샴페인의 세계에서 '완벽한 해'란 무엇일까? 모든 조건이 신의 축복처럼 맞아떨어져 포도가 최상의 잠재력을 발휘하는 단일 빈티지를 의미하는 것일까? 여기, 그 통념에 단호하게 이의를 제기하는 샴페인이 있다. 자연이 베푸는 우연에 기대는 대신, 인간의 지혜와 예술적 영감으로 자연을 뛰어넘는 완벽함을 빚어내고자 하는 야심. 로랑페리에(Laurent-Perrier)의 프레스티지 퀴베, '그랑 시에클(Grand Siècle)'은 바로 그 담대한 철학의 결정체다. 그랑 시에클이란 영어로 ‘Great Century(위대한 세기)’를 뜻하며 17세기경 프랑스가 서유럽의 정치를 주도하며 문화적 전성기를 누렸던 루이 14세의 통치 시대를 의미한다. Grand Siècle은 로랑페리에가 1959년부터 내놓기 시작한 프레스티지 퀴베 샴페인으로 세개의 빈티지를 블랜딩해서 만든 Multi-vintage 샴페인이다.

'위대한 세기', 그 이름에 담긴 야망
그랑 시에클의 여정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 이름의 근원, 프랑스 역사상 가장 찬란했던 '위대한 세기'로 시간 여행을 떠나야 한다. 17세기, 태양왕 루이 14세의 광휘가 유럽 대륙을 뒤덮었던 시기. '그랑 시에클'은 단순히 한 세기를 지칭하는 단어가 아니다. 그것은 정치, 경제, 사회, 문화를 아우르는 프랑스적 영광의 정점이자, 질서와 균형, 그리고 장엄함에 대한 국가적 신념 그 자체였다.

17세기 프랑스는 정치적으로는 '짐이 곧 국가'라는 선언 아래 왕권신수설에 기반한 절대왕정이 완성되었고, 경제적으로는 콜베르 재상의 강력한 중상주의가 국가의 부를 축적했다. 사회적으로는 모든 길이 베르사유로 통했다. 유럽 귀족 사회의 표준이 된 화려한 궁정 문화와 에티켓은 자연마저도 인간의 이성으로 재단하려 했던 기하학적 정원과 함께 절대 권력의 위용을 과시했다. 이 모든 것은 '고전주의'라는 하나의 미학적 질서로 수렴되었다. 몰리에르의 희극과 라신의 비극, 니콜라 푸생의 회화는 고대 그리스-로마의 예술처럼 조화와 이성, 절제를 추구하며 혼돈을 넘어선 완벽한 질서의 세계를 구현했다.
바로 이 '그랑 시에클'의 정신을 샴페인으로 재현하고자 했던 인물이 바로 로랑페리에를 세계적 반열에 올린 베르나르 드 노낭쿠르(Bernard de Nonancourt)였다. 그는 단일 빈티지의 변덕스러운 개성이 아닌, 각기 다른 해에 수확된 위대한 빈티지들의 장점만을 결합하여 시대를 초월하는 완벽한 균형과 복합미를 창조하고자 했다. 자연의 우연성에 기대지 않고 인간의 '아상블라주(Assemblage)' 예술을 통해 루이 14세 시대의 영광, 즉 '그랑 시에클'을 병 속에 재현하려는 야심 찬 도전이었다.
혁신으로 쌓아 올린 200년의 명성
이러한 담대한 비전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다. 1812년, 오크통 장인이었던 앙드레 미셸 피에를로가 샹파뉴의 심장부 투르 쉬르 마른에 하우스를 설립하며 시작된 로랑 페리에의 역사는 도전과 혁신의 연속이었다. 그의 뒤를 이은 이는 샴페인 역사에서 흔히 만나는 위대한 미망인, 마틸드 에밀리 페리에였다. 남편 외젠 로랑의 갑작스러운 죽음 이후, 그녀는 두 가문의 이름을 합쳐 '로랑페리에'를 탄생시켰고,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무가당 샴페인을 출시하며 까다로운 영국 시장을 공략하는 등 탁월한 사업가적 기질을 발휘했다.

하지만 로랑 페리에의 진정한 도약은 2차 세계대전의 포화 속에서 하우스를 인수한 마리 루이즈 랑송 드 노낭쿠르와, 그녀의 아들 베르나르 드 노낭쿠르의 시대에 이루어졌다. '르 그랑 베르나르'라는 애칭으로 불렸던 그는 샴페인 업계의 관습에 안주하지 않는 개척자였다. 그는 샹파뉴 지역 최초로 오크통 대신 스테인리스 스틸 탱크를 양조 과정에 도입하는 혁명을 일으켰다. 이는 산화 뉘앙스를 배제하고 포도 본연의 순수한 아로마와 신선함, 팽팽한 긴장감을 극대화하기 위한 전략적 선택이었으며, 오늘날 로랑페리에 스타일의 근간이 되었다. 바로 이 혁신적 토대 위에서 그의 가장 위대한 유산, '그랑 시에클'이 탄생할 수 있었다.
그랑 시에클 N°26, 시간의 삼중주
그렇다면 26번째로 세상에 나온 그랑 시에클 N°26은 어떻게 그 위대한 세기를 재현하는가? 해답은 '시간의 삼중주'에 있다. N°26은 서로 다른 개성을 지닌 세 개의 전설적인 빈티지, 즉 2012년(65%), 2008년(25%), 2007년(10%)을 한데 모아 완성한 예술품이다. 100% 그랑 크뤼 포도밭에서 수확한 샤르도네 58%와 피노 누아 42%가 빚어내는 이 블렌드는 각 빈티지의 장점을 완벽하게 조율한 오케스트라와 같다. 풍부한 구조감과 농밀함을 지닌 2012년이 견고한 뼈대를 이루고, 강철 같은 산미와 팽팽한 긴장감을 자랑하는 2008년이 척추를 세우며, 향기로운 매력과 우아함을 뽐내는 2007년이 이들을 감싸 안으며 이른 숙성의 매력을 더한다. 샴페인 최고의 빈티지로 알려진 2008과 2012가 주종을 이룬 덕분이었는지 N°26은 제임스 서클링으로부터 100점 만점을 받는 기록을 세웠다.
이 정교한 블렌딩을 거친 샴페인은 이후 10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효모 찌꺼기(lees)와 함께 지하 셀러에서 오랜 숙성을 거친다. 이 '쉬르 리(on the lees)' 숙성 과정이야말로 마법이 일어나는 시간이다. 날카롭던 요소들은 부드럽게 다듬어지고, 각기 다른 향과 풍미는 서로 녹아들며 헤아릴 수 없는 복합미를 창조한다. 갓 구운 브리오슈와 아몬드, 꿀과 같은 섬세하고 고소한 향미가 피어나는 것이 바로 인고의 시간이 빚어낸 선물이다.
잔에 따른 그랑 시에클 N°26은 백금색 반영을 띤 영롱한 황금빛으로 시선을 사로잡는다. 잔의 바닥에서부터 끊임없이 솟아오르는 미세한 기포의 행렬은 이 샴페인이 품고 있는 에너지와 10년의 숙성을 거친 세련미를 동시에 증명한다. 코를 가까이 가져가면, 처음에는 설탕에 절인 레몬과 백도, 인동덩굴의 섬세한 꽃향기가 피어오르다, 이내 갓 구운 브리오슈와 헤이즐넛, 미세한 분필 가루 같은 미네랄리티의 복합적인 아로마가 압도적으로 펼쳐진다.
입안에서는 황홀한 반전이 펼쳐진다. 실크처럼 매끄러운 질감이 혀를 감싸면서도, 등뼈처럼 곧고 탄탄한 산미가 팽팽한 긴장감을 선사하며 조금의 지루함도 허용하지 않는다. 힘과 우아함, 풍만함과 섬세함이라는 상반된 가치가 완벽한 지점에서 균형을 이룬다. 꿀에 절린 시트러스와 잘 익은 과실의 풍미가 입안을 가득 채우고, 짭짤한 미네랄리티와 함께 비단결 같은 여운이 끝없이 이어진다.
그랑 시에클 N°26은 단순히 잘 만든 샴페인을 넘어선다. 그것은 시간과 자연, 그리고 인간의 예술적 의지가 빚어낸 지적이고 감성적인 경험이다. 한 모금을 마시는 순간, 우리는 태양왕의 화려한 궁정, 베르나르 드 노낭쿠르의 혁신적인 열정, 그리고 이름 모를 셀러 마스터의 수십 년에 걸친 인내와 마주하게 된다. 자연의 한계를 넘어 인간이 창조할 수 있는 가장 완벽한 '위대한 세기'를 경험하고 싶다면, 그랑 시에클 N°26은 의심할 여지없는 최고의 선택이 될 것이다.
김욱성은 경희대 국제경영학 박사출신으로, 삼성물산과 삼성인력개발원, 호텔신라에서 일하다가 와인의 세계에 빠져들어 프랑스 국제와인기구(OIV)와 Montpellier SupAgro에서 와인경영 석사학위를 받았다. 세계 25개국 400개 와이너리를 방문하였으며, 현재 '김박사의 와인랩' 인기 유튜버로 활동 중이다.
