 사실 거품이 나는 와인을 끔찍하게 싫어했다. “어떻게 하면 와인에 거품이 생기지 않게 할 수 있을까”라는 인생의 과제 해결을 위해 평생을 고민했다. 그는 오빌레르 수도원에서 수사로 일하며 와인을 만들었는데, 상파뉴 지방은 파리보다 북쪽이라 추위가 빨리 찾아왔다.

기온이 내려가면 일부 남아있던 효모들이 발효를 멈추고 동면 상태에 들게 되는데, 페리뇽 수사는 발효가 끝난 줄 알고 병에 넣어 지하 셀러에 넣어 보관하게 되었다. 이듬해 봄이 와서 온도가 오르면 병속에서 잠자던 효모들이 다시 깨어나 병 속에 남아있는 당을 분해하여 탄산가스를 만들게 되었고, 이때 병의 압력이 증가하면서 병이 펑~하고 폭발해버린 것이다.

문제는 한 병만 터지는 것이 아니라 폭죽처럼 연쇄 폭발을 일으켜 생산량의 반 이상을 잃기도 했기에, 페리뇽은 거의 노이로제에 이를 지경이었다. 뼈빠지게 고생한 일년 농사가 도로아미타불이 되는 것을 누구도 참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는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포도재배 방식과 착즙, 여러 품종을 블랜딩하는 아상블라주 방식과 블랑 드 누아 등을 고안하게 되었고, 코르크 마개를 와인의 마감재로 처음 사용하기도 했다.

병이 터지는 문제는 오랜 시간이 지나 1760년부터 시작된 영국의 산업 혁명으로 해결되었다. 석탄 사용을 통한 고열 용융법으로 병을 제조하면서 병의 강도를 높이게 된 것이다. 코르크의 상업적 생산과 코르크 위에 씌우는 머즐(쇠 철망)의 발명으로 비로소 오늘날과 같은 샴페인이 나오게 되었다.

제대로 된 샴페인은 1844년 아돌프 자끄손 (Adolphe Jacquesson)의 머즐 발명 이후라고 봐야 하겠다. 1710년대부터 거품나는 샴페인이 나오긴 했지만 버블이 아주 미약했다.

발효가 끝난 와인 병 내에 설탕과 효모를 넣어 2차발효를 유도하여 스파클링을 만드는 샴페인 방식 (Methode Champenoise)을 처음 발명한 사람은 영국 의사 Christopher Merret였는데, 1662년 논문에서 샴페인 방식을 처음으로 문서화하고 체계화했다.

산업혁명을 통해 강한 압력을 견디는 병의 제조, 코르크 마개의 양산, 철사 망 머즐의 발명이 있고 난 다음 지금 같은 샴페인이 만들어진 것이다.

어떤 일이든 이론이 먼저 정립되고, 그에 따르는 주변 연관 기술의 발전이 따라야 우수한 품질의 상품이 나오는 것이다.

돔 페리뇽 2012빈은 섬세한 기포가 솟구치며 뿜어내는 상큼한 향에 이어 브리오슈, 배숙, 꿀, 밀랍, 레몬, 오렌지, 살구, 파인애플 향과 흰 후추의 스파이시한 향, 쌉싸름한 아몬드의 맛도 좋았고, 잘 익은 과일 향과 짜릿한 산미의 밸런스가 돋보였다. 오랜 병숙성을 통해 자아낸 깊은 맛과 부드러운 질감은 가히 예술의 경지라 할 수 있다.

Moet & Chandon(모엣&샹동)은 창업자 끌로드 모엣 (Claude Moet)의 손녀와 샹동 Chandon 가문의 아들이 결혼하면서 가업을 이어가면서 개칭한 이름이다. 샹동 가문의 사위가 결혼 때 가져온 것이 바로 피에르 페리뇽 신부가 수사로 있었던 오빌레르 수도원 교회와 부속 포도밭이었다.

돔 페리뇽 브랜드는 원래 메르시에(Mercier) 샴페인이 소유한 상표였으나, 1927년 모엣 가문과 사돈을 맺으면서 무상 양도해준 덕분에 모엣&샹동의 대표 브랜드가 되었다. 모엣 가문은 탁월한 결혼 정책의 본보기라 할 수 있다.

페리뇽 수사의 주요 업적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오빌레르(Hautvillers)의 베네딕트 수도원(Benedictine Abbey)은 1661년까지 10헥타르의 포도원이 있었지만, 품질이 좋았던 Ay 와 Avenay-Val-d'Or 포도원을 포함, 인근 마을에서 십일조를 포도로 대신 받아들여 와인을 만들었다. 수도원장은 본격적인 양조를 위해 재무관리를 겸한 셀러 마스터가 필요했기에 1668년, 당시 30세였던 젊은 수사 피에르 페리뇽(Pierre Perignon)이 수도원에 부임하게 되었다. 페리뇽은 수도원에서 47년을 일하다 1715년 사망했는데, 그의 후임자였던 Dom Groussard와 Canon Godinot은 페리뇽을 완벽주의자로 묘사하면서 포도원의 포도 재배 관행과 와인의 품질 개선에 큰 공을 세웠다고 주장했다.

페리뇽은 최고의 맛과 잠재적인 품질을 가진 피노 누아의 사용을 강력하게 옹호했다. 당시 이 지역의 포도밭에는 피노 누아(Pinot noir), 샤슬라(Chasselas), 피노 블랑(Pinot blanc), 피노 그리(Pinot gris), 피노 뫼니에(Pinot Meunier), 샤르도네(Chardonnay) 등 다양한 포도가 재배되었지만, Pérignon은 피노 누아와 같은 적포도가 봄에 거품을 생성할 가능성이 적다고 믿었다. 와인에 거품이 나는 것을 결함으로 여겼던 그는 거품 발생 가능성을 최소화하려고 정밀한 기술을 개발하기 시작했다.

당시 페리뇽(Pérignon)은 포도나무가 1미터 이상 자라지 않아야 하고 적은 수확량을 생산해야 한다고 규정하면서 공격적인 가지치기를 옹호했다. 수확은 날씨가 매우 서늘한 이른 아침에 했으며, 포도가 온전하게 유지되도록 모든 주의를 기울였는데, 멍이 들거나 깨진 포도는 모두 솎아 냈다. 포도를 밭에서 압착기로 운반할 때도 말을 쓰지 않고 노새와 당나귀를 썼는데, 말은 흥분하여 포도를 손상시킬 우려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Pérignon은 포도를 최대한 빠르고 효율적으로 압착했는데, 포도 껍질에서 색소가 추출되지 않도록 하려는 의도였다.


김욱성은 경희대 국제경영학 박사출신으로, 삼성물산과 삼성인력개발원, 호텔신라에서 일하다가 와인의 세계에 빠져들어 프랑스 국제와인기구(OIV)와 Montpellier SupAgro에서 와인경영 석사학위를 받았다. 세계 25개국 400개 와이너리를 방문하였으며, 현재 '김박사의 와인랩' 인기 유튜버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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